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금강일보] 보고도 믿지 않는 사람들
보이지 않는 것 찾으면서

보이지 않는 손의 이로움을
자신의 능력으로 착각하네

과거를 부정하며 도덕을 앞세우며
사람이 먼저라네, 공공이 먼저라네

사익은 악이며 공익은 선이라며
사유재산 부정하는 공산(共産)을 선동하네

자신들의 생각대로 세상을 재단하며
자만이 만들어 낸 새로운 법 제정하네

내로남불 잣대로 적폐를 앞세우며
통용을 주장한 후 사익을 편취하네

긍휼 없는 도덕으로 꽹과리 소리 잃고
기쁨 잃는 통용으로 기분 나쁜 사람들

도덕 보다 중요한 건 긍휼이라네
통용 보다 중요한 건 사랑이라네

긍휼 없는 자만으로, 치명적 자만으로
역사가 퇴행하네, 미래가 불안하네

선한 의도로 출발한 사회주의는 우리 시대의 대표적인 지성인들이 그 운동을 주도했음에도 불구하고, 세계 인구의 다수를 차지하는 사람들의 생활수준과 삶 자체를 위협하고 있다. 사회주의 이론은 이성에 대한 절대적 믿음의 산물이다. 그러나 이성에 대한 맹목적인 신뢰는 치명적인 자만을 낳는다. ‘이성의 한계’를 인정하는 것이 진정한 이성이라면서 설계 없이 만들어진 질서가 인간이 의식적으로 고안한 질서보다 우월하다는 것을 사람들은 인정해야 한다고 하이에크는 저서 ‘치명적 자만’에서 밝히고 있다.

도덕은 ‘이성과 본성 사이’에 존재한다. 인간의 삶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도덕은 언어, 법률, 시장, 화폐와 같은 자생적 질서로서 진화의 산물이라는 그의 견해는 이성의 초월성을 주장해 온 서양 철학의 주류 전통에서 크게 벗어났지만 후학들에게 큰 울림이 됐다. 자본주의를 인간의 협동이 확장된 자생적 질서로 바라본 하이에크는 사회주의와 자유주의 중 무엇을 선택할 것인지의 문제는 가치의 문제가 아니라 참과 거짓을 따지는 진실의 문제라고 생각했다.

사회주의자들은 자신들의 이론을 정당화시키기 위해 곧잘 성경을 인용한다. ‘믿는 무리가 한마음과 한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제 재물이 조금이라도 제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행 4:32). 그러나 기독교의 핵심 사상은 소유와 상속에 있다. 성경은 사유재산의 소중함을 십계명에서 규정하고 있다.

‘도둑질하지 말라’,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라’가 바로 그것이다. 신명기에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어 차지하게 하시는 땅 곧 네 소유가 된 기업의 땅에서 조상의 정한 네 이웃의 경계표를 옮기지 말지니라’(19:14)라는 구절이 있다. 이 모두가 사유재산에 관한 하나님의 말씀이다. 사회주의자들의 이상향인 ‘네 것 내 것 없는 공동체’는 성화된 사람들의 공동체였다. 예수님이 부활한 후 마가의 다락방에서 성령을 기다리며 합심기도를 하던 120명의 제자들에게 오순절 성령이 강림했다. 초대교회의 신앙 공동체가 성령공동체이었기 때문에 통용이 가능했다는 사실을 그들은 간과하고 있다.

‘하던 지랄도 멍석을 펴 놓으면 하기 싫은 것’이 인간의 본성이다. 의무감에 따른 강요된 나눔은 나눌 때 기분(氣分)이 나쁘다. 자신의 기(氣)를 나누기[分] 싫기 때문에 기분이 나쁘다. 성령이 충만하면 기분 좋은 나눔이 된다. 자신의 기를 나누고 싶은 마음으로 나누기 때문이다. 자기 의(義)를 드러내고 싶은 욕심이 사라지고 사랑과 긍휼이 마음을 지배할 때, 또는 자신에게 이익이 되는 일을 할 때 인간은 기쁜 마음으로 행동을 하게 된다.

애덤 스미스는 저서 ‘국부론’에서 시장에는 공익 달성을 위해 자율적으로 사익을 조정해 주는 ‘보이지 않는 손’이 있다고 주장했다. 개인이 자신의 이익(사익)을 위해 시장에서 경쟁을 하다 보면 사람이 의도하거나 계획하지 않아도 사회구성원 모두에게 유익한 결과(공익)를 가져온다는 자유시장경제의 원리를 주장한 것이다. 진실은 경제활동에 대한 동력이 사익의 추구에서 나온다는 사실이다. 사익을 규제하면 시장경제가 위축되고 똑같이 못살게 된다.

저작권자 © 금강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