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윤희 한국표준과학연구원 책임연구원

먹거리나 맛집 소개, 요리 경연 프로그램이 텔레비전에서 봇물 터진 듯 쏟아져 나오고 있다. 아내가 요리에 관심이 많은 덕분에 필자도 호사를 누리고 있다. 요리를 잘하는 이들은 재료의 맛을 숫자마냥 더하고 빼서 마지막 식탁에 차려질 요리의 맛을 상상한다.

‘음 불고기 양념의 간장 맛이랑 달콤한 배 맛이 토마토소스의 새콤함과 만나면 기가 막힌 '단짠'이 될 것 같아.’ 누구나 따라할 수 있는 레시피라는 것이 있지만, 요리를 잘하는 사람에게는 편곡자가 새로운 시선으로 하나의 노래에 원곡을 뛰어넘는 색다른 인상을 부여하는 것처럼 평범한 요리에 본인만의 독특한 맛을 더하는 능력이 있다.

연구자들이 접하는 실험도 어찌 보면 요리를 하는 과정과 유사한 것 같다. 가보지 않은 영역에 대한 실험 혹은 측정을 위해서 각 시료의 고유특성을 바탕으로 새롭게 생성될 물질의 물성을 상상할 수 있어야 한다.

과학기술 연구자 집단에서 이를 ‘영감(inspiration)’이라고 표현하기도 하고, 우연성에 기반한 행운으로 바라볼 때는 ‘세렌디피티(serendipity)’라는 표현을 쓰기도 한다. 이들은 ‘신의 선물’을 받아든 것 같기도 하고, 혹은 많은 사람이 죽은 요리를 살리는 방법으로 알고 있는 ‘라면스프’와 같은 ‘신의 양념’을 호주머니에 숨기고 있는 듯하다.

인체를 투과하여 뼈를 볼 수 있게 할 만큼 강한 빛인 X-선을 발견한 뢴트겐은 음극선관 실험에서 세렌디피티의 순간을 맞게 된다. 두꺼운 종이로 감싼 음극선관에서 미지의 빛이 나와 수 미터 떨어진 맞은편 책상에 올려 둔 형광물질과 반응하는 현상의 발견이었다.

그러나 이를 단순히 행운이었다고 치부할 수 없는 이유는 당시 많은 연구자가 음극선관 실험에 몰두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무심히 흘려 넘겼을 희미한 빛을 그가 놓치지 않고 꼼꼼하게 관찰하였다는 점이다. 그는 수 주에 걸쳐 두꺼운 책에서부터 나무, 알루미늄, 납 상자에 이르기까지 새롭게 발견한 미지의 빛이 갖는 투과도를 촘촘하게 측정해 나갔다. 이 과정들을 통해서 현대과학의 시작이라 할 수 있는 위대한 발견이 이뤄졌다.

필자가 연구하고 있는 결정핵 생성은 ‘확률론적인 현상’으로 설명되고 있다. 그러나 이 표현은 주사위를 던져서 무작위의 숫자들이 나오는 것과 달리 아직까지 우리가 이해하거나 제어할 수 없는 현상이라는 의미가 더 크다. 주말까지 반납하면서 근 1년을 실험에 매달렸고, 처음 몇 개월은 세렌디피티의 순간을 맞아 좋은 실험결과가 얻어지기를 바랐다.

하지만 좀 더 시간이 흐르고, 원하는 결과가 쉽게 얻어지지 않으면서 더이상 세렌디피티를 원치 않게 되었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특별한 신의 양념으로 좋은 실험결과를 얻고, 이를 잘 정리하여 좋은 실적을 얻었다 한들 나를 뒤쫓아 재현 실험을 수행하는 연구자들이 동등한 결과를 얻지 못한다면 나의 실험에 뿌려진 신의 양념은 독이 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서 나를 거짓말쟁이로 만들 수도 있다.

결국, 신의 양념은 뢴트겐이 희미한 불빛을 놓치지 않고 관찰할 수 있었던 것처럼 연구자에서 희미한 힌트를 제공하는 수준이면 충분하다. 영감이나 세렌디피티는 번쩍하고 번개가 치듯이 나타나지 않는다. 창의성이 끊임없는 노력으로 축적된 방대한 지식과 결과들의 색다른 편집에서 발생하듯이, 오랫동안 철두철미한 실험으로 숙달된 이들만이 신이 뿌린 양념이 만들어 내는 미묘한 변화를 눈치챌 수 있다. 이후에는 신에게 뭔가를 기댈 것이 아니라 자신이 진행하고 있는 실험 인자들을 보다 꼼꼼하게 제어하고, 촘촘하게 실험조건들을 조절할 필요가 있다. 이것이야말로 연구자가 자신의 호주머니에 보관할 수 있는 가장 큰 무기가 아닌가 한다.

저작권자 © 금강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