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그친 후 거리엔 물 묻은 파지뿐
폐지값↓... 축축한 종이는 평소의 반값
더위, 체력 고갈, 젖은 폐지 '삼중고'

▲ 장맛비가 잠시 소강 상태에 접어든 27일 대전의 한 길목에서 폐지를 줍던 노인 A(77·여) 씨가 박스 뭉텅이 속 젖은 박스를 골라 정리하고 있다. 물기가 있는 박스는 무게가 더 나와 평소보다 적은 값으로 쳐준다.

집안 곳곳에 꿉꿉한 느낌이 들더니 장마란다. 시간은 왜 이렇게 빠르게 흐르는지 난방비 때문에 추위에 움츠러들던 게 엊그제 같은데 이제는 틀지도 못 할 냉방비를 걱정해야 할 때다. 나이가 들면 안정적으로 남은 여생을 보낼 줄 알았는데 어찌된 게 물가는 하루가 멀다하고 치솟아 손주 용돈도 마련하기도 버겁다.

폐지 줍는 일을 시작한 지는 한참됐다. 갈 곳은 없지만 그렇다고 집에만 있기에 영 몸이 찌뿌둥해 거리만 전전했는데 누가 ‘그럴 시간에 폐지라도 주워 몇 천원이라도 벌어봐’라고 해 하나, 둘 빈 박스를 집에 모아둔 게 이제는 리어카를 직접 끌고 있다.
“장맛비가 잠시 소강상태에 접어들 예정입니다.”

27일 대전의 한 길가에서 노인이 폐지를 정리하고 있다.
27일 대전의 한 길가에서 노인이 폐지를 정리하고 있다.

TV 뉴스에서 알려주는 날씨예보에 비가 잠시라도 그쳐 그나마 다행이다 생각했지만 이마저도 잠시 한참 고민에 빠져든다. 폐지라는 게 물에 젖어버리면 무게는 무지하게 나가지만 고물상에서 쳐주는 돈은 헐값이다. 또 팔순을 앞둔 내게 물에 젖은 무거운 파지를 끌고 갈 기력도 얼마 없다. 장마철은 80세의 노구에게 너무나 고역이다. 무더위에 체력은 체력대로 남아나질 않는데 폐지까지 젖어 있는 경우가 많아 수입이 반토막이 돼 버린다.

그야말로 ‘삼중고’. 오늘은 햇볕이 쨍해보여 집에서 물을 떠 나가봐야겠다. 비가 내리지 않아 불편한 점은 없지만 잠시 비가 멎을 때가 더 힘들다. 평소보다 더 덥고 습해서다. 평소처럼 오가던 길로 향하자 누군가 상자만 모아 내놓은 것인지 상자 뭉치가 눈에 들어왔다. 상자 펼치며 정리하는데 뭉텅이의 반은 여즉 축축했고 일부만 바짝 말라있었다. 최대한 마른 박스만 리어카에 옮겨 담았다. 자동차를 피해 갓길로 리어카를 끌며 보이는 상자 뭉치를 다 들춰봤다. 여기도 똑같다. 젖은 폐지 반, 멀쩡한 폐지 반. 그래도 열심히 다녀야 한다. 내일부터 비가 온단다. 이렇게 하나, 둘 쌓다보니 리어카 무게가 너무 벅차다. 상자가 많이 쌓여 무겁다기 보다는 무거운 몸뚱아리이, 큰 리어카를 받쳐낼 힘이 없는 것이다. 자그마한 유모차는 많이 담을 수 없어 리어카를 끌고 다니지만 이제는 힘에 부친다.

27일 장맛비가 잠시 멈춘 가운데 젖은 박스 뭉치가 길가에 놓여있다.
27일 장맛비가 잠시 멈춘 가운데 젖은 박스 뭉치가 길가에 놓여있다.

오전을 모두 보냈지만 리어카는 평소보다 더 빈 것 같다. 아쉽지만 이제 마무리하고 평소 가던 고물상으로 향한다. 그나마 이곳이 값을 많이 쳐준다. 가뜩이나 요즘 폐지값이 반값으로 뚝 떨어졌다. 지난해 1㎏에 100원이었는데 올해는 ㎏당 40원이다. ‘땅을 파봐야 10원 한 장 나오기 어렵다’는 말은 단 하루라도 폐지를 주워보면 알 것이다. 무게를 재고 파지가 쌓인 곳으로 폐지를 옮기다 보니 간혹 물 묻은 폐지가 나온다.

“젖은 폐지 줘도 괜찮아요. 어