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장면, 그 장소]

일제에 맞서던 덕혜옹주 선교사촌에서
추억의 7080으로… 소제동 그 골목
근현대 건축물 상징 옛 충남도청사
변호인부터 마약왕까지... 촬영 메카

영화 '클래식'. 준하와 주희가 처음 만나는 곳, 그리고 지혜와 상민이 만나는 곳. 대전 원정동 두계천이다.
영화 '클래식'. 준하와 주희가 처음 만나는 곳, 그리고 지혜와 상민이 만나는 곳. 대전 원정동 두계천이다.

준하(조승우)는 몇 번의 시도 끝에 잡아낸 반딧불이를 주희(손예진)의 손에 건네줬다. 신기한 듯 미소짓던 주희는 준하를 보며 환히 미소 짓는다. 반딧불이를 주고받은 둘의 우연 같은 만남은 긴 시간이 흘러 필연이 된다. 주희의 딸 지혜(손예진)와 준하의 아들 상민(조인성)은 그날 밤처럼 강가 위 반딧불이를 바라보며 마침내 서로의 마음을 확인한다. 영화 ‘클래식’의 처음과 끝에 등장하는 이 곳은 대전 서구 원정동 두계천을 배경으로 한다. 맑고 푸른 옛 시골길 모습 그대로인 두계천은 시간이 흘러도 변치 않는 모습으로 영화 속 명장면을 연상케 한다. 이처럼 대전에는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숨은 명소가 많다. 영화 속 그 장면, 그 장소를 찾아봤다.

  #1.  1920년 치열했던 ‘봉오동전투’ 속으로   
철도청대전지역사무소재무과보급창고 3호(대전 동구 소제동 291-34)

무엇이 두려웠던 것일까. 일제는 우리 민족의 얼과 정신을 상징하는 호랑이를 전멸하기에 이른다. 나무로 지어진 건물 내부에는 철창에 갇힌 호랑이가 가득하다. 창을 통해 햇빛이 건물 내부를 비추고 있지만 호랑이의 울부짖음에 차가운 공기만 감도는 듯하다. 호랑이 도륙을 멈춘 일본군 월강추격대 대장 야스카와 지로(키타무라 카즈키)는 전투를 선포했지만 결국 우리 독립군에 져버린다.

영화 봉오동전투의 촬영지였던 철도청대전지역사무소재무과보급창고 3호의 외관.
영화 봉오동전투의 촬영지였던 철도청대전지역사무소재무과보급창고 3호의 외관.

지난 1920년 중국 지린성 봉오동에서 홍범도와 최진동이 이끄는 한국 독립군과 일본군과의 교전 끝에 승리했던 봉오동전투를 생생하게 담아낸 영화 ‘봉오동전투’에 대전역 철도보급창고가 등장한다. 1956년 만들어진 철도보급창고는 지붕의 각 부재가 삼각형 단위로 짜여진 트러스 목구조로 일제강점기 당시의 건축 기술이 눈에 띈다. 해방 이후 창고 건축의 특징과 시대적 흐름을 파악할 수 있는 귀중한 역사적 사료로 판단돼 대전시등록문화재 제168호로 지정됐다.

 

영화 덕혜옹주 속 어린 덕혜옹주가 고국을 떠나기 전 일제에 지혜롭게 맞서던 장면을 촬영한 선교사촌. 한남대 제공
영화 덕혜옹주 속 어린 덕혜옹주가 고국을 떠나기 전 일제에 지혜롭게 맞서던 장면을 촬영한 선교사촌. 한남대 제공

  #2. 1910~1925년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녀 덕혜옹주  
오정동선교사촌(대전 대덕구 한남로 70 한남대)

인파를 뚫고 검은 자동차 한 대가 마당 앞에 멈춰선다. 하얀 양장 차림의 덕혜옹주(김소현)와 일본식 전통의상을 입은 복순(라미란)이 자동차에서 내려 서양식 붉은 벽돌과 기와가 어우러져 있는 건물로 향한다. 이윽고 몰려온 기자들이 그들의 모습을 카메라로 담아낸다. “대한제국 황녀에게 기모노를 입으라 보낸 것이오!” 일본 전통의상을 입지 않은 덕혜옹주의 모습에 당황한 듯한 친일 세력은 그저 바라보기만 한다. 영화 ‘덕혜옹주’ 촬영지인 선교사촌에서 친일 세력의 잔꾀에 지혜롭게 일침을 가하던 덕혜옹주의 모습이 보이는 듯하다.

