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교진 세종교육감

코로나19로 100일 정도 학교 문을 닫았습니다. 지금도 2/3만 출석을 하고, 나머지는 원격수업으로 공부를 합니다. 우리나라 선생님들은 대단합니다. 선생님들은 대학에서 원격수업을 배우지도 또 학교현장에서 경험하지도 못했습니다. 갑자기 상황이 들이닥쳤습니다. 원격수업을 할 필요가 없었던 학교나 교육청에는 원격수업 장비를 갖추지 못했습니다. 각자가 알아서 해야 하는 상황이었지요.

어떤 선생님은 휴대전화로 방송을 하고, 어떤 선생님은 인터넷으로 장비를 급하게 구해서 수업했습니다. 원격수업의 방식과 내용에 대해서도 학교 선생님들과 토론하고 또는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서로 논의하면서 헤쳐나갔습니다. 먼저 해낸 선생님이 경험을 공유하고, 나중에 출발한 선생님들이 보완하기도 했습니다.

‘우리 민족은 국난 극복이 특기’라는 농담도 있더군요. 사실 역사적으로 ‘국난 극복’의 주체는 임진왜란의 ‘의병’처럼 백성(시민)이었습니다. 근현대사를 보더라도 시민들의 운동이 주류의 흐름입니다. ‘내가 나라의 주인이다.’라는 주체의식이 촛불시위 후 길거리를 청소하게 만든 것처럼 ‘나 개인’의 이익이 아닌 공동체의 이익을 위해서 ‘나 개인’이 해야 할 일들을 찾아서 해내는 역량이 있는 민족입니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민주주의가 위기에 강하다’는 말을 실감합니다. 학교 안에서 교육주체인 학생, 교직원, 그리고 학부모들이 각 집단 안에서 그리고 서로서로 걸림 없이 소통했던 학교에서 코로나 과제를 풀어나가는 과정에서 협업이 이루어졌습니다. 문제의 발견과 해법 모색, 그리고 실천에 이르기까지 모여서 소통하고 일거리를 나눈 학교에서는 부드럽게 문제를 해결했습니다. ‘학교자치’라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학교자치는 어떻게 가능할까요? 사실 학교자치에 대한 논의는 30년 전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그런 논의 끝에 나온 제도가 ‘학교운영위원회’입니다. 학교의 구성원인 교원, 학부모, 학생이 학교운영에 참여하여야 한다는 취지에서 만든 제도입니다. 96년 학교운영위원회를 출범시키기 전에 논의과정에서는 학생의 참여를 보장하는 문제에 대해서 심각한 논의가 있었습니다. 당시 학생의 참여를 허용할만한 논의가 성숙하지 못했습니다. 지금 같으면 과감하게 초등학교 4학년 이상 학생위원으로 참여할 수 있도록 했겠지요. 항상 참여의 욕구와 현실은 차이가 있습니다.

여전히 학교 안에서 교원과 직원들은 스스로 소외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학부모 역시 정보의 양이 적고 참여의 기회가 적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학생들은 스스로 주체라는 느낌은 없이 학교에서 ‘대상’으로 대우받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교원단체에서는 학교자치를 더욱 강화하기 위해서는 교직원회의, 학부모회, 학생회를 법제화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현재 법령에 간접적으로라도 그 설치근거를 가진 것은 학생회뿐입니다. 초중등교육법에 학생자치활동은 권장·보호되며 기본적인 사항을 학칙에 정하도록 돼 있기 때문에 간접적으로 학생회를 둘 수 있는 근거는 있는 셈입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교무회의’나 ‘교직원회의’는 법정기구가 아닙니다. 그리고 조례 등에 근거한 ‘학부모회’ 역시 좁게 보면 마찬가지입니다. 초중등교육법상 학교에 설치된 법정기구는 학교운영위원회뿐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학교 안에서 교직원회의와 학부모회, 학생회의 실체를 법적으로 보장할 필요가 있다는 주장에 공감합니다.

그런데 저의 고민은 좀 더 깊은 곳에 있습니다. 과연 규정을 만들면 학교에서 교육주체간의 소통과 협력이 잘 이루어질까? 현재 법으로 정해놓은 학교운영위원회에 교원과 학부모의 참여가 부진한 이유가 무엇일까? 규정과 규칙 그리고 제도로 만들어지는 것은 환경일 뿐입니다. 어떤 때에는 규정의 문언에 갇혀서 상황의 역동성에 적응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보다 공동체 안에서 협의가 이뤄지고 합의되는 문화가 더 중요할 수도 있다는 생각합니다. 예기치 못한 감염병 유행으로 학교의 보건선생님들에게 일의 하중이 몰리는 시기입니다.

이때 주변에 구성원들이 ‘그것은 그의 임무이다.’라고 하지 않고 달려들어서 일을 나누는 것이 필요합니다. 직접민주주의가 가능한 작은 규모에서는 규정에 의해서 나뉘는 권한과 책임보다는 그때그때 서로 논의하고 합의하여 함께 짊어지는 책임과 배려가 더 민주적일 수 있습니다. 교직원은 학부모의 의견을 존중하고, 학부모는 교직원의 업무특성을 인정해주고, 학생이 학교교육의 목적이라는 것에 합의하기만 한다면 학교자치는 이미 시작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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