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준 사회부장

이기준 사회부장

 전태일이라는 노동자가 있었다. 서울 평화시장 의류공장 견습공(시다)으로 취업해 재단사가 됐다. 1948년에 태어났고 1965년에 첫 취업을 했으니 그의 나이 열일곱에 첫 임금 노동자가 된 거다. 노동자의 하루는 무척 고단했다. 바쁠 때면 하루 평균 15시간씩 일을 해야 했다. 잠을 쫓기 위해 약을 먹어가며 야간작업을 해야 하는 날도 빈번했다.

노동환경 역시 열악했다. 원래 3m정도 높이의 공간을 2개 층으로 나눠 사용하는 바람에 일어설 수조차 없는 곳에서 일을 해야 했다. 8평 남짓 공간에 32명이 일을 하는 곳도 있었다. 작업장이 아니라 말 그대로 사육장이었다.

이에 대한 대가는 보잘 것 없었다. 전태일이 처음으로 했던 ‘시다’의 경우 미싱사와 재단사를 보조하면서 실이나 단추 등을 나르고 실밥을 뜯는 허드렛일을 했는데 이들이 한 달 일 하고 받는 돈은 1500원(1964년 기준)이었다. 하루 50원 꼴이다. 당시 커피 한 잔 값이 50원이었다.

청년 전태일은 숨 막히는 노동현실에 절망했다. 자신이 처한 현실의 문제이기도 했지만 배를 곯아가며 일 하는 어린 여공들을 보면서 좌절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한다. 업주들의 횡포와 착취구조에 문제인식을 갖고 있었기는 했지만 누구 하나 입 밖으로 ‘불합리’를 내뱉을 순 없었다. 당시 업체 사장과 노동자는 주인과 노비의 관계였다. 애당초 ‘평등한 관계’에 대한 인식을 갖기 어려웠다.

물론 이 당시에도 근로기준법이라는 게 있었다. 전태일이 평화시장에서 일을 할 당시 근로기준법은 1일 8시간, 1주 48시간을 기준으로 근로시간을 명시했는데 노사합의로 1주일에 60시간까지 근로시간을 늘릴 수 있었다. 13세 이상 16세 미만의 경우 근로시간은 1일 7시간, 1주 42시간을 초과할 수 없었고 정부 인가를 받은 경우 1일 2시간 이내에서 연장할 수 있었다. 여자와 18세미만 노동자는 야간·휴일근로가 금지됐다. 당시에도 1주일에 평균 1회 이상 유급휴일이 있었고 연장근로와 야간근로, 휴일근로에 대해선 통상임금의 50%이상을 가산해 지급하도록 했다.

사용자는 1월, 1일의 유급휴가를 줘야 하고 1년간 개근 시 8일, 9할이상 출근 시 3일의 유급휴가를 주도록 했다. 여성에겐 월 1일의 생리휴가와 산전후 60일의 유급보호휴가를 보장해야 하고 일부 사용자에겐 근로자의 채용 시와 정기로 노동자에 대한 건강진단 의무를 부과했다.

13세 이상 16세 미만자의 근로시간은 1일에 7시간 1주에 42시간을 초과할 수 없었으며 사회부의 인가를 얻은 경우에는 1일에 2시간 이내의 한도로 연장할 수 있었다. 여자와 18세미만자는 야간 및 휴일 근로가 금지되었다. 산업재해보상에 대해서는 근로기준법 제8장의 16개조가 규정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같은 내용을 담은 근로기준법은 지켜지지 않았다. 당초 근로기준법은 노사 관계나 경제상황에 대한 객관적인 분석 없이 국제규격에 얼추 부합하는 수준의 내용을 가져다가 구색 맞추기로 제정된 데다 이후 합리적인 논의도 이뤄지지 않아 현실과의 괴리가 상당했다.

전태일은 1970년 11월 13일 ‘근로기준법을 지켜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라고 외치며 스스로 산화했다. 그의 외침은 노동자의 기본권리에 관한 것이었고 ‘노동자도 사람답게 살 수 있게 해 달라’는 절규였다. 전태일 열사가 산화한 지 50년이 지난 지금, 노동환경도 바뀌었고 노사 관련 법령도 많이 개선됐지만 전태일이 화두로 던진 ‘노동 인권’은 나아졌을까?

전혀 그렇지 않다. 아침에 출근해 저녁에 노동현장에서 집으로 돌아오지 못 하는 사람들은 한 해 평균 1000명에 달한다. ‘위험의 외주화’에서 비롯되는 안타까운 죽음은 계속되고 있다. 50년 전 평화시장 노동자들처럼 일하다 과로사로 숨지는 택배노동자들은 매일 카운팅되고 있다. 일터에서 죽지 않고 일 할 수 있게 해달라는 외침은 예나 지금이나 변화가 없다. 노동의 형태는 더 세분화돼 근로기준법을 포함한 노동관계법의 사각지대는 더욱 늘었다.

새카맣게 그을린 전태일의 유언은 “엄마, 내가 못다 이룬 소원들을 엄마가 제 대신 이뤄 주세요. 친구들아 절대 내 죽음을 헛되이 하지 말아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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