한남대 경상대학과 생활관 사이에 있는 선교사촌은 1955년 한남대를 설립한 선교사들이 사용하던 주거시설로 인돈학술원과 선교사 주택 6채가 남아있다. 동서양의 건축양식을 모두 엿볼 수 있는 근대건축물로 대전시문화재자료 제44호에 이름을 올렸다. 1950~60년생 초록이 무성한 아름드리 나무와 새들의 지저귀는 소리를 들으며 풀숲을 걷다보면 어느새 제 모습을 드러낸다. 우리 고유의 전통양식과 새롭게 유입되기 시작한 서양식 양식을 함께 관찰할 수 있어 개화기의 어느 날로 이끄는 독특한 분위기를 풍긴다. 그래서일까 1900년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장르의 영화와 드라마가 촬영될 정도로 명소다. 이곳에서는 영화 ‘그해 여름’, ‘살인자의 기억법’, 드라마 ‘마더’ 등 다수 촬영됐다.

 

영화 쎄시봉의 두 주인공이 사랑을 키우던 장소는 대전 동구 소제동 솔랑 5길 골목. 높은 담벼락과 계단은 1970~80년대의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영화 쎄시봉의 두 주인공이 사랑을 키우던 장소는 대전 동구 소제동 솔랑 5길 골목. 높은 담벼락과 계단은 1970~80년대의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대전 동구 소제동 솔랑 5길은 영화 쎄시봉과 마약왕을 비롯해 드라마 오월의 청춘의 한 장면에도 담겼다. 높은 담벼락을 타고 늘어진 담쟁이 덩굴이 매력적이다.
대전 동구 소제동 솔랑 5길은 영화 쎄시봉과 마약왕을 비롯해 드라마 오월의 청춘의 한 장면에도 담겼다. 높은 담벼락을 타고 늘어진 담쟁이 덩굴이 매력적이다.

  #3. 1960년대 사랑이 싹트던 그 시절 골목길 ‘쎄시봉’  
대전 소제동 솔랑 5길

통금 사이렌이 울리고, 자영(한효주)과 근태(정우)는 명숙의 집을 향해 달리기 시작한다. “명숙아! 명숙아~!” 골목에 들어서자 가로등 불빛이 낡은 슬레이트 지붕과 파란대문 앞 계단을 비추고 있다. 금이 간 담벼락에는 전단지가 붙어있고, 그 앞으로 자전거 한 대가 세워져 있다. 자영과 근태가 입을 맞추며 마음을 확인하던 그때 애석하게도 경찰의 호루라기 소리가 들린다.

영화 ‘쎄시봉’의 한 장면처럼 그 시절 청춘들이 헤어짐의 아쉬움을 표하던 데이트 장소는 늘 골목길이었다. 대전 동구 솔랑 5길 일대는 과거 60~70년대 길목을 완벽하게 보존하고 있다. 좁은 길을 따라 마주한 소제동의 어느 골목길 담벼락에는 담쟁이 덩굴이 있었고, 담장 내부에서 뻗쳐진 나뭇가지가 손짓하고 있었다. 또 지금은 도어락의 등장으로 찾아보기 힘들어졌지만 소제동 골목 일대에는 초록·파란 철재 대문이 아직 대다수를 이룬다. 누군가가 가져다놓은 대문 앞 화분은 어린시절 친구들과 땅따먹기를 하던 그 골목으로 소환하기에 충분하다. 쾅쾅 대문을 두드리면 잠에서 깬 명숙이가 눈을 부비며 나올 것만 같다. 드라마 ‘오월의 청춘’ 역시 이곳 소제동 일대에서 남녀 주인공이 서로의 마음을 싹틔웠다.

옛 충남도지사 관사촌 내부 정원에는 굽이굽이 뻗은 노송이 심어져 있다. 실내는 근현대 건축양식이 어우러져 있다.
옛 충남도지사 관사촌 내부 정원에는 굽이굽이 뻗은 노송이 심어져 있다. 실내는 근현대 건축양식이 어우러져 있다.

 

  #4. 1970년대 마약왕을 잡아라 ‘마약왕’  
대전 소제동 솔랑 5길·옛 충남도지사 관사촌

이두삼(송강호)의 아내 성숙경(김소진)이 파란대문을 두드린다. “집이 참 좋네예.” 사투리가 잔뜩 실린 말을 하던 그는 누군가를 설득하기라도 해야 하는지 양손 가득 선물을 들고, 집주인의 말이 채 마무리되기 전 대문 안으로 발걸음을 옮기지만 이내 내쫓긴다. 떠밀리는 숙경의 옆 담장에는 하숙이라는 큰 글자가 붙어있다.

소제동 일대에서는 1970년대 부산에서 벌어진 마약범죄에 대한 이야기를 담은 영화 ‘마약왕’ 촬영도 진행됐다. 마약을 매개로 한 두삼의 겁 없는 범죄 일대기는 대전 곳곳에서 촬영됐다. 두삼은 마약 제조와 불법 유통사업으로 큰돈을 벌게 되고 이후 아내 숙경을 위해 ‘바로크음악학원’을 차려주는데 영화 속 그 장소가 바로 옛 충남도지사 관사촌이다.

옛 충남도지사 관사촌은 근현대 건축양식이 어우러진 실내는 물론, 정원에는 노송이 굽이굽이 뻗어있다. 부자가 되고 싶었던 두삼과 숙경의 모습을 부유함이 내풍기는 이곳 관사촌으로 활용해 그 당시 고위관료와 부자들의 삶을 보여주고 있다.

 

1980년대 부산의 한 인권변호사의 이야기를 담은 영화 변호인에는 시대적 상황도 반영돼 있다. 옛 충남도청사 입구에서는 우석(송강호)과 시위대가 마주하는 장면이 나왔다.
1980년대 부산의 한 인권변호사의 이야기를 담은 영화 변호인에는 시대적 상황도 반영돼 있다. 옛 충남도청사 입구에서는 우석(송강호)과 시위대가 마주하는 장면이 나왔다.
영화 변호인은 옛 충남도청사에서 다수의 장면이 촬영됐다. 이 곳 1층 로비에서는 주인공 우석(송강호)과 윤택(이성민)이 대화를 하던 장소였다.
영화 변호인은 옛 충남도청사에서 다수의 장면이 촬영됐다. 이 곳 1층 로비에서는 주인공 우석(송강호)과 윤택(이성민)이 대화를 하던 장소였다.

  #5. 1980년대 국가란 국민이다 ‘변호인’  
옛 충남도청사

#1. 법원을 들어선 우석(송강호)과 계단을 내려오던 신문 기자 윤택(이성민)이 1층에서 마주친다. “부독련(부산 독서 연합)인지, 뭔지 허수아비 서라고 보내서 나왔다…”, “잘 좀 부탁한다. 내 그 재판 변호인이다”, “돈 엥가이 벌더만 심심한가베”. 날선 말을 내뱉던 윤택이 로비에 모여있던 동료들과 함께 먼저 자리를 벗어난다. 우석이 윤택의 이름을 불러보지만 대답이 없다.
#2. “니 국보법(국가보안법) 사건 처음이지?… 이건 유무죄가 아니고 형량 싸움이데이. 판사를 건드리면 우짜노!”, “자들이 죄가 있다봅니까. 고문이 있었던 겁니다….” 잠시 휴정을 맞게 된 우석이 박 변호사와 법원 뒤에서 말다툼을 벌인다.

1980년대 부산에서 활동했던 한 인권 변호사의 일대기를 그린 영화 ‘변호인’은 옛 충남도청사에서 다수의 장면을 촬영했다. 우석과 윤택이 마주하던 장면부터 우석이 법원을 들어오던 중 시위대를 맞닥뜨리는 장면도 모두 옛 충남도청사다. 근대 관공서 건축양식의 대표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옛 충남도청사는 1920~1930년대의 양식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어 영화 ‘영웅’ 등도 이곳에서 촬영됐다.

글·사진=김지현 기자 kjh0110@gg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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