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2' 방송 화면 캡처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2' 방송 화면 캡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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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2' 방송 화면 캡처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 시즌2'(이하 '꼬꼬무2')에서는 '피의 일요일-아웅산 폭탄 테러'의 이야기를 공개했다. 8일 방송된 '꼬꼬무'의 열여덟 번째 이야기는 '피의 일요일, 아웅산 폭탄 테러' 편으로, 배우 박하선, 윤승아, 모델 주우재가 이야기 친구로 나섰다.

피의 일요일 사건은 1983년 10월 9일에 벌어졌다.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 이야기꾼들은 비디오테이프 하나를 꺼냈다. 그날의 이야기가 그대로 담겨있는 비디오테이프였다. 엄청난 폭발의 순간이 당시 순방에 동행한 이재은 기자의 카메라에 생생하게 담겼다. 하지만 이 영상은 수위가 너무 높아 방송 불가 지침을 받았고, 왜 당시 방송이 불가했는지 내용을 보고 직접 확인하기로 했다.

1983년 10월 9일, 이 당시는 전두환 전 대통령 해외 순방하던 때로, 버마라고 불리던 미얀마가 17박 18일 일정의 첫 방문국이었다. 미얀마의 수도 양곤의 한 호텔 로비에 한국의 부총리, 장관, 차관 등 대한민국 핵심각료들이 전부 모였었다. 이들은 전두환 대통령의 ‘서남아-대양주 6개국 순방’의 공식 수행원들이었다.

전두환 전 대통령은 영빈관에 머물며 행사 시작에 맞춰 도착할 예정이었다. 수행원이 먼저 우리나라의 현충원 같은 곳인 아웅산 묘소에 도착해 행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미얀마의 ‘독립 영웅’ 아웅산 장군이 묻혀있는 아웅산 묘소를 참배하는 것이 행사의 목적이었다.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2' 방송 화면 캡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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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 대통령의 도착이 임박했다는 이야기에 각료들은 도열을 하고 대통령을 맞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대통령 도착 직전, 폭발음이 터졌다. 흙먼지와 무너진 건물 더미, 피투성이 사람들 등이 뒤엉켰다. 피의 일요일라고 불리는 아웅산 폭탄 테러의 시작이었다. 세계 역사상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테러가 바로 이날 발생했다. 행사장에 참석했던 부총리를 비롯한 각 부처 장관들은 모두 사망했다. 폭발로 사망 17명, 부상 14명이 발생했다.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2' 방송 화면 캡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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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합참의장을 보좌했던 전인범 중위는 카메라 배터리를 가지러 간 덕에 화를 면했고, 뒤늦게 도착한 그는 또다시 폭발이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선뜻 발이 움직이지 않았지만 합참의장을 구하기 위해 현장으로 들어갔고, 그를 구조 급히 병원으로 이송했다. 이때 당시의 상황을 전중위는 "경호원들이 권총을 뽑아 들고 무전기에 대고 'A지점에서 폭파' 소리 지르더라. 그때부터 발이 움직이지 않더라. 누가 로켓을 쐈는지, 포탄을 쐈는지 알 수 없어서 '들어갈까 말까' 이런 생각이 들었다"라며 회상했다.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2' 방송 화면 캡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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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미얀마 병원의 시설은 극악이었다. 의료진들도 대부분 부재 상태라 당직자는 몰려드는 부상자에 패닉에 빠졌다. 누군가는 죽고 누군가는 숨이 넘어가기 직전의 아비규환, 전 중위는 능숙한 영어로 합참의장의 상황을 설명했고, 이에 합참의장은 겨우 목숨을 건졌다. 그러나 치료를 받지 못하고 방치된 이들이 더 많았다. 당시 병원에는 의료진도 약품이나 의료 기기도 턱없이 부족했다. 소독약이 모자라 물로 씻어내야 하는 상황이었다. 이에 대사관 직원들과 교민들이 집에 있던 구급약을 가져와 치료에 나섰고, 당시 미얀마 주재 한국 대사 부인은 병원에서 부상자를 돌보던 중 이미 사망한 남편을 만나는 안타까운 일도 있었다.

이에 전 중위는 "옆에 사람이 죽는 거 같은데, 함께 있는 친구가 도와달라고 하더라. 그런데 의장님의 상태를 알 수 없어 그럴 수가 없었다. 조금 있으니까 그분이 돌아가시더라. 지금까지도 그분께 죄송한데 어쩔 수 없었다"라며 죄책감의 눈물을 흘려 안타까움을 자아냈다.

아웅산 폭탄 테러 직전 외교사절들, 한국근현대사사전
아웅산 폭탄 테러 직전 외교사절들, 한국근현대사사전

당시 전두환 전 대통령은 "해외 순방을 중단하고 당장 서울로 돌아간다. 살아남은 자들은 모두 전용기로 대피시켜라"라는 명령을 했다. 특히 미얀마를 믿을 수 없다며 기내식, 물 등도 모두 반입 금지시키며 테러 발생 6시간 만에 급히 귀국했다.

