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재피해 보상에 인력 감원 문제까지
가해자-피해자 프레임 감정대립 키워
지자체 조정 한계…대타협 기구 필요
객관성 담보된 공간서 상생법 찾아야

▲ 한국타이어 화재 사고 이후 공장 인근에 피해보상과 공장 이전 등을 요구하는 현수막들이 게시되고 있다. 이기준 기자

<속보>=한국타이어 대전공장 화재 사고 여파가 지역 경제 전반으로 확산하는 양상이다. 화재에 따른 직·간접적인 피해보상 문제가 첨예하게 대두된 상황에서 노동자 실직 문제가 겹치면서다. 노동자 감원은 공장 재건 계획이 현재로선 없다는 의미로 해석되는 만큼 공장 인근 골목상권뿐만 아니라 대전지역 전체 고용환경에도 악영향을 미칠 공산이 크다는 점에서 우려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공장 화재의 후폭풍은 더욱 거세지고 있지만 문제 해결 방안 모색은 지지부진하다. 대전시와 대덕구 등 지자체의 중재 혹은 조정이 절실하지만 개입할 여지가 현재로선 마땅치 않다. 갈등 중재를 위한 제3의 사회적 기구(거버넌스)가 시급히 구성돼야 한다는 목소리에 힘이 실리는 이유다. <본보 21일자 1면 보도>

◆미운 오리 새끼

한국타이어는 1979년 대전공장 설립 이후 지역 수출과 지역산업 생태계 활성화를 견인해 왔다. 대전공장 고용인력은 협력업체 소속 노동자를 포함해 3000명에 이른다. 그러나 2000년대 들어 인근 지역에서 급격한 도시개발이 이뤄지면서 한국타이어는 ‘민원의 온상’으로 낙인찍혔다. 공장 바로 옆에 대규모 아파트단지가 들어서면서 악취 등 생활민원이 급증한 거다. 한국타이어는 환경 관련 민원은 산단 전체의 문제인데 한국타이어만 타깃이 된 상황에 억울함을 호소하면서도 시대 흐름을 쫓아 매연 저감 등 공장 내 환경설비를 대폭 확충하고 지역사회 공헌에도 노력을 기울이는 등 지역사회와의 상생에 힘을 쏟았다. 그럼에도 ‘공장 이전밖엔 답이 없다’는 아파트 주민들의 불만은 식을 줄 모른다.

설상가상 한국타이어 대전공장은 2014년 대형 화재 사고로 한 차례 곤욕을 치렀고 이번에 또다시 대형 화재 사고가 발생해 난처한 입장에 처했다. 한국타이어는 공청회와 대표자 연석회의 등 기회가 마련될 때마다 머리를 숙이고 분진 처리 등 화재 사고 관련 민원이 접수될 때마나 적극적으로 대응하고 있지만 민원의 수위는 더욱 높아졌다. 피해보상과 관련해 ‘한타 화재로 집값이 떨어졌으니 인근 아파트 전 세대에 일괄적으로 1억 원을 지급하라’는 요구와 함께 ‘당장 공장을 이전시켜야 한다’는 목소리도 더욱 커지고 있다.

한국타이어 대전공장 주변은 이와 같은 요구가 담긴 현수막으로 도배가 됐다. 더욱 곤혹스러운 건 지자체가 앞장서 공장 이전 목소리에 힘을 싣고 있다는 점이다. 지자체는 그간 기업의 사회적 역할과 지역사회 기여 등을 이유로 ‘공장 이전’만큼은 신중한 입장을 보여왔는데 이번엔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졌다. 지자체장의 입에서 ‘공장 이전’이 공식적으로 거론될 정도로 한국타이어는 지역경제의 견인차에서 미운 오리 새끼로 전락했다.

◆어두운 터널 고통의 시간

피해보상도 난제지만 지역 산업 기반의 한 축이 무너졌다는 점에서 실질적 위기는 지금부터라는 우려가 나온다. 지금껏 한국타이어에 의지해 살아온 노동자들이 속속 일자리를 잃고 생계의 위협에 시달리게 됐기 때문이다. 화재로 제2공장이 전소돼 자체 생산시설을 잃은 한국타이어 협력업체 2곳은 폐업했고 이로 인해 120여 명이 졸지에 실업자 신세가 됐다. 또 2공장 관련 협력업체 5곳 역시 일터가 사라지고 2공장 재건 가능성도 희박해지면서 직원 정리에 나섰다.

현재 140여 명이 사측의 권고사직에 서명하고 직장을 떠났다. 협력업체 직원만 260여 명이 실직했고 권고사직 요구는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한국타이어 소속 직원들도 고통의 시간을 보내고 있다. 지난 20일 대전공장에 전환배치와 명예퇴직 관련 공고가 붙었다. 정규직 생산기능직 사원 800여 명 중 550여 명을 금산공장과 해외 공장으로 파견근로토록 한다는 게 골자다. 결과적으로 250여 명은 실직을 피하기 어려운 셈이다. 협력업체 직원을 포함해 최소 500명 이상이 이번 화재 사고의 직접적인 희생양이 된 거다. 기업 입장에선 화재 사고 수습과 함께 생산을 정상화해야 하는 만큼 일정 부분 구조조정은 불가피하다는 입장이지만 선택 받지 못한 직원들은 기나긴 어둠의 터널을 걸어야 하는 처지에 놓였다.

