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호 문학평론가

[금강일보] 정부의 코로나19 백신 접종계획에 따라 조심스레 진행되던 고위험 대상에 대한 우선 접종이 일단락되고, 일반인 고령층을 대상으로 한 백신 접종이 가속화되고 있다.

그간 야당이나 언론에 의해 증폭되던 백신 수급에 대한 불만이나 백신 부작용에 대한 과잉 공포가 백신 접종에 대한 적극적인 호응으로 극적 전환을 맞고 있다. 특히 뛰어난 정보기술 시스템으로 60세 이상 고령층의 연령대별 사전 예약과 순차적 접종의 전국적 시행으로 백신 접종의 시작은 약간 늦었어도 접종률은 어느새 세계 평균을 웃돌게 됐다. 이런 추세라면 정부의 상반기 접종률 달성은 무난할 것으로 예상된다.

나와 아내는 사전 예약 첫날 곧바로 예약했다. 접종 첫날인 5월 27일은 온라인 학습을 하는 큰손자를 돌봐야 하는 주간이어서 다음주인 31일 집에서 가까운 소아청소년과로 예약했다. 그런데 며칠 후 병원에서 연락이 왔다. 예약된 날에 신청자가 적다고 28일로 변경했다. 사정을 알게 된 며느리가 편히 접종하시라면서 그날은 친정어머니가 대신해 큰손자를 봐주시기로 했단다. 28일 병원 문이 열리자마자 아내와 함께 문진표를 작성하고 접종했다.

아내는 큰 이상증세 없이 텃밭도 다녀올 정도였고, 나는 팔이 좀 뻐근한 정도였다. 아내는 이틀간 하루 세 번 해열제를 한 알씩 먹었고 나는 하루만 복용했다. 삼일째는 아내랑 텃밭에서 풀도 뽑고 상추도 뜯으며 평소처럼 지내도 아무렇지 않았다. 다음 주말이면 접종 후 2주가 되고, 드디어 항체가 형성돼 예방률도 높아진다니 마음이 가볍다. 고교 동창들과 카톡에서 주고받던 접종 후 반응 얘기도 잦아든 걸 보니 다들 마음이 편안해졌나 보다.

작년 5월 문재인 대통령은 우리나라 대통령으론 처음으로 세계보건총회에서 기조연설을 했다. 문 대통령은 우리나라는 코로나 피해를 가장 먼저 입은 나라 중 하나로 빠르게 해결책을 찾아야 했다며, 나와 이웃의 안전을 위해 개인의 자유를 ‘모두를 위한 자유’로 확장했고, 시민들의 적극적인 연대와 협력으로 모범적인 방역국의 모습을 보여줄 수 있었다고 말했다.

문 대통령은 코로나 이후를 대비하기 위해 ‘보건 취약국에 대한 인도적 지원’, ‘백신 치료제 개발과 공평한 보급을 위한 협력’, ‘국제협력 체계를 정비하기 위한 국제보건 규칙의 빠른 정비’ 등 세 가지를 제안했다. 문 대통령은 이런 제안을 통해 한국의 이미지 신장은 물론 국제사회 리더십을 보여줬다.

이런 국제사회 리더십은 지난달 한미정상회담에서 글로벌 백신 파트너십 체결로 확인됐다. 세계 최고의 백신 기술을 가진 미국과 백신 대량 생산설비와 능력을 갖춘 우리나라가 협력해 전 세계의 백신 공급에 함께하기로 한 것이다. 미국과의 이런 합의 배경에는 백신 문제에 대한 문 대통령의 대국적인 접근법이 큰 영향을 끼친 것으로 알려졌다. 한국이 백신 생산기지로 세계 전체를 구하는 일에 힘을 보태겠다는 접근법이 바이든 대통령의 호감을 끌어냈다는 것이다.

바이든 대통령은 이렇게 말했다. “내가 이래서 문 대통령을 좋아한다. 그는 한국에 대해서만 언급하는 게 아니라 인도, 태평양과 전 세계에 대해 이야기한다.”

바이든 대통령의 이런 호감 표현 외에도 우리나라 대기업들의 미국 투자에 대해 “땡큐 땡큐 탱큐”를 연발하는 모습은 우리나라의 바뀐 위상을 실감하기에 충분했다. 어린 시절 미국이 주는 구호물자로 만든 빵과 옥수수죽을 먹으며, 미군이 뿌려대는 맹독성 농약인 디디티 가루를 더 맞으려 머리를 디밀던 씁쓸한 추억을 떠올리면 정말 상전벽해다.

그러나 백신의 개발과 공급이 곧바로 코로나 종식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는 게 학계의 공통된 의견이다. 백신 개발은 코로나에 대한 대증적인 처방일 뿐 근본적인 대책은 아니다. 세계적인 경제학자이자 사회학자인 제러미 리프킨은 코로나에 대해 ‘기후변화가 낳은 팬데믹’임을 지적하며 인간중심주의에서 벗어나 모든 종의 공존을 추구해야 함을 강조한다. 인간과 다른 모든 존재가 서로 긴밀하게 이어져 있기에 지구와 만물에 대한 근본적인 태도 전환이 요청된다는 것이다.

사실 우주를 뜻하는 유니버스의 어원은 ‘하나로 돌아감’이라고 한다. 19세기 말 대립하고 분열해 서로를 배제하는 문화를 극복할 새로운 문명을 모색한 동학의 ‘동귀일체(同歸一體)’의 지평을 다시금 되새겨 볼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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