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 학창 시절 지금 30대 중후반의 우리는 참 많이 맞았다.학교 앞 문구사에서는 지휘봉처럼 생긴 막대기를 팔았는데 그 용도는 주로 교사가 학생을 때리기 위한 것이었고 학기 초 깨끗했던 출석부는 기말 즈음에 가서 너덜너덜 해지기 일쑤였다.심지어 남자 교사들끼리 자신이 소유한 체벌도구의 위하력(威?力)을 가지고 경쟁하는 모습은 학생들에게 초미의 관심이 되기도 했다. 성적이 저조해도 맞고, 예의에 어긋나도 맞았다.교육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이 두 가지를 유지하기 위해 대부분의 교사들은 단체기합이나 체벌에 의존했다. 그도 그럴 것이 한 반에 60여 명 씩 되는 학생에게 교사가 일일이 신경 쓸 수도 없었다.그러나 교사의 권위에 눌려 맞을 때의 감정은 증오와 함께 참담한 수치심을 느끼게 할 뿐 경외심(敬畏心)이나 반성이라는 교육적 효과를 유발하지는 못했다.심지어 체벌할 때 교사 스스로 감정을 컨트롤하지 못하는 경우엔 학생이 사람인가 싶기도 했고 ‘복날 개 패 듯’이라는 표현이 머리를 스치기도 했다. 일반적으로 체벌은 상대방에게 신체적 고통을 가하기 위해 손, 주먹, 발 등 신체의 일부나 회초리, 대걸래자루, 출석부, 야구방망이 등 물건을 가지고 상대방의 신체에 물리력을 가하는 것, 또는 무릎끓기, 엎드려뻗쳐, 원산폭격, 의자들기 등 기합과 같은 벌을 주는 행위를 말한다.이 정도 되면 체벌이라는 개념은 폭력의 또다른 표현이라 할 만하다.교육현장의 폭력문화가 군사독재 시절 군사문화에서 나왔다는 설도 있고 일제시대 ‘조선놈들은 맞아야 말을 듣는다’고 하는 세뇌에서 시작됐다는 설도 있다.김홍도의 서당도를 보면 훈장 옆에 회초리가 놓여있고 한 학생이 훈장에게 종아리를 맞았는지 눈물을 훔치고 있는 모습도 보인다.이렇듯 교육과 체벌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 가다보면 한도 끝도 없겠지만 분명한 것 하나는 앞서 나열한 시절 우리 사회에는 인권에 대한 의식이 없거나 희미했다는 것이다.그러나 현재 대한민국에서의 인권은 ‘국가가 보장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의무이며 사회에서 지켜야할 가장 중요한 가치’라는 데 이견이 없다.얼마 전 서울시교육청은 학생들을 상습 폭행한 초등학교 교사를 직위해제했다.그리고 교사의 체벌이 상식을 벗어나 폭력 수준에 이른 사례가 잇달으면서 유·초·중·고등학교에서 체벌을 전면 금지했다.이 방침이 학생인권 보호를 위한 당연한 결정이라는 반응도 있지만 한국교원단체총연합회는 “학교 규칙에서 정한 사회통념상 용인될 수 있는 수준의 체벌조차 허용되지 않는다면 사실상 교사의 학생 포기 사태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고 반박한다.그런데 ‘사회통념상 용인될 수 있는 수준의 체벌’이란 도대체 무슨 의미이며 그에 대한 판단은 누가하고 만일 그 수준을 교사의 자의(自意)적 판단에 의존한다면 그 부작용은 누가 책임 질것인가?어떻게 체벌이 동기나 방법에 의해 정당화 될 수 있는가?또 체벌 금지를 학생 포기로 연결시키는 논리는 교사 스스로 전문가로서 교육자라는 자부심과 교권을 포기해버리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교육전문가로서 교사는 체벌이라는 수단 외의 학생지도 방법을 알고 있어야 하고 또 그럴 것이라고 국민들의 믿고 있다.그렇지 못하다면 교사 스스로 교육전문가임을 포기하거나 의무를 태만히 한 것이다.이 정도 되면 교사라는 직업이 단순한 지식 전달자에 그치고 마는 것인데 그런 역할은 사설학원에서도 충분히 이뤄지고 있다.심지어 체벌 금지가 교권침해라는 주장도 있는데, 교권이란 정치나 외부의 간섭으로부터 독립해 자주적으로 교육할 권리를 말하는 것이지 학생을 체벌할 권한이 그 속에 포함돼 있다는 뜻은 아닐 것이다.만약 학생의 인권으로서 신체의 자유와 사회적· 통념적 의미의 교권이 충돌한다고 할지라도 교권보다는 학생의 인권이 더 우선한다. 사랑의 매는 허구다.요즘 아이들은 더 이상 사랑의 매를 사랑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피교육자가 그렇게 받아들인다면 체벌의 교육적 효과는 없는 것이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체벌이 계속 된다면 체벌은 학생들의 공포와 수치심을 담보로 하는 교사의 화풀이 수단밖에 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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