끔찍한 테러가 보도된 후, 한 나라의 핵심각료들을 몰살시킨 테러범이 누구인지 전 국민의 관심이 쏟아졌다.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2' 방송 화면 캡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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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사 결과 현장에 설치된 폭탄은 모두 3개, 그중 대량 살상 고성능 폭탄인 클레이모어 폭탄이 터졌고, 증거 인멸용으로 설치된 소이탄은 불발된 것으로 확인됐다. 만약 소이탄까지 터졌다면 더 많은 사상자가 나왔을 상황이었다. 그리고 반경 1km 내에서 원격 조정을 통해 폭발을 시킨 것을 확인했다. 당시 군 쿠데타로 정권을 잡아 장기 집권 중이던 네윈 의장은 반정부 세력의 소행일 것이라 추측하며 전두환에게 반드시 범인을 잡아내겠다고 약속했다. 그때 미얀마는 현재의 미얀마와 똑같은 양상을 띄고 있었다. 군인들의 쿠데타로 시민들의 저항, 이를 정부는 무력으로 진압했고 이에 소수민족들은 반군을 결성해 무장 투쟁하는 것이 현재와 과거가 똑같았던 것이다. 이에 네윈은 반정부 세력이 이 같은 테러를 일으켰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추측은 목격자의 진술로 반전을 겪게 된다. 미얀마의 주민들이 사건 발생 후 수상한 광경을 목격했다고 증언한 것이다. 한밤중에 강에서 헤엄을 치거나, 어부에게 돈을 주며 배를 태워달라는 등의 부탁을 한 수상한 남자들을 목격했다고 주민들은 증언했다. 이들은 주민들의 신고에 의해 체포됐고, 체포 당시 가지고 있던 수류탄을 꺼내 미얀마 경찰과 군인을 위협했지만 수류탄으로 부상을 당한 것은 오히려 본인들이었다. 수상한 남자 3명 중 1명은 체포 이후 경찰과의 총격전에서 사망했고, 1명은 수류탄의 폭발로 한쪽 손목이 잘려나가고 한쪽 눈을 잃었으며, 또 다른 1명도 손목이 잘려나갔다.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2' 방송 화면 캡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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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테러 직후 검거된 테러범 용의자들은 3인조로, 검거과정에서 1명은 사살되고 2명은 생포됐다. 그리고 며칠 후 미얀마 경찰의 중간수사 결과 발표는 충격 그 자체였다. 범인이 한국인으로 밝혀진 것이다. 이에 미얀마 수사당국은 ‘한국의 자작극’을 의심하며 구체적 근거까지 제시한다. 또한 미얀마는 원래 순방 계획에 없었던 미얀마를 갑자기 추가한 것도 의심했다. 하지만 다른 내막이 숨어 있었다. 당시 전두환은 비동맹 국가와의 외교전에서 북한을 이기기 위해 한 나라라도 더 우리나라 편으로 만들고자 이번 해외 순방을 계획했던 것이었다. 한민족이지만 공존할 수 없었던 북한을 이기기 위해 계획했던 순방이 17명의 순국이라는 결과로 남게 됐다.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2' 방송 화면 캡처​​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2' 방송 화면 캡처​​

한국은 사건의 내막을 파악하는 것에 절실했기에 미얀마 수사당국을 설득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미얀마 수사당국을 겨우 설득해 얻어낸 면담 조건은 단 10분 동안 3미터 거리를 두고 질문하라는 것이었다. 현지에 파견된 한국 조사단은 어렵사리 범인을 면담하게 된다. 심문이 진행됐고, 테러범 중 1명이 자신은 영등포에 거주 중인 서울대 대학생 강민철이라 밝혔다. 하지만 그와 같은 나이의 강민철은 모두 한국에 존재하는 것으로 드러났다. 이에 점점 테러 사건은 미궁으로 빠지는 듯했으나 이때 갑자기 강민철이 자백을 하기 시작한다. 강민철 일당이 사용했던 수류탄은 공격용이 아닌 자폭용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테러범들은 이 사실을 몰랐다. 뒤늦게 자신들이 배신당했다는 생각을 하게 된 강민철이 자신의 출신을 밝힌 것이다.

