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덕 황씨 가문의 우리나라 최초 사회복지기관
이제는 수몰돼 사라졌지만 80년대 이축된 미륵원지

[금강일보 김미진 기자] 생각에 생각을 거듭합니다. 그마저도 이어가지 않는다면 숲속에서 길을 잃고 말겠지요. 실은 내가 어디로 가야하는지 생각을 복기할 수 있게 된 것도 그리 오래되지 않았습니다. 어쩌면 고작 하루 전일 수도 있고, 그러다 나도 모르는 새 나는 반백 살이 넘어 죽음을 바라보는 나이가 됐을지도 모릅니다. 그저 바람을 나침반 삼아 걷고 또 걷는 것, 기억의 실오라기를 하염없이 이어갑니다. 그것이 나 같은 사람이 살아있음을 체험하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어쩌면 점점 목적지가 다가오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심장 뛰는 소리가 저 멀리, 아스라이 들려오긴 합니다.

사람은 길을 통해 다니고 소식은 입을 통해 전파됩니다. 조상들이 거닐고 또 묵어온 미륵원이 수몰되고 또 이축된 지 어느덧 50년 가까이 돼 갑니다. 회덕 황씨 가문이 3대에 걸쳐 여행지를 위해 먹거리와 잘 곳을 마련해주었다는, 그런 미담이 전해져 오는 곳입니다. 어쩌면 내 발길은 그곳으로 향하는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세천고개에서 추동을 넘어, 그리고 또 추동에서 마산동까지 대청호반길을 걸으며 생각합니다. 나는 어쩌면, 이 세상에 남은 유일한 보부상입니다. 그저 나그네라기엔 자본주의 사회에서 목적이 있는 일을 하고 있으니까요. 저는 글을 쓰고, 또 이야기를 파는 사람이니까요. 그런 의미에서 대청호는 나의 가장 수완 좋은 보따리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홀로 걷는 이 길, 아무리 봄이라지만 호반길은 쌀쌀하지요. 이럴 때 생각나는 게 바로 미륵원입니다. 풋풋한 고향 인정이 절로 난다던 어느 노인의 이야기가요.

상상해봅시다.

삼성문이라는 현판이 걸린 대문을 들어서면 노부부가 마루에 앉아 밤을 고르고 있습니다. 인사를 건네도 대답없이 그저 알밤 까는 데 집중한 이 부부는 회덕 황씨의 재실, 고려 말 미륵원을 건립한 황윤보의 13대손 황경식 옹과 그의 아내입니다. 생면부지의 사람이 갑자기 집안으로 들어와도 익숙하게 칼을 건네며 밤을 까먹으라는 이들. 조상의 후한 인심이 그들에게까지 내려왔나 봅니다. 개인주의가 만연한 현대 삶 속에서 후덕한 인심을 읽을 수 있는 곳. 이들에게서 선대의 얼굴이 비쳐 보이는 것은 우연만은 아닐 것입니다.

그런 따뜻한 온기를 생각하니 왠지 마음이 부풀어오릅니다. 지금으로 따져보면 행려자들을 대상으로 구호활동을 펼치는, 우리나라 최초의 민간사회복지기관으로 생각할 수도 있겠습니다. 회덕 황씨의 가문에서 나고 자란 이들 중 벼슬에 오른 이들이 적잖으니 어쩌면 진정한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실천이라고도 할 수 있겠지요.

조선의 개국과 동시에 수많은 사찰이 소멸됐지요. 회덕 황씨들은 이러한 과도기에 미륵원을 만들고 개인적으로 운영해왔습니다. 길 가는 나그네들을 위한 곳이기 때문일까요. 미륵원은 정말 길가에 있었죠. 언젠가부터 그 집도 무너지고 또 대청댐의 건설로 길마저 물 속에 잠겨버렸지만 이렇게라도 옛 모습을 복원한 곳이 있다니, 참으로 행운이 아니겠습니까.

아직 길은 멀고 험합니다. 인간은 언제까지나 끝을 위한 걸음을 멈출 수 없고 중간 중간 쉬어가는 일밖에는 할 수 없겠지요. 그래서 황씨 가문의 남루가 가졌던 의미가 더 남다른지도 모릅니다. 그때도 지금도 말이죠. 현대사회는 더더욱 쉬어갈 곳이 없으니까요.

남에게 베풀기를 좋아하는 것은 어진 사람이나 장자가 하는 일이지요. 집을 지어 비바람을 가리게 하고, 누각을 지어 더위를 피하게 했으며 겨울에는 탕을 끓여 얼어붙은 창자를 기름지게 했고 여름에는 채소를 주어 음식이 입에 맞게 해줬던 그곳. 어쩌면 나의 목적지가 그곳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삼남에서 서울로 가려던 나그네들은 이곳을 거쳐 신탄진을 지나 금강을 건너 서울로 올라갔겠지요. 그러나 내가 걷고 있는 이 길은 이미 예전처럼 많은 이들이 지나다니는 길은 아니게 됐나 봅니다. 몇몇 차들을 제외하고는 떠도는 이가 나뿐입니다. 그렇지만 나는 걷습니다. 이제는 목적지가 언뜻 눈에 아른거리는 듯도 합니다.

