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남대 명예교수

한 번 나온 인생은 누구나 때가 되면 죽어 사라지는 것이지만, 한 평생 한을 품거나 남기고 가는 일은 없어야 할 것이다. 어떤 이들은 자신이 가진 어떤 처지 때문에 한많은 삶을 살고, 어떤 이들은 한많은 삶을 사는 사람들 곁에 있어서 또 한많은 삶을 살고 가기도 한다. 그러한 삶의 바닥이나 뒷면에는 사연들이 많고 많아 그것들을 하나하나 다 늘어놓을 수 없는 것이지만, 몇 가지 알려지고 추리하여 생각할 수 있는 것들을 떠올리는 것으로도 가슴이 먹먹하게 슬프다. 그 한많은 삶은 또 한을 풀지 못한 채 뒤에 남기고 한많은 마감을 하는 수가 참 많다. 그렇게 맘을 먹어서가 아니라 아주 우연히, 바깥에서 작동하는 어떤 사정 때문에 그렇게 되는 수도 참 많다. 그러한 마감은 큰 슬픔과 안타까움이 오래도록 많은 사람들 가슴 속에 응어리로 남게 한다. 대통령을 했던 이, 시장을 했던 이, 노동현장에서 기계와 함께하던 이, 위급한 상황에서 생명을 구조하던 이, 꽃같은 나이에 희망과 기쁨에 가득찬 가슴을 안고 수학여행을 떠나던 이, 기쁜 축제에 달뜬 기분으로 참여하던 이들이 전혀 예상하지 못하던 일로 생을 마감할 때 풀어지지 않는 한을 남긴다. 그러나 몸이 불편하다는 이유로, 피부색이 그곳에 많이 사는 사람들과 좀 다르다는 이유로, 그가 태어난 지역이 다른 곳이라고,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핏줄이라는 것이 어떠하다는 이유로, 그가 깊게 가진 믿음체계가 어떠하다는 것 때문에 극단의 차별을 받으면서 한스럽게 사는 이들도 참 많다. 그가 그렇게 선택하여 태어난 것도 아닌데, 그것이 마치 어마어마한 범죄를 저지른 것 이상으로 혐오의 대상이 되어 있는 것도 많다. 참 슬픈 일이다.

며칠 전 세상을 떠난 임보라 목사의 별세 소식도 그런 느낌을 가지게 한다. 그는 차별하는 것 없이 모두가 다 평등하고 자유롭게,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생각하고 손을 마주 잡는 사회를 아주 치열하게 꿈꾸고 실천하던 이라고 알려져 있다. 나는 그를 직접 만나고 그가 추진하는 일에 참여한 적은 없다. 그러나 그가 하는 일이 알려지고 보도될 때마다 맘으로 적극 지지하고 찬성하며 밀어주었었다.

장애, 나이, 성별, 인종, 출신신분, 성적지향, 성정체성에 관계없이 자유롭고 평등하게 살 수 있는 사회를 만들자는 법이 제안되고 제기된 지 15년이 넘는 지금까지도 제정되지 않은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사람은 어떻게 나오고 생겼든 있는 그대로 똑같이 존귀한 존재라고 여겨 차별하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하고 그렇게 살고자 하는 이들이 또 차별을 받거나 강력한 저항에 부딪치는 것도 놀라운 일이다. 우리 사회에서 오래도록 바랐던 차별없는 사회를 만들기 위한 ‘차별금지법’ 제정에 그는 매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특히 여러 분야에서 밖으로 드러내는 것이 금기사항으로 여겨졌던 성소수자의 인권문제를 그는 자기의 핵심활동으로 삼았다. 그래서 성소수자들의 삶을 제대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신학을 소개하기도 하고, 성소수자 축제에 가서 그들을 축복하고, 성정체성 문제로 고통을 당하는 사람들을 위로하고 격려하며 힘을 북돋아주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그는 무서운 공격을 받는다. 기독교계의 일부 교단이나 교회에서 그를 정죄하고 그가 주장하는 신학이나 활동을 이단이거나 이단성이 있다고 규정하기도 하였다. 우리가 다 알듯이 ‘이단’이라는 규정은 오래 전에는 인간으로서 살 수 있는 정당성이나 신앙인으로 살 수 있는 길을 박탈하는 것이었다. 그는 그런 선언을 공개해서 해대는 교회들이나 지도자들의 무서운 혐오를 받았다. 엄밀히 따지면 믿음에 이단은 없다. 믿음은 규격화할 수 없는 것이며, 기준을 설정하고 그것으로 판단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누구든 그가 깊은 진정성을 가지고 궁극존재와 직접 교류하는 삶을 살 자유와 정서가 있다. 무슨 길을 찾아서 그 일을 하는 것도 자유다. 그런데 그것을 이단이라는 표찰을 붙여 정죄하는 것은 이해할 수 없다.

더욱이나 태어나면서부터 죄인인 사람은 없다. 물론 사회에 따라서 태어난 과정과 생김이 어떠하냐에 따라서 차별을 받는 일이 있고, 그런 시대도 있었다. 그러나 그러한 차별은 현대사회에 와서는 오히려 죄악이란 것이 일반화된 생각이다. 반복되는 말이지만, 그러니까 장애를 가지고 태어났다거나, 사회신분이 낮다고 인정되는 태생이라거나, 종교가 다르다거나, 성적지향이나 성정체성이 어떠하다는 것이 곧 혐오의 대상이 될 죄악은 아니란 말이다. 그러한 차별을 없애자는 운동을 벌이고, 차별없는 사회를 만들려고 노력하고, 그런 차별을 받으면서 힘들게 사는 사람들을 위로하고 격려하던 삶을 자기의 삶으로 선택하였기에 일부 사람들에게 혐오를 받던 임보라 목사가 급하게 세상을 떠난 것을 계기로 다시 한 번 생각해 본다. 언제까지 우리는 차별을 정당화하는 삶을 살아야 차별없는 사회로 갈 수 있는 것일까? 어떻게 태어나든 생명은 그 자체로서 존귀한 것이다. 성소수자로 태어난 것이 죄악이 아니며, 혐오의 대상이 될 수도 없다. 그러한 것들을 죄라고 규정하고 더럽다고 멀리하며 사람들을 아프게 하는 것은 무엇과 바꿀 수 없는 잘못이라고 본다. 혹시 그런 생각을 하는 이들은 속맘이 열리고 생각이 트여서 너그럽고 폭넓은 삶을 사는 길로 접어들길 바란다. 여기에서 할 말인지는 모르지만, 치열한 삶을 살고 가신 임보라 목사가 아름다운 곳에서 기쁘게 살기를 바라고, 그를 의지하고 그에게 기대했던 차별받는 사람들의 슬픈 맘에 위로가 되고, 한 발짝 차별없는 사회로 다가가는 길이 열리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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