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 새벽녘에 천둥번개가 치고 빗줄기가 우두둑 몰아친다. 봄 가뭄이 아주 심하다고 난리인데 반가운 비가 아닐 수 없다. 오늘은 멀리 지리산 자락에 있는 윤(尹)선생님의 별장에 초대를 받아 1박2일 예정으로 출발하는 날이다. 비바람이 걱정은 되지만 그래도 쨍쨍 내리쬐는 햇볕보다는 오히려 나을 거라고 혼잣말을 해 본다.

오후 수업을 마치고 고속도로에 올랐다. 나만의 공간에서 운전대를 잡고 여유롭기 그지없다. 간간히 내리는 빗줄기가 오히려 드라이브의 멋을 더해준다. 무르익은 신록이 어느새 진한 초록세상을 만들었고, 비 때문인지 푸르름이 더 싱싱해 보인다. 논에는 벌써 땅심 맡은 벼가 초록물결을 이루고 있다. 논두렁을 오가는 분주한 농부의 모습에서 다시 바쁜 한 해가 시작되었음을 안다.

지방도를 벗어나자 차(車)는 자꾸 계곡으로 빨려 들어간다. 좁아지는 길옆으로 풀과 나무들이 가깝게 다가온다. 그래선지 동네이름도 심곡(深谷)이다. 7부 능선 정도는 올랐는지 좁은 도랑 옆의 주차장이 나오고, 나무숲 사이로 납작 엎드린 한옥(韓屋)이 눈에 들어온다. 나무 위로 피어오르는 연기를 보니 어(漁)선생의 고기 굽는 모습이 연상된다.

맑은 물이 돌 틈 사이를 헤집고 흐른다. 물속의 돌멩이는 이끼 흔적이 없고 뽀송뽀송하다. 냇물을 건너자 옥련대(玉蓮臺)라는 현판이 눈에 띈다. 옥(玉)같이 맑은 감로수(甘露水)가 흐르는 집이라는 뜻이다. 옆에서 흐르는 물소리와 산속의 뻐꾸기 소리가 조화를 이루는 숲속 별장은 바로 무릉도원(武陵桃源)이다.

저녁 식사 전에 주위를 둘러보고자 카메라를 들고 곧바로 계곡으로 올랐다. 도랑 옆으로 때죽나무, 꾸지나무, 애기사과, 아그배나무, 생강나무, 뽕나무, 매실나무 등이 웃자라 키재기를 하고 있다. 산 밑에 일궈놓은 텃밭에는 명이나물, 어수리, 곰취, 곤달비, 쑥갓, 상추, 고수 등이 눈에 들어온다. 커다란 어수리나물 아래 빼꼼히 흰꽃대를 내밀고 나를 훔쳐보듯 약모밀이 보인다. 어수리가 워낙 잎이 커서 약모밀이 잘 보이질 않는데, 꽃잎처럼 생긴 하얀 턱잎이 십자(十字)형태로 눈에 띈 것이다. 지난번 제주 올레에서 보았는데 지리산 깊은 계곡에서도 보니, 약모밀은 아주 넓은 지역에 걸쳐 자라는 식물인 것 같다.

고요한 산속에 물소리만 가득하다. 7시가 넘어서자 산자락엔 벌써 어둑어둑해진다. 하얀 약모밀꽃이 더욱 희게 보인다. 지난번 수락계곡을 내려오다가 어둠 속의 약모밀꽃이 은하수처럼 흰빛을 발하던 모습이 생각난다. 땅그림자 내려앉은 심산유곡에서 반가운 약모밀과 카메라를 들이대고 마주 앉았다. 어수리 이파리의 지붕 때문에 새벽녘 이슬의 물 한모금도 얻어먹기 힘든 것 같아 큰 이파리를 뜯어주었다.

<대전시 평생교육문화센터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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