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천향대 중국학과 교수

[금강일보] 오늘은 중국 문명의 발상지인 ‘중원(中原)’으로 떠나보자. 중원, 무협지에서 많이 접해봤을 단어이다. 중토(中土), 중주(中州) 등으로도 불리는 중원은 낙양(洛陽, 뤄양)에서 개봉(開封, 카이펑)에 이르는 황하 중하류 지역을 일컫는다. 중국 문명의 발상지답게 수천 년 전부터 인류가 살아온 역사를 가지고 있으며, 이후에도 여러 왕조의 주요 도시가 되어 300여 명이 넘는 제왕이 이곳에 수도를 두거나 천도하였다고 한다. 

먼저 중원의 대표 도시 하남성(河南省)의 낙양을 살펴보자. 13개 왕조, 1500여 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수도로서 자리를 지켜온 도시 낙양. 현재도 인구 700만에 달하는 대도시로 그 위상을 지켜나가고 있다. 

지금 낙양을 찾는다면 흐드러지게 핀 모란을 볼 수 있다. 모란은 꽃이 폈을 때 그 풍성함과 영롱한 색으로 부귀영화를 상징하며 중국인들의 큰 사랑을 받고 있다. 특히 낙양의 토양 성분이 모란의 성장에 적합하여 그 색과 모양이 아름답기로 유명하다.

낙양이 ‘천년의 제도, 모란꽃의 도시’라 불리는 이유이다. 중국에는 정식으로 국화가 존재하지 않는데 모란은 국화격으로 사랑받는 꽃이다. 중국에 국화가 정해지지 않은 이유는 중국 남방 사람과 북방 사람이 선호하는 꽃이 다르기 때문이라고 한다. 북방 사람들은 모란을, 남방 사람들은 말리꽃(자스민)을 선호하다보니 이 의견 차이를 좁히지 못해 결국 국화를 선정하지 못했다고 한다. 

낙양에 가면 반드시 용문석굴(龍門石窟)을 들러야 한다. 용문석굴은 감숙성(甘肅省) 돈황(燉煌)의 막고굴(莫高窟), 산서성(山西省) 대동(大同)의 운강석굴(雲崗石窟)과 더불어 중국을 대표하는 3대 석굴이다. 유유히 흐르는 이하(伊河)를 앞에 둔 용문석굴은 남북 1㎞ 길이의 돌산으로, 불교가 성행하던 북위(北魏, 386-534) 효문제(孝文帝, 467-499) 시기부터 조영되기 시작하여 약 11만여 존의 불상이 조각되어 있다고 한다. 그중 단연 으뜸은 용문석굴 중간에 자리 잡은 대형 노사나불(盧舍那佛)상이다.

신비로운 미소와 인자한 눈빛으로 중생을 바라보는 대불상을 보고 있노라면 세속의 때가 씻겨나가는 느낌이 든다. 더 재미있는 건 이 노사나대불상의 모델이 측천무후(則天武后, 624-705)라는 것이다. 중국 최초이자 최후의 여제(女帝)인 측천무후는 스스로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 여러 행적을 남겼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이 자신의 이름으로 쓸 글자를 새로 만든 것인데, 바로 ‘曌(비칠 조)’로 글자에서 볼 수 있듯이 ‘공중에 떠있는 해와 달이 세상을 비춘다’라는 의미이다. 노사나불 역시 ‘빛이 모든 걸 비춘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어 이를 조각하게 한 것이라고 한다. 노사나불상의 맞은편 산에는 당대 유명 시인 백거이(白居易, 772-846)의 무덤이 있으니 꼭 들러보도록. 

낙양시의 북동쪽에는 중국 최초의 고찰인 백마사(白馬寺)가 있다. 동한 영평 11년(68)에 세워진 백마사는 불교가 중국에 전래된 이후 최초로 지어졌기 때문에 불교의 발상지로 추앙받고 있다. 기록에 따르면 동한 명제(明帝, 28-75) 시기 천축국에 사신을 보내 불법을 배워오게 하였고, 인도의 고승 둘을 모시고 돌아왔다고 한다. 명제는 이들이 머물고 불법을 전파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도록 명령하였고, 이들이 백마에 불경과 불상 등을 싣고 온 것을 기념하여 백마사라 이름 지었다. 재미있는 것은 우리가 보통 절을 ‘절 사(寺)’로 부르는데, 이렇게 부르는 이유가 바로 백마사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즉, 인도 고승이 처음으로 중국에 왔을 때 임시로 머문 곳이 바로 조정의 외교담당기관이었던 ‘홍려시(鴻臚寺)’였고, 이들에게 머물 곳을 지어준 후에도 관청을 나타내던 ‘시(寺)’를 썼던 것이다. 이것이 관행으로 굳어져 이후에는 불교 사원을 나타내는 말로 ‘절 사(寺)’가 자리매김한 것이라고 한다. 

삼국지를 좋아하는 이들은 반드시 관림(關林)을 가보길 추천한다. 유비(劉備, 161-223)와 도원결의를 맺은 명장 관우(關羽, ?-220)의 목이 묻힌 곳이라고 한다. 219년 겨울, 손권(孫權, 182-252)은 관우가 지키고 있던 형주(荊州)를 급습하였고, 관우는 맥성(麥城)으로 패주하였다. 관우는 아들 관평(關平, ?-?)과 함께 포위를 뚫고 탈출을 시도하다가 손권의 복병에게 붙잡혀 참수 당하였다.

이후 손권은 관우의 머리를 조조에게 보냈고, 조조는 이를 제후의 예로 장례를 치러 안장하였으니 그 무덤이 바로 관림이다. 관우의 애국충정과 무용담은 후세 중국인들의 많은 사랑을 받아 그는 무신으로 추앙받았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무신 관우가 현재는 재물신으로 탈바꿈하였다는 것이다. 명청대, 상인들이 멀리 장사를 떠날 때 경호원들을 대동하였는데, 목숨을 담보로 생계를 유지하는 경호원들이 믿는 신이 무신 관우였다. 그런데 상인들도 경호원과 함께 관우를 믿게 되면서 점차로 재물신으로 바뀌게 되었다고 한다. 중국의 가게마다 긴 수염에 손에 보물을 쥐며 함박웃음을 짓고 있는 인형을 볼 수 있는데, 이게 바로 재물신으로 전락(?)한 그 청룡언월도의 명장 관우이다.

<순천향대 중국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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