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령골부터 현충원까지, 기억해야 할 역사의 그림자

어떤 공간 안에서 일어난 슬픔이라는 건 그곳에 가야만 생생히 느낄 수 있다. 그렇게 찾아온 사람들을 통해 슬픔은 공유되고 또 외부로 전파돼 똑같은 경험을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다짐을 하게 하곤 한다. 다크 투어리즘(Dark Tourism), 우리말로 역사교훈여행의 매력이 여기에 숨어있다. 다크 투어리즘은 비극에 대해 사회가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를 기억으로 남기는 과정이다. 대전에도 아픈 역사의 흔적은 도시 곳곳에 남아있다. 그곳에는 환상적인 축제나 편안한 휴식은 없다. 그러나 비극적인 사건을 반복하지 않겠다는 반성과 교훈은 있다. 기억하지 않는 역사는 잊히고, 지워지고, 결국 되풀이되기 마련이다. 금강일보가 창간 13주년을 맞아 아픔과 상처가 깃든 대전의 역사 현장을 직접 찾아 걸어봤다.

 

    세상에서 가장 긴 무덤   
‘죽음의 골짜기’ 동구 산내 골령골

 이른 아침 대전 서구 월평동에서 108번 시내버스에 몸을 실었다. 흐린 하늘에 행여 비가 올까 노심초사하면서 한편으론 다크 투어리즘에 나서기 딱 좋은 날씨라고 위안 삼아 1시간여를 달려 대전산내초등학교 앞에 닿았다. 첫 번째 현장으로 가는 길은 꽤 험하다. 산내초 뒤편으로 난 길을 걷고 또 걸으면 그나마 있던 인도마저 곧 사라진다. 차도 옆 잡초로 뒤덮인 폭 20㎝ 정도의 좁디좁은 공간만이 그곳으로 향하는 유일한 길이다.

그렇게 10분쯤 걷다 보면 들어보긴 했어도 가본 이는 별로 없다는 세상에서 가장 긴 무덤, 대전 동구 산내동 골령골이 눈앞에 펼쳐진다. 한국전쟁 초기인 1950년 6월 28일부터 7월 17일까지 충남지구 방첩대(CIC)·제2사단 헌병대·대전지역 경찰 등은 좌익으로 몰린 민간인, 대전형무소 재소자, 제주 4·3사건 관련자를 법적 절차도 거치지 않은 채 이곳에서 집단 학살해 암매장했다. 이들이 묻힌 구덩이 8곳을 연결하면 길이만 1㎞, 최소 1800명에서 최대 7000명이 그렇게 억울한 죽음을 맞았으니 뼈와 영혼이 산처럼 쌓여 세상에서 가장 긴 무덤이 된 골령골의 ‘골령(骨領)’은 결국 죽음으로 죽음을 덮으면서 나온 게 아닐까.

1950년 6월 28일 ~ 7월 17일
민간인과 대전형무소 재소자 등
최소 1800명, 많게는 7000여명이
군인과 경찰에게 좌익으로 몰려
법적절차도 없이 집단처형돼 묻혀

영혼을 위로하는 만장이 나부끼는 나무 뒤 허허벌판 위에 홀로 선 작은 집 한 채의 벽면엔 골령골의 진실이 세상에 드러나게 된 경과를 설명하는 현수막이 붙어 해설사 역할을 대신하고 있다. 비극의 현장을 포착한 사진도 여럿이다. 순간 한 사진이 도통 시야에서 벗어나질 않는다. 카메라를 응시한 사내가 웃는 것인지, 공포에 몸서리를 치는지 도통 알 수 없는 표정을 한 채 바닥에 엎드려 있다. 소년이다. 그날 골령골에서 억울하게 죽어간 이들에게 노소(老小)는 없었다.

