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철호의 #길]  
대청호오백리길 5구간 
흥진마을 둘레길의 가을

 

"혹시 아세요? 가을이 왜 빨간 계절인지.”
H, 당신이 내게 희한한 질문을 했던 그곳에 와 있어요. 그때처럼 판암역에서 63번 버스로 갈아타고 신상동 바깥아감에서 내렸지요. 당신과 동행했던 대청호오백리길 5구간 흥진마을 억새길 한 바퀴 돌려고요. 봄에 벚꽃으로 화려했던 벚꽃한터 앞 데크길은 가을빛깔로 채색돼 있고요, 안쪽엔 대청호와 하늘이 그러데이션을 보여 주네요. 그 아래에선 억새들이 바람과 왈츠를 추고 있네요. 평화로운 이 길 속으로 들어갑니다.

잔잔한 호수와 가을 데칼코마니. 저 앞 백골산은 다음에.

‘하늘은 왜 이리도 푸른지, 미치도록 아름다운 올해 가을. 단풍 저리 붉게 우는 날 알게 되었어….’ 당신이 그때 불러줬던 노래 ‘가을이 빨간 이유’를 흥얼거리며 걷습니다. 오늘은 반대방향입니다. 신상교 쪽 5구간 출발점이 아닌 바깥아감 버스정류장에서 오리요리전문점 앞을 통해 흥진마을 둘레길을 갑니다. 한 바퀴 3㎞ 남짓 되지요.  

초입 억새밭에서 스마트폰을 연신 누릅니다. 당신과 다양한 포즈로 사진을 찍었던 곳이지요. 그날의 햇살과 바람을 기억하시는지. 환했던 당신 미소를 나는 기억합니다. 억새밭을 보며 걷다보면 단풍 빛이 비치는 호수가 기다리고 있어요. 대청호 데칼코마니는 언제 봐도 걸작이네요. 한가롭게 떠다니는 물새들도 한몫합니다. 혼자 놀러나온 하얀 새 한 마리는 잠수도 잘 하네요. 한참 안 보였다가 다른 데서 불쑥 올라오는군요. 

“여기는 온통 포토존이에요.” 우수수 낙엽 떨어지는 소리, 바람 소리 사이로 당신 목소리가 들립니다. 토끼봉 모퉁이 지나 벤치에 앉아 당신이 물었었죠, 가을이 빨간 이유를 아느냐고. “단풍 물드니까 빨갛죠.” 아주 1차원적인 대답에 당신은 낮은 목소리로 읊조렸죠. “가을은 이별의 계절이죠. 그래서 단풍은 저리 붉게 우는 것이고….” 

오늘은 혼자 벤치에 앉아 호수가 속삭이는 소리를 듣습니다. 호수 물이 많아졌어요. 봄엔 벤치 앞에 바닷가 같은 백사장이 있어서 왔다갔다 하며 사진도 찍고 그랬는데…. 가을이 수북이 쌓인 오솔길을 걷다보니 둘레길 절반쯤 지났군요. 벤치 두 개가 나란히 놓인 쉼터를 만납니다. 벤치에 앉으니 시선은 서쪽 호수 건너 추동과 주산동 방향을 가리키네요. 계족산성 성벽과 익숙한 나무들도 작게 보이고요. 당신과 계족산 같이 오르던 기억나네요. 컵라면과 김밥-사이다 맛도 잊지 못하죠. 참 좋았던 시절이었죠.

호수 건너 저 멀리 계족산성이 보이네요. 어디가 어딘지 얼추 아시겠죠?
호수 건너 저 멀리 계족산성이 보이네요. 어디가 어딘지 얼추 아시겠죠?
억새숲이 조금 아쉽지만, 그래도 좋아요.
억새숲이 조금 아쉽지만, 그래도 좋아요.

다시 모퉁이를 돌아서니 오픈 조망이 열리네요. 호수와 어우러진 억새의 가을동화 같은 풍광이 눈을 사로잡죠. 그때 당신과 같이 왔을 땐 호수 물이 많이 차지 않아 억새/갈대숲 사이로 들어가곤 했었는데 말이죠. 솔직히 오늘 억새길 풍경이 여전만 못해서 많이 아쉬워하는 중이죠. 그래도 나들이 나오신 분들 행복바이러스는 충만합니다. 웃음소리, 사진찍는 소리 넘쳐납니다. 

호반을 따라 웃자란 갈대와 억새들이 호위하는 길을 걸어가요. 햇살에 반짝이는 호수와 억새 물결이 걸음을 멈추게 하네요. 둘레길이 끝날 무렵 둘레길과 대청호오백리길을 알려주는 안내판이 서있네요. 5구간 백골산성길.... 보는데, 앗. 5구간 사진에 익숙한 분들의 뒷모습이 담겼어요. 벚꽃 만발했던 그해 봄 백골산성에서 찍은 사진이죠.

그날 이곳 5구간을 처음 왔었죠. 흥진마을의 낭만과 벚꽃으로 뒤덮인 동네와 백골산성에서 내려다본 대청호 모습을 잊을 수 없죠. 절골식당 진수성찬과 방축골 땅끝 풍경도 인상적이었지요.

어느덧 발걸음은 신상교 앞 5구간 시작점에 다다랐어요. 물이 많이 차서 4구간과 5구간을 잇는 둑방길은 완전 잠겼어요. 그래요, 당신과 함께 건너던 그 둑방길 말이에요. 그해 가을은 너무 가물고 물이 많이 빠져서 초원 같은 풍경이 펼쳐졌었지요. 그런 풍경에 당신은 탄성을 질렀고요. 물 그득그득한 대청호도 좋지만 가끔은 그해 가을 풍경이 떠오르기도 하지요.   

시내버스 타러 다시 벚꽃한터 앞 바깥아감 정류장으로 가는 길, 해가 벌써 떨어질 채비를 하고 있어요. 구름이 볕을 감추니 쌀쌀하기도 하고요. 혼자 걸어서 더 그런가 보네요. 버스시간이 조금 여유가 있어서 벚꽃한터 앞 산책로를 걸었어요. 벚나무 가을잎들이 그림처럼 깔려있어요. 당신과 함께였다면, 또 당신 특유의 감탄사를 터뜨렸겠지요. 어둑어둑해진 길을 걸어요, 당신이 좋아하는 그 노래 부르면서요.

스쳐가는 비바람에 낙엽들이
하나둘 떨어지듯이
오래 전 기억들이 잊혀지듯이
너를 잊을 수는 없을까
외로이 남아있는 야윈 새처럼
아직도 나는 헤매고 있잖니
이별의 아쉬움의 비를 맞으며
널 그리워 하는거야 ... .
(가을빛 추억, 신승훈)

단풍과 함께 온 찬바람이 문을 여닫고 있어요. '단풍이 산에서 내려와 사람 사는 마을 안쪽까지 온통 물들이는 이유는, 곧 겨울이 닥친다고, 비어 있는 연탄창고에 연탄을 채우고, 때 절은 이불 홑청은 빨아 하늘에 내다 널고, 아직도 사랑에 빠지지 않은 자들은 어서 뜨거운 사랑의 국물을 끓이라고 귀띔해 주기 위해서'(안도현, 단풍이 남하하는 이유)라지요. 부디 따뜻하고 외롭지 않은 계절 보내길 바라요. - From i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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