시인, 전 대전문인협회장

 

삶이란 갈림길의 연속이다. 후회는 시련과 마찬가지로 불가피한 것이다. 인간은 동시에 두 길을 갈 수는 없다. 걸어보기 전에는 누구도 알지 못한다. 누구든 힘들었던 순간이 있었고, 기뻐서 감격의 눈물을 흘렸던 때가 있었고, 너무 암담해서 차라리 삶을 외면하고 싶었던 순간도 있었다. 이 모든 일들이 지금은 추억 속에 존재한다. 만남의 귀중함을 아는 사람은 헤어짐의 소중함도 안다.

그런데 지난 과거 속에서의 아프고 힘들고 괴로웠던 시간이 지금도 여전히 아프고 힘들고 괴롭다고 느끼는 사람들이 있다. 병마가 가난처럼 서린 퀭한 눈을 가진 사람을 보면 다시는 그런 병마와 가까이하지 않겠다는 굳은 의지가 서려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런 아픔이 있었기에 현재의 삶이 더욱 소중하고, 존재한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감사함을 느끼고 있는 사람들을 보면 존경스럽다.

어떤 이는 한쪽 다리를 국가에 바치고도 보란 듯이 의연한 삶을 살고 있다. 뼈를 태워 천 리를 접는 통증도 이겨내면서 살아간다. 예방주사는 더 나은 건강을 위해 일시적인 고통을 허락하는 것이다. 내 삶의 지나간 흔적이 비록 아프고 힘들고 고통스러웠을지라도 그 고통이 없었다면 내 인생의 향기는 아마 덜하지 않았을까 생각하면서 살아간다. 지금도 바람이 몸을 두드릴 때마다 파도 소리가 난다는 사람이 있다. 어떤 이는 새 살을 키우기 위해 온몸에 어둠을 바르기도 한다.

혹독한 주변 환경과 추위의 시련을 견뎌낸 꽃만이 그윽하고 아름다운 향기를 발산하는 것처럼 비록 삐뚤삐뚤 그려진 인생의 흔적이지만 그 질곡의 경험으로 인해 삶의 폭넓은 이해와 나만의 인생관과 삶의 바탕을 이루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숨겨놓은 꽃망울까지 모두 밀어 넣느라 종일 라일락 나무 밑은 텅 비어 있다. 스스로 다스릴 수 없는 마음은 곧 지옥을 의미한다. 내가 힘든 시기를 겪어 봤기 때문에 남이 힘든 것도 이해하게 되고, 내가 고통스러웠기 때문에 병상에서 신음하는 환우들의 고통도 함께 느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아파보지 않은 사람은 그 아픔을 모른다.

고통을 겪고 나면 여인의 고운 얼굴처럼 더욱 예쁘게 보이는 자신을 발견한다. 시련을 겪어내면 저물녘 별들이 등불을 내건다. 평탄한 삶만을 살아왔던 사람이라면 아마도 그 굴곡 없는 삶이 차라리 후회되지 않을까 싶다. 누가 뭐라 해도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평탄하고 행복한 삶도 우리가 바라는 삶 중의 하나겠지만, 시련도 겪고 아픔도 겪어 한층 성숙해진 사람만이 인생의 짙은 향기를 발산하는 삶을 사는 것이라고.

구름도 생각 없이 해를 가리고 서 있는 날이 있다. 폭염 속에서도 끝내 살아남은 질경이를 보았는가? 인생의 진정한 승자는 보란 듯이 잘 사는 사람이 아니고, 성공해서 남들에게 부러움을 사는 사람도 아니고, 여전히 오늘을 열심히 살아가고 있는 우리 모두라는 생각이다.

내 안의 남은 물기가 다른 물기를 만나듯, 허리를 굽히고 무릎을 꺾는 일, 고개를 숙이고 신발 끈을 조이는 일이 먼 훗날 나를 나답게 만들어줄 것으로 확신한다. 종이 처절하게 울면 울수록 깊고 웅혼한 소리가 나고, 부드러우면서도 아프게 도리깨를 때려야 타작마당이 즐겁다.

발바닥이 다 닳아 새 살이 돋도록 우리는 새로운 길을 개척하기 위해 새벽길에 오를 수밖에 없다. 그러한 과정을 이겨내지 못하면 나와 함께 모든 별은 꺼지고 모든 노래도 사라진다. 추위가 더할수록 얼음은 두께를 키운다. 그래야 버들치며 송사리 등 품 안에 숨 쉬는 것들을 따뜻하게 키울 수 있기 때문이다.

닳고 닳아 모서리가 없어진 냇가의 돌멩이처럼 나도 둥글고 싶다. 부끄러움으로 구겨지지 않는 정직한 주름살 몇 개 가지고 싶다. 시래기처럼 마른 어머니의 굽은 등이 뭉근하게 저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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