2007년 골령골에서 첫 유해발굴이 시작된 이래 지금까지 1441구 유해와 3177점의 유품이 그 긴 무덤 아래 잠자고 있었다. 현재 유해와 유품은 세종시 추모의 집에 임시 안치 중이다. 다행스럽게도 골령골은 새 단장을 준비 중이란다. 내년 이곳에 산내평화공원(진실과 화해의 숲)이 들어서게 되면서다. 하지만 과거를 딛고 평화로 가는 길에 중요한 한 가지는 빠졌다. 국가는 억울한 죽음에 대한 진상규명 대신 학살의 책임을 외면하고 있고, 군과 경찰도 사과하지 않는다. 내일을 향하면서 반성은 없는 모순이 그것이다. 골령골의 영혼들을 뒤로하며 걷는 기분이 영 시원찮았던 이유다.

 

  문화공간 된 식민수탈 기관  
‘동척 대전지점’ 동구 인동 헤레디움

골령골에서 돌아와 다시 산내초 앞에서 이번엔 511번 버스에 올랐다. 버스는 이제 대전의 원도심으로 향한다. 대전 동구 인동이 원도심의 출발이다. 인동은 대전의 초기 도시형성기 중심지였다. 인동은 조선인들이 모인 상권이었고 그 옆 원동은 일본인들의 상권과 이를 보호하기 위한 공공기관들이 밀집해있었다. 이런저런 역사를 곱씹으며 한참을 내달린 끝에 원동네거리에 내려 또 걷기 시작했다. 고작 5분 정도 걸었을 뿐인데 힘들다는 내색이 스멀스멀 피어오를 때쯤 지붕 한가운데 장식용 페디먼트가 인상적인 건물이 보인다. 101년 전 인동과 원동 경계선상에 세워진 옛 동양척식주식회사 대전지점이다. 식민지배 수탈 기관으로 악명을 떨친 동척은 국가 소유 땅이나 황무지, 무연고 땅을 몰수하는 일에 앞장섰다. 1930년대까진 산미증식계획을 대행했고 패망 직전에 가서는 직접 농장 경영에도 나서며 가혹한 소작료를 징수하면서 조선 백성들을 알거지 신세로 만들었다. 의열단원 나석주 의사가 동척 경성지점에 폭탄을 던졌을 정도이니 대전 사람들의 심정은 오죽했을까.

조선의 토지와 자원을 수탈하고
경제권 이득 착취를 위해 세워진
옛 동양척식주식회사 대전지점
아픈 역사와 함께한 100년 건축물
이제는 문화예술공간으로 탈바꿈

동척 대전지점은 지난해 CNCITY에너지 문화재단인 CNCITY마음에너지재단이 문화예술공간으로 리모델링해 ‘헤레디움’으로 탈바꿈했다. 왠지 모를 뿌듯함 안고 찾았건만 헤레디움은 장장 밖에서 30분을 기다린 끝에야 입장을 허용했다. 여행의 묘미라는 게 계획대로 되지 않아서라더니 이날 초대받은 이들을 대상으로 오전에 연주회가 있었던 탓이다. ‘아픈 역사가 깃든 장소에서 음악을 감상한다는 건 어떤 기분일까’ 싶으면서 ‘내 갈 길 바쁜데 왜 하필 지금이냐’며 마음속 두 감정이 옥신각신하며 요동친다.

헤레디움에선 동척 대전지점이 지닌 역사성과 장소성을 보여주는 아카이브 전시 ‘인동 100년: 역사가 되다’가 한창이다. 애플리케이션에 접속, 관람 신청을 마친 후 인증을 하면 헤레디움 1층 기차역을 테마로 마련한 전시실 겸 아트홀이 들어온다. 일제강점기 3·1운동 시기 인동시장 만세운동의 기록이 펼쳐진 1층의 전시, 동척 대전지점 역사와 복원 과정을 그린 2층의 전시는 그 자체가 대전 100년의 이야기다. 그러던 중 문득 그런 생각이 든다. 사진과 기록 속 그날을 스스로에게 덧대보는 일이 다크 투어리즘을 흥미롭게 하는 요소지만 근대건축물 활용을 놓고 끝 모를 담론만 난무한 채 실천이 없었던 대전에서 헤레디움 탄생을 곱씹어보는 것도 퍽 의미 있겠다 싶다. 미래 세대가 아픈 과거를 기억하고 더 나은 역사를 만들 수 있도록 공공이 아닌 민간에서 근대건축물을 복원해 시민 품으로 돌려주었으니 말이다.