이렇게 홀로 떠돌아다니는 지금의 상황을 불운이라 부를 수는 없겠습니다. 어쩌면 오래 전에 바랐던 미래가 마침내 당도할 그 시간을 기다리는 것이겠지요. 지금의 나는 내가 가장 슬플 때 꾸던 꿈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걷다보면, 어딘지 모를 그곳에 멈추게 되면 드디어 꿈에서 깨어나 현실을 바라보게 될 것입니다.

나는 아주 오래 살아남고 싶습니다. 여러모로 인생에 공을 들였고 남들의 이야기에 휘둘리는 것도 어쩌면 다 계산에 의한, 진심이 아닌 것에서 비롯한 것이었습니다. 언젠가는 이 삶을 바꿀 수 있으리란 기대를 하지 않을 수 없었던 나날이었습니다. 항상 어제가 오늘보다 나은 형편이었지요. 적어도 내 삶만은 그랬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홀로 길을 걷고, 이제는 세상에 없는 곳을 가려다 보니 타인이 없는 삶이 얼마나 안온한지요. 그래서 더욱 과거 많은 이들이 오갔던 미륵원의 모습을 쉽사리 상상할 수 없는 처지, 아니 사실 더욱 눈에 선연하게 보이는 지도 모르겠습니다. 감히 믿을 수 없지만, 나도 모르게 자꾸만 떠올리는 단꿈입니다. 나는 무얼 그리 아등바등했었던 걸까요.

드디어 멈춰 선 곳은 이제는 사라졌다 부활한 미륵원지 앞입니다. 부활이라는 말의 의미가 참 멀고도 새롭습니다.
상상 속의 황 옹 부부는 이제 세상을 떠났고 '남루'라는 음각이 새겨진, 창호지가 종종 뚫려있는 집 두 채뿐입니다. 군데 군데 자란 이름모를 풀꽃들은 '원(院)'에 자리한, 황씨 가문이 적선을 베풀고 있는 유일한 나그네입니다.

충청도 향풍의 근원이 된 이곳은 조선 초, 대전을 본관으로 하는 유일한 성씨인 그들에 의해 지어졌습니다. 우암 송시열 선생도 이들을 찬(撰)했었지요.
세 칸 규모의 살림집과 다섯칸 규모의 문간채가 전부인 곳이지만 얼마나 많은 이들이 이곳에서 지친 몸을 뉘였을지 모르겠습니다.

아름다운 풍광을 자랑하고 있는 미륵원지에는 황씨 가문의 묘소도 찾아볼 수 있었습니다. 역시 양지바른 곳에는 항상 묘비가 있지요. 남들에게 베풀며 살아왔던 이들, 이제는 아름다운 대청호반을 바라보며 드디어, 그간 메고 있었던 짐을 풀어내려 놓은 듯합니다.

가만히, 남루에 앉아 호반을 바라봅니다. 나는 때때로 한숨도 쉬었고 웃음을 터트리기도 했지만 대개는 무표정의 삶을 살아왔죠. 지금은 이 생에 대한 흥미 없음이 아니라, 편안함이 절로 묻어나오는 얼굴일 것 같습니다.

사랑에 관한 말은 늘 능동형 문장이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틀린 말이고 그른 것이 됩니다. 사랑해지는 건 결단코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미륵원은, 인기척이 없는 지금도 아직 사랑이라는 생동감이 넘치는 것만 같습니다. 무언가를 잃었다는 슬픔, 그리고 그것을 숨기려는 마음은 사람을 늙게 합니다. 그 슬픔은 언제나 내게 혼자가 되라고, 어른이 되라고 가르치지요. 그러나 이곳처럼 오래도록 사랑이 머무르는 곳은 나에게 새로운 영감을 줍니다. 여전히 달갑지 않은 삶이라고 할 수 있지만 이제 나는 잠시나마 사랑을 충전할 곳이 생긴 것 같습니다.

이제 나는 나란히 걷는 법을 배울 차례입니다. 밤으로 낮으로 이어지는 시간을 살면서 나는 걸음마조차 떼지 못 했음을 이제야 알게 됐습니다. 이제는 심장소리가 내 귓가에서 울립니다. 언젠가 이곳에서 묵었던 이들의 심장소리도 나를 스쳐지나가는 것만 같습니다. 역동적입니다. 설마 누군가의 품속 같이 말입니다.

종종 들를 곳이 생겼습니다. 살아갈, 사랑할 힘을 얻습니다.

어쩌면 나는 현재에 남은 유일한 보부상일지도 모릅니다. 비문을 팔고 또 그것으로 먹고 살았지만 이제는 혹 사랑을 나눌 수도 있겠습니다.

나는, 여전히 살아 있는 이곳에서 곧 사랑을 꿈꾸는 어쩌면, 보부상입니다.

글·사진=김미진 기자 kmj0044@gg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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