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아동청소년문학작가

조재도 시인
조재도 시인

[금강일보] 답설(踏雪)
서산대사

눈을 밟으며 들판을 걸을 때는 (踏雪野中去 답설야중거)
걸음걸이를 어지럽게 하지 마라. (不須胡亂行 불수호란행)
오늘 내가 남겨놓은 이 발자취는 (今日我行跡 금일아행적)
뒷사람들의 이정표가 되리니. (遂作後人程 수작후인정)

이 시를 지은 서산대사(1520~1604)는 법명이 휴정(休靜)이고 호는 청허(淸虛)이다. 서산(西山)인 묘향산에 오래 머물렀다 해 서산대사라고 한다. 휴정은 40대 후반에서 60대 후반에 이르는 동안 묘향산을 중심으로 제자들을 지도했는데 그 수가 1000여 명을 넘었다고 한다. 그가 73세 되던 1592년에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이때 평안도 의주로 피난한 선조가 휴정을 팔도도총섭에 임명하자 휴정은 묘향산에서 나와 전국의 승려들에게 총궐기를 호소하는 격문을 방방곡곡에 보내 승군(僧軍)을 모집, 그의 제자 유정(惟情)과 함께 평양성을 공격해 탈환했다.

이 시는 백범 김구 선생이 평생 좌우명으로 삼았던 것으로 1948년 백범이 남북협상길에 오르면서 인용해 널리 알려졌다. 1948년 당시 김구는 ‘3천만 동포에게 읍고함’이라는 성명을 발표하면서 남과 북의 분단 정부수립에 대해 반대하는 입장을 분명히 했고, 분단이 결국에는 한반도에 전쟁을 가져올 것이라고 예견했다. 이때 당시의 심정을 김구는 ‘백범일지’에 다음과 같이 드러내고 있다. “나는 통일된 조국을 건설하려다가 삼팔선을 베고 쓰러질지언정 일신에 구차한 안일을 취하여 단독정부를 세우는데는 협력하지 아니하겠다.”

이런 상황에서 1948년 남한의 김구와 김규식은 북한의 김일성과 김두봉에게 편지를 보내 남북 정치요인 회담을 개최하자고 제안했다. 이에 대해 북한의 김일성과 김두봉이 승낙하면서 회담이 성사됐고, 김구는 김규식과 함께 38선을 넘어 평양으로 가 남북협상에 참여했다. 그들은 김일성 김두봉과 함께 분단 정부수립에 반대한다는 ‘4김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그러나 북한은 이들의 공동성명과는 달리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지 24일 후인 9월 9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권을 수립했다. 이로써 한반도는 남한과 북한이 독자적인 정부를 수립함으로써 분단체제의 확고한 틀을 갖추게 됐다.

내가 이 시를 처음 만난 것은 1980년 대 중반이었다. 정확한 시기는 기억나지 않으며, 시를 접한 것도 책이 아닌 노래를 통해서였다. 나는 그 당시 ‘민중교육’지 사건에 연루돼 학교에서 해임되고 대전에서 동료들과 교육운동에 전념하고 있었다. 민중교육지 사건이란 1985년 전두환 군사정권이 학교 교사들이 교육의 민주화를 요구하며 만든 책 민중교육을 좌경 용공으로 몰아 해당 교사들을 구속하고 해임시킨 사건이었다. 우린 학교에서 쫓겨난 후 대전에 사무실을 마련해 자주 모였는데, 그때 누군가가 가수 양희은의 노래 ‘상록수’에 위 소개시를 가사로 붙여 노래했다.

나는 곧장 이 시의 출처를 찾아보았고, 그것이 곧 서산대사의 시 ‘답설(踏雪)’임을 알았다. 나는 이 시를 읽고 그 의미의 평범함에 놀랐다. 의미 해석에 무엇 하나 덧붙일 게 없는 평범함, 그러나 실제로 행하기에는 지극히 어려운 그런 내용을 담고 있었다. 모든 진리의 말씀이 다 그렇지 않은가? 성경이나 불경의 말씀도 격언이나 속담에 나오는 말도 알고보면 겉으로는 다 쉬운 말들인데, 행하기는 평생에 걸쳐 노력해도 이루기 어려운 말들이 아닌가. “네 이웃을 공경하라.” 이 한마디만 해도 그렇지 아니한가?

눈 쌓인 밤길을 걸어갈 때 함부로 발자국을 흐트러트리지 마라. 네가 걷는 오늘의 이 발자국이 뒤에 오는 사람의 이정표가 될 테니까. 네 발자국을 보고 그 발자국 따라 뒷사람이 걸으니 비틀거리지 말고 똑바로 걸어라. 과연 평범한 말 속에 잠든 영혼을 후려치는 시가 아닌가.

나는 이 시를 ‘상록수’ 노래에 붙여 부를 때 몸에 소름이 돋았다. 과연 나는 그럴 자신이 있는가? 지금 내가 가는 길이 후대 사람들의 이정표가 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서였다.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 돌이켜보면 나는 결코 그러지 못했음을 느낀다. 나처럼 평범한 사람이 어찌 시에 나오는 선각자와 같은 삶을 살 수 있었겠는가? 다만 그래도 한 가지 위안을 받는 것은 비록 그렇게 ‘엄격하고 바르게’ 살지는 못했어도, 나름대로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려고 노력했다는 것이다.

이 시는 이후 여러 곤경에 처한 나의 삶을 비춰주는 등대 같은 역할을 해줬다. 어떤 일로 괴롭고 힘들어 샛길로 빠지고 싶은 유혹이 나를 휘감을 때, 나는 이 시를 떠올리며 고난의 시간을 견뎌냈다. 짧은 시 한 편이 내 인생을 허튼 길로 빠지지 않도록 이끌어 줬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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