 

  친일갑부 땅 위에서 태동한 심장  
중구 선화동 ‘옛 충남도청사’

일제강점기 일본 제국주의자들은 대전의 도시 계획 과정에서 효율성을 무척 따졌다. 대전역을 중심으로 옛 충남도청사까지 바둑판처럼 펼쳐진 도심 곳곳에 남은 흔적이 이를 보여준다. 옛 조흥은행 대전지점, 조선총독부·동척과 함께 3대 식민수탈기구 중 하나인 조선식산은행이던 옛 산업은행 대전지점, 1938년 건립돼 해방 이후까지 사용된 옛 대전부청사가 곳곳에 포진해 있는 점이 그렇다. 그중에서도 핵심은 11년 전 충남 홍성 내포로 옮겨간 후 지금은 대전근현대사전시관이 된 옛 충남도청사다.

1932년 공주갑부 김갑순이
일본에 부지를 헌납해 만들어져
공주 → 대전으로 도청 옮겨와
80년 지난 2012년 내포 이전후
대전근현대사전시관으로 활용중

1932년 지어진 이 건물의 내력은 친일 대지주이자 우리나라 부동산 투기의 시조 격인 ‘공주갑부’ 김갑순을 빼놓고 얘기하면 섭섭하다. 관노(官奴) 출신으로 인생역전에 성공해 돈으로 벼슬 사고, 벼슬로 돈을 긁어모은 그가 1930년대 말 대전에 소유한 땅만 22만 평. 당대 대전 전체 토지가 57만 8000평 정도였으니 약 40%가 김갑순의 땅이었던 셈이다. 탁월한 축재술, 정략적인 인맥으로 대전 인근 땅을 모조리 사들인 김갑순이 남은 한 조각을 일제에 헌납하는데 1932년 공주에서 대전으로 옮겨 온 충남도청사 역사의 시작이다.

그로부터 80년이 지난 2012년 충남도청이 내포로 떠난 후 이 공간은 대전근현대사전시관으로 변신했다. 근대도시의 탄생부터 독립운동과 한국전쟁, 3·8민주의거 등 민주화와 경제성장 과정을 압축적이면서 디테일하게 전시한 상설전시관을 찬찬히 둘러보면 대전의 역사 또한 치열했고 다채로웠으며, 대전도 한국 근·현대사의 굵직한 흐름을 함께 해왔다는 자부심이 끓어오른다. 누군가는 촌(村)이라 치부하는 충북 충주 땅에서 대전으로 유학 온 14년 차 한 시민이 느낀 소회다. 무엇보다 레트로(Retro)의 상징인 옛 충남도청사는 젊은 세대들에게도 낯설지만 낯설지 않은 게 이색적이다. 밝은 갈색의 스크래치 타일, 요철 모양으로 파내 장식한 벽면이 그런 감성을 던져준다고 할까. 특히 요즘은 옛 충남도청사 고유의 갈색 건물과 아치형 구조 내부에서 사진을 찍는 게 유행이란다. 그게 뉴트로(New+Retro)라나 뭐라나.

