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무사, 수필가, 여행작가

영화 300 포스터
그리스 군장
동상 아래 그리스어 '가져가라'
스파르타 왕 레오니다스 동상
온천 터
아테네 방향 평원
산 위에서 내려다본 계곡
테르모필레 계곡
헤로도토스

[금강일보] 아테네에서 북부의 보이오티아주(Boeotia)와 테살리아 주(Teaseler)로 통하는 길에 카리모도로스산(山)의 험준한 절벽과 마리아코스 만(灣)의 협곡이 있다. 아테네에서 동북쪽으로 약 198㎞쯤인 이곳은 행정구역상 중앙 그리스주 프티오티타 현인 테르모필레(Thermopylae)인데, 테르모필레란 그리스어로 '뜨거운 문'이라는 뜻이다. 이 일대는 유황온천 지대로 유명하지만, 임진왜란 때 물밀 듯이 북상하는 왜군과 싸우던 신립 장군이 중과부적으로 충주 탄금대에서 전원이 몰사하였듯이 스파르타왕 레오니다스가 지휘하는 300여 명이 페르시아의 크세르크세스 1세(Xerxes Ⅰ: BC 486~ BC 465)가 이끄는 30만 대군과 맞서 싸우다가 전원이 장렬하게 전사한 격전지로 유명하다.

BC 6세기 후반 페르시아의 다리우스 1세(Darius Ⅰ: BC 522~ BC 486)는 소아시아 해안에 있던 그리스인들이 세운 여러 도시국가를 모두 정복하고 대제국을 이룩했다. 그러던 중 페르시아의 지배를 받던 밀레투스 등이 반란을 일으키면서 본토의 도시국가들에게 지원을 요청하자, 아테네가 군함을 파견하는 등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이에 분노한 다리우스 1세는 그리스 본토의 도시국가에게 복종을 요구하니, 대부분의 도시국가가 굴복했으나 아테네와 스파르타는 사신을 처형하는 등 강력히 대응했다. BC 492년 다리우스 1세는 사위인 마르도니우스를 총사령관으로 임명하여 그리스의 트라키아 해안까지 침입했다. 그러나 폭풍으로 배 300척이 부서지고, 병사 1만 명이 바다에 빠져 죽자 철수했다.

2년 뒤인 BC 490년 다리우스 1세의 2차 원정군이 에게해를 건너 그리스 본토를 침입했다. 이때 보이오티아 동맹의 중심인 테베는 마케도니아, 테살리아 등과 함께 페르시아군의 편에 섰지만, 페르시아군은 마라톤 평원(Marathon)에서 아테네에 참패를 당했다. 마라톤 평야에서 아테네까지 42.195㎞를 달려 승리를 알리고 숨을 거둔 병사 페이디피데스는 오늘날 마라톤의 기원이 되었다(페르시아 전쟁에 관하여는 2020. 9. 9. 테베 참조).

다리우스 1세가 마라톤 전투에서의 패배를 복수하려고 준비하다가 죽자, 그의 아들 크세르크세스 1세(Xerxes Ⅰ: BC 486~BC 465)가 BC 480년 8월 30만 대군을 이끌고 바다와 육지로 총공격에 나섰다. 페르시아의 3차 공격에 그리스는 스파르타의 주도로 30개 도시국가가 동맹하여 육군은 스파르타의 왕 레오니다스(Leonidas: BC 487~BC 480)가 지휘하고, 해군은 아테네의 테미스토클레스(Themistocles)가 맡기로 했다. 레오니다스 왕은 스파르타군 300명과 다른 도시국가 병사 7천 명을 이끌고 테르모필레의 방어에 나섰다. 왕이 직접 지휘하는데도 많은 병력이 없는 것은 스파르타군은 대부분 농업에 종사하는 자유 시민이었는데, 농번기에 장거리 원정을 떠나면 농사를 지을 수 없어서 큰 타격을 입기 때문이었다.

테르모필레에서 스파르타군에게 저지당한 크세르크세스 1세는 레오니다스 왕에게 "물과 흙을 바쳐라"라며 항복을 요구했으나, 레오니다스는 "와서 가져가라! (μολὼν λαβέ/몰론 라베)"라며 거절했다. 스파르타군의 불굴 의지를 표현한 이 말은 오늘날 유럽의 군대에서 ‘불굴의 상징’으로 이용되고 있다. 협상이 결렬된 뒤에도 크세르크세스 1세가 나흘 동안 공격을 하지 않고 기다린 것은 소규모의 그리스군이 페르시아 대군의 위세를 보고 겁먹고 달아날 것을 기대했다. 그러나 그리스군이 꿈쩍도 하지 않자 비로소 공격을 개시했지만, 테르모필레의 좁은 골짜기로 대규모의 병력이 진격할 수 없어서 별 효과가 없었다.