금속노조는 “협력업체들은 정리해고를 감행했고 한국타이어는 원청 소속 노동자를 상대로 자의적 전환배치를 단행했다”며 “한국타이어가 화재 사고를 반성하고 지역민으로부터 신뢰받는 건강한 지역 기업으로 거듭나기 위해선 이번 정리해고를 즉각 철회하고 협력업체를 포함한 모든 한국타이어 노동자의 총고용 보장을 선언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들은 이어 “정리해고 통지서를 받은 노동자들은 극도의 불안을 해소하고 있다. ‘해고는 살인’이다”라며 고용보장을 촉구했다.

◆냉철한 판단이 필요한 시점

이번 화재 사고에 대한 수습은 ‘피해보상’에만 집중돼 이해당사자 간 감정적 대립의 골만 키웠다는 지적이 나온다. 한국타이어 공장 정상화, 고용유지와 관련해선 손을 놓고 있었다는 거다. 이와 관련해선 무엇보다 사고 수습을 위한 중재자·조정자 역할을 해야 할 지자체가 제 역할을 못했다는 점에서 아쉬움이 남는다.

가장 직접적인 행정관청인 대덕구는 주민 피해보상과 관련해선 공론의 장을 마련하는 데 적극적이었지만 한타의 고용유지와 관련해선 무기력한 모습을 보였다. 애당초 ‘기업의 고용은 기업의 책임’이라는 인식의 한계에서 벗어나지 못한 탓이다. 물론 법적·행정적으로 민간기업의 고용 문제에 대해 지자체가 행사할 수 있는 권한이 없기도 하지만 대량 실직 사태가 발생할 경우 그 뒷감당은 지자체의 몫으로 돌아오는 만큼 ‘고용 유지’를 요구하고 답변을 기다리는 수준을 넘어 더 적극적인 중재 노력을 했어야 했다는 지적에도 공감대가 형성되고 있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구 갈등관리심의위원회 역할 범위에 대한 조정 필요성도 제기된다. 대덕구 갈등 예방과 해결에 관한 조례에 따라 구는 갈등관리심의위원회를 운영하는데 그 역할이 ‘공공갈등’의 영역에 한정돼 있다. 구 주요정책(자치법규의 제정·개정, 각종 사업계획의 수립·추진 포함)을 수립하거나 추진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이해관계의 충돌 사안에 대해서만 기능을 한다는 거다. 이번 한국타이어 인력 구조조정은 규모 자체가 크다는 점에서 지역경제에 미치는 파장이 클 수밖에 없어 사회적 갈등의 씨앗이 될 수 있지만 민간의 영역이라는 점에서 위원회가 어떠한 조치도 취할 수 없는 한계를 안고 있다.

물론 지자체가 민간의 영역까지 컨트롤할 수 있는 제도적 기반을 마련한다는 것 자체가 무리일 수 있지만 사회적 파장이 큰 사안일 경우 갈등 조정자로서 위원회가 기능을 할 수 있도록 하는 방안을 모색해볼 필요가 있다는 의견에도 힘이 실리고 있다. 지자체가 앞장서 갈등을 키우는 모양새를 지양하고 객관적 해법 모색을 위한 중재 공간을 마련해야 한다는 거다.

최병학 한국갈등관리연구원 원장은 “모든 갈등 조정에 있어 가장 경계해야 할 것 중 하나가 바로 감정적 대립이다. 이번 한국타이어 사안의 경우 한국타이어는 가해자, 주민과 직원 등은 피해자라는 대립 구도에서 많은 요구들이 쏟아져 나오니 중재와 조정의 여지가 없어 보인다”며 “한국타이어 역시 화재 사고의 피해자라는 인식이 전제로 깔려 있지 않다면 결국 문제 해결 방안은 소송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법적 결정이 가장 깔끔한 정리를 담보하지만 소송만이 능사는 아니다”라고 말했다.

최 원장은 이어 “구청장의 피해보상 요구 1인 시위 역시 이런 관점에서 적절했는지는 의문이다. 합리적인 사고 수습 방안 마련에 있어 부정적 결과를 초래할 수 있기 때문”이라며 “이런 경우 전문가 집단을 중심으로 한 사회적 합의기구를 통해 문제를 객관화함으로써 해결점에 접근하는 방식도 한 방법인데 아직 우리 사회에선 익숙지 않다”고 덧붙였다.

헤어질 결심 전에 한타 화재 사고 이후 도출된 사회적 갈등 요인들을 추리고 객관적인 관점에서 가장 합리적인 문제해결 방안 또는 대안을 모색해야 한다는 거다.

이기준 기자 lkj@ggilbo.com

저작권자 © 금강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