 

단 하루의 대장정의 끝이 보인다. 헤레디움까지의 여정을 함께한 511번 버스와 다시 만나 몸을 싣고 대전 중구 중촌동을 지나던 중 헐레벌떡 내렸다. 갑자기 떠오른 옛 대전형무소 터를 그냥 지나칠 수 없어서다. 옛 대전형무소는 안창호·여운형·김창숙 등 애국지사들이, 광복을 맞은 후에는 이념 갈등 속 평범한 민초들이 비극의 역사를 온몸으로 겪은 현장이다. 서울 서대문형무소와 함께 한국 근·현대사의 빼놓을 수 없는 공간이지만 우리는 옛 대전형무소를 얼마나 알고 있을까.

일제강점기 애국지사들 수감되고
한국전쟁 당시 이념 갈등으로
민간인 170여명 수장한 우물과
재소자들 감시하던 망루만 남아
묵묵히 비극의 역사현장 지켜와

홀로 남은 망루, 한국전쟁 당시 170여 명의 민간인들이 수장된 우물, 대전형무소의 슬픈 기억을 마주하게 하는 스토리 월과 영령탑이 자리를 지키고 있지만 과연 역사의 현장인지, 그저 동네에 하나쯤 있는 휴식공원인지 구분이 안 되는 것만 같은 기분이 썩 유쾌하지 않게 다가온다.

 

  이 땅의 희망, 기억의 등불  
유성구 갑동 ‘국립대전현충원’

아쉬움을 뒤로하고 마지막 목적지인 대전 유성구 갑동에 자리한 현충원으로 향하는 107번 버스에 올랐다. 현충원을 다크 투어리즘의 종착지로 택한 건 해방과 분단의 역사를 정면으로 마주하기 위해서다. 사실 버스에서 내려 대전현충원 입구에 섰을 땐 두렵기만 하다. 이 넓디넓은 곳에서 대체 누굴 찾으리오. 그래서 좁히고 좁혀 현충원에 묻혀선 곤란한 사람, 김창룡의 묘소를 찾았다. 1998년 현충원에 이장된 김창룡의 묘비엔 1945년 해방 이전 기록은 단 한 줄도 없다. 일본 관동군 헌병 보조원 등으로 대표되는 친일 경력은 묘비에 적지 않은 것으로 추정할 뿐이다. 그렇게 멀지 않은 곳엔 김창룡 그 자신이 안두희를 사주해 죽음으로 몰고 간 백범 김구의 어머니 곽낙원 여사, 그의 아들 김인이 잠들어 있다. 아들을 죽인 살인자와 죽은 이의 어머니·아들이 같은 공간에 잠든 기묘한 상황이 오늘까지도 현충원에서 펼쳐지고 있다. 2년 전인 2020년 78년 만에 고국에 돌아와 현충원에 안장된 홍범도 장군은 이를 어떻게 받아들일까. 역사의 아이러니다.

해방과 분단의 역사를 간직한 채
순국선열과 호국영령들 영면
하지만 묻혀선 안될 이들도 있어
친일청산 요구 목소리는 진행 중

그뿐만이 아니다. 12·12 군사반란에 협력한 박준병·유학성, 5·18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시위대를 진압한 소준열 등 장성 출신 반민주행위자들 역시 현충원에 영면해있다. 모두 제대로 청산하지 못한 과거사의 업보다. 현충원을 돌면서 이런 고민을 하고 있었으니 다크 투어리즘이 아예 의미가 없었던 건 아니었나 보다.

현충원에 모셔진 수많은 영령이 잠든 묘소 옆 비석에는 사연은 제각각이나 공통적으로 가리키는 게 하나 있다. 현 세대가 아직 풀지 못한 숙제, 민족이 한반도의 터전 위에서 평화로운 번영을 누리는 것이다. 현충원 곳곳 자리한 커다란 돌 위에 적힌 글귀는 어쩌면 우리에게 다시는 같은 실수를 되풀이하지 말라는 냉엄한 충고일지 모르겠다. “나라를 잃고 타민족의 가혹한 지배를 받았던 민족의 치욕적 역사를 우리는 기억하고 있는가.”

글·사진=이준섭 기자 ljs@gg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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