그렇게 나흘간을 머뭇거리던 중 에피알데스(Ephialtes: ?~BC 461)라는 농부가 포상금에 현혹되어 페르시아군에게 오솔길을 알려주어서 스파르타군의 후방을 기습 공격하여 전원이 전사했다. 테르모필레 전투에서 스파르타군의 용맹성은 2004년 제라드 버틀러와 에버그린 등이 출연하고, 미국의 노암 머로(Noam Murro) 감독이 제작한 영화 '300'에서 많은 사람에게 각인되어 있다. 하지만, 사실 그리스군은 스파르타 병사 300명 이외에도 1000여 명의 스파르타 자유민, 3000명의 펠로폰네소스 동맹군, 3000명의 테살리아, 코린토스 지역 이외의 그리스 시민과 900명의 헤일로타이(스파르타 노예계급)도 참가하였으나, 다른 전선에 분산배치하고 협곡인 테르모필레에는 정예군 300명이 방어에 나선 것이다. 소아시아 출신으로서 아테네에서 살았던 역사가 헤로도토스(Herodotus: BC 484~ BC 425)는 그의 페르시아전쟁사에서 ‘5천 명의 그리스군이 페르시아군 210만여 명을 닷새간이나 저지할 수 있었던 것은 테르모필레 지형과 그리스군의 용맹성이었다’고 기록했다.

테르모필레에서 승리한 페르시아군은 아테네까지 진격했지만, 살라미스 해전(Battle of Salamis)에서 테미스토클레스가 지휘하는 그리스 연합 해군에게 대패했다. 페르시아군은 본국으로 철수하지 않고 동북부인 테살리아 지방에 머물러 있다가 BC 479년 4차 공격을 시도했지만, 또다시 패했다. 한편, 페르시아군에게 오솔길을 알려주고 많은 포상을 기대했던 에피알데스는 살라미스 해전에서 페르시아군이 패하여 철수하자 아무런 포상도 받지 못했다. 게다가 그리스에서 살 수 없게 된 그는 테살리아로 달아났지만, 그의 목에 현상금이 걸리자 아테나데스에게 죽임을 당했다. 이후 그리스인들이 그를 반역자라고 증오하여, 그의 이름은 그리스어로 '악몽(efialtis)'이라는 단어의 어원이 되었다.

아테네에서 북서쪽으로 약 350㎞가량 떨어진 테살리아주의 소도시 칼람바카(Kalambaka)에 있는 메테오라(Meteora) 수도원으로 가는 길에 들른 테르모필레는 도로변의 간이휴게소처럼 초라한 모습인데, 이곳에는 레오니다스 왕의 동상과 당시 유명한 시인 시모니데스(Simonides of Ceos: BC 556~ BC 468)가 남긴 글이 비문에 새겨있다.

"그대,
지나가는 나그네여.
가시거든 라케다이몬 사람들에게
우리가 조국의 명령에 복종하여
여기에 누워있노라고 전해주오. “

그리스군은 페르시아군이 퇴각한 뒤 레오니다스 왕의 시신을 수습하여 매장하고, 사자상을 세워서 그의 용기를 기렸다. 40년 뒤 그의 유해는 다시 스파르타로 옮겨서 성대한 장례식과 함께 매년 그의 죽음을 기리는 스포츠 행사를 열었다.

페르시아 전쟁은 그 후에도 30년 동안 계속되다가 BC 448년경 아테네와 페르시아의 아르타크세르크세스 1세 사이에 평화협정을 맺음으로써 끝났다. 페르시아 전쟁은 동양과 서양 간의 첫 대결이었고, 서양의 도시국가가 동양의 대제국과 싸움에서 승리했다는 데 의의가 있다. BC 5세기에 3차에 걸친 이민족인 소아시아의 페르시아 침략을 물리친 페리클레스 시대에 최고전성기를 맞았으나, 아테네와 스파르타의 패권 다툼으로 국력이 쇠약해지더니, BC 313년경 마케도니아에 망했다. 그 후 로마제국이 그리스를 점령하고, 다시 오스만튀르크의 통치를 받는 등 2000년 이상 나라를 잃고 살아왔다(2020. 8. 18. 아테네 고고학박물관 참조). <법무사, 수필가, 여행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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