강민철은 "내 이름은 강민철, 군번은 9970. 난 북한 육군 상위다"라고 말하며 그는 북한의 최정예 부대 인민무력부 정찰국 특공부대 소속으로 한 달 전 북한 원산항에서 배를 타고 미얀마로 출발해 나머지 2명과 배 안에서 처음 만났다고 밝혔다. 한국의 대학생이라고 주장하던 테러범들이 북한의 특수공작원들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지자 모두가 경악했다. 총격전으로 사망한 사람은 신기철, 그리고 수류탄으로 시력을 잃은 이는 끝까지 이름을 밝히지 않아 ‘진 모’라 불렀다. 이들은 전두환 사살 명령을 받고 이를 수행한 후 배를 타고 다시 북한으로 돌아갈 계획이었다고 진술했다.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2' 방송 화면 캡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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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과 남한의 서로에 대한 견제가 결국 17명을 사망케 하고 14명에게 부상을 입힌 것이다. 또한 김민철은 폭탄 테러에 대해 자세한 내막을 추가로 말했다. 외교 행낭 파우치를 통해 폭탄을 전달받아 설치하고 아웅산 묘소 참배일만 기다렸던 김민철 일당은 선팅이 짙게 된 벤츠 차량이 등장하자 차량에 탄 것이 전두환이라 확신했다. 그러나 그 차량은 전두환과 외양이 비슷했던 이계철 미얀마 주재 한국 대사관이었다. 이에 전두환이 도착한 것으로 착각한 김민철 일당은 전두환이 도착하기도 전에 폭탄을 터뜨렸던 것이다.

김민철 일당은 폭발 후 도주하기 위해 약속한 장소로 달려간 하지만 그 어디에도 배는 보이지 않았다. 북한 당국은 테러를 성공시킨 이들에게 스스로 자결하라는 메시지를 이렇게 표현한 것일까. 김민철의 자백을 바탕으로 북한을 추궁했지만 북한은 날조된 거짓이라 말하며 “이번 아웅산 테러 사건은 전두환의 각본에 따라 꾸며진 자작극이며 우리에게 테러는 절대 없다. 있을 수도 없다”라고 부정했다. 결국 사건의 배후를 잡진 못했지만, 사건 발생 2개월 만에 테러범들에게 사형이 선고됐다. 폭탄 테러를 일으킨 이들을 죽음의 형장으로 인도한 것이다.

아웅산 폭탄 테러 후 합동국민장,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아웅산 폭탄 테러 후 합동국민장,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하지만 이러한 결과에도 불구하고, 국민의 충격과 분노는 날이 갈수록 점점 심해졌다. 너무나도 많은 사람이 희생되고 다쳤기 때문이다. 이에 한국 군 수뇌부도 비밀리에 움직이며 김일성 사살 계획을 세웠다. 국민이 느끼는 분노와 좌절을 당연하게 인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사건의 배후를 없앨 계획을 세웠던 것이다. 하지만 이 계획은 전두환의 반대로 무산된다.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2' 방송 화면 캡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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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전두환은 김일성 사살 대신 새로운 보복 작전을 시행한다. 프로젝트 명 ‘늑대 사냥’이라는 불리는 이 작전은, 북한을 외교적으로 고립시켜 외로운 늑대로 만드는 것이었다. 세계 각국에 대통령 특사를 파견했고 이들은 "테러 국가와 외교를 끊어야 한다. 이 기회에 한민국과 수교를 하는 게 어떠냐"라고 주장했다. 이러한 외교의 결과로 북한을 고립시키는데 성공했다. 늑대 사냥 프로젝트로 60여 개의 나라가 북한과 교류를 중단하거나 축소할 것을 결정했고 특히 3개의 나라는 외교 단절을 감행했다.

교수형을 선고받은 세 명의 일당은 결말은 처참했다. 테러리스트 진 모는 얼마 후 교수형에 처했다. 그는 끝내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강민철은 자백 덕에 사형이 보류되어 미얀마의 가장 어두운 지옥으로 불리는 곳에서 수감 생활을 시작했다. 이때 강민철은 "나는 대체 누구인가. 나는 왜 이상한 나라에서 이렇게 이상한 존재로 살아가고 있는가. 나의 조국 북한은 왜 단 한 번도 내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가"라며 수감 생활 내내 괴로워했고, 결국 사건 발생 25년 후인 2008년 5월 감옥에서 숨을 거뒀다. 특히 그의 마지막 이름은 미얀마식 발음으로 김민추라 불렸는데, 자신의 이름마저 잃어버리고 타국에서 외롭게 생을 마감해야 했다.

이 모든 것을 정리해보면, 아웅산 폭탄 테러의 전말은 결국 대한민국과 북한의 외교적인 견제로 인해 벌어진 참사였다는 것이다. 한민족이지만 한민족 일수 없는 역설적인 이 관계가 수많은 이들의 목숨을 위협했다. 북한과 한국의 관계는 오늘날까지 똑같은 양상을 띄고 있다. 이들의 관계는 6.25 전쟁 이후부터 오늘날까지 벼랑 위에 서있는 것처럼 매우 불안정하고 언제라도 전쟁이 터져도 이상할 게 없는 상태이다.

Wikimedia Comm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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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이러한 극단적인 대치 상황에서, 견제와 긴장은 잠시 제쳐두고 서로의 이야기를 들으며 조금씩 가까워질 노력을 해야 할 것이다. 남한과 북한의 감정은 쉬이 해소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한민족이라는 피 안에 묶여 있는 이상, 이들이 결국 통일이라는 결말을 얻게 될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조심스레 해본다.

백소정 인턴기자 thelddl37@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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