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전쟁 73주년 특집

6·25 한국전쟁이 발발한 지 73년이 흘렀다. 숱한 시간이 흐른 만큼 누군가에게 한국전쟁의 기억은 점차 희미해져 가지만 어떤 이에게는 더욱 선명해져 가기만 한다. 그래서일까. 여느 교과서에 실리는 단편적인 한국전쟁의 기록은 짙은 아쉬움을 느끼게 한다. 지난 1950년 7월 7일 충북 충주시 신니면에서 벌어진 ‘동락리 전투’를 격전 끝에 승리로 이끈 김상흥 대령의 아들 김병한(72) 씨가 그날의 기억을 차곡차곡 쌓아가는 이유다.

ㄴ [관련기사] 6.25 국군의 첫 승전 ‘동락리 전투’의 숨은 영웅

김병한 씨가 6·25 한국전쟁 참전유공자이자 동락리 전투 승리의 주역인 아버지 김상흥 대령의 사진과 자료를 펼쳐보이고 있다. 
김병한 씨가 6·25 한국전쟁 참전유공자이자 동락리 전투 승리의 주역인 아버지 김상흥 대령의 사진과 자료를 펼쳐보이고 있다. 

병력이 10배 이상 많은 북한군을 ...
아버지 통해 들은 '그날'의 이야기
철모에 그려진 페인트 계급장도...

금산 전원주택에 아버지 기록물 전시
“동락리 전투 잊히지 않길 바랍니다”

◆ 3천명 북한군을 전술로 압도한 3백명

한국전쟁의 판도를 바꾼 인천상륙작전이 있기 이전. 내륙에서도 열세한 상황을 딛고 전무후무한 전술로 승리를 이끈 전투가 있다. 바로 1950년 7월 7일 첫 승전보를 전한 ‘동락리 전투’다. 당시 2대대 5중대를 이끌고 있던 김상흥 대위는 단 300명에 불과한 병력으로 3000명에 육박하는 북한군과 맞섰다.

“동락리 전투는 동락초등학교 교정에서 7월 6일 오후 5시 무렵 우리 국군의 기습공격으로 시작해 이튿날 오전 7시까지 이어졌습니다. 병력이 10배 이상 많은 북한군을 다음날까지 치열하게 싸우며 승리를 거둔 것인데 어떻게 이겼는지 저 역시도 궁금했죠. 장교 생활을 하면서 연구해보니 당시 전쟁을 하기 전 그 마을 출신으로 지형·지물에 능통한 병사를 찾아 예행연습을 하고 방어태세를 구축했던 게 주효했어요. 이러한 전술로 5중대는 모든 전투에서 단 한 번도 패배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김상흥 대령.

◆철모에 그려진 페인트 계급장

동락리 전투는 김상흥 대령의 기지가 있었기에 가능했던 첫 승리였다. 이는 12일 만에 남한을 점령하며 내려오던 북한군으로 인해 후퇴를 거듭하던 국군의 사기를 진작시키기에 충분한 승리였다. 이날 전투 이후 5중대를 이끈 김상흥 대령을 비롯한 병사들의 철모에는 페인트가 칠해졌다. 1계급 특진이란 뜻이었다. 철모에 그려진 페인트칠의 계급장은 국방부가 1996년 김상흥 대령을 6·25 한국전쟁 참전유공자로 인정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최초의 승리를 이끌어 우리도 이길 수 있다는 에너지를 전파한 전투가 바로 동락리 전투입니다. 그래서 더욱 큰 의미가 있습니다. 당시 이승만 대통령이 이 소식을 듣고 5중대 전 부대원에게 1계급 특진을 내릴 정도였는데 이는 우리나라 최초였죠. 당시 참모총장이 현장을 찾아 아버지의 철모에 페인트로 대령 특진 표시를 그려줬다고 합니다. 그야말로 ‘페인트로 그린 계급장’이었습니다.”

◆금산에 전시된 동락리 전투 기록물

그러나 안타깝게도 동락리 전투를 모르는 이들이 많다. 그가 교직 생활 당시 동락리 전투 현장은 물론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할 역사의 발자취를 좇아 기록물을 수집하고 이를 대전과 세종의 초·중·고등학교에 전했던 이유다. 또 얼마 전 충남 금산 군북면 군북로의 한 전원주택에 24㎡ 남짓한 별관을 만들어 한국전쟁 당시 김상흥 대령의 자료를 전시하기도 했다.

“한국전쟁이 잊히고 있는 상황이 정말 안타깝습니다. 요즘 친구들은 한국전쟁과 더욱 멀어지고 있으니까요. 국가관을 형성하고,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을 키우는 안보 교육도 이뤄져야 하는데 참 아쉽습니다. 잊히지 않길 바라며 자료를 정리해 학교 현장에 전달하기도 했습니다. 또 한국전쟁의 첫 승리가 동락리 전투였다는 것을 알리고자 금산의 한 전원주택에 아버지의 자료를 전시하며 이곳을 찾는 주민들에게 알리고 있습니다.”

◆숭고한 희생 기억하길…

1924년 충남 논산에서 태어난 김상흥 대령은 육군사관학교 6기 출신으로 한국전쟁에 참전해 혁혁한 공을 세우고 대령으로 예편했다. 지역에서 태어난 그는 한국전쟁 당시 충청지역을 지키며 목숨도 마다하지 않았고 영면하기 직전까지 사회에 헌신했다.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는 대한민국의 시초가 된 전투를 이끌었지만 우리는 그의 이름이 낯설다. 반드시 기억해야 할 이름을 알지 못하는 게 부끄러울 뿐이다.

“고등학생이 될 무렵 아버지가 돌아가셨습니다. 아버지는 국가관이 투철하고 봉사 정신이 남달리 강하셨던 분이었습니다. 사회봉사활동을 하시다 영면하셨는데 자랑스럽습니다. ‘선한 영향력을 전하는 직업을 가져야 한다’라는 안보의식을 키울 수 있도록 계속해서 알려 나갈 예정입니다. 부디 잊지 말아주시길 바랍니다.”

글·사진=김지현 기자 kjh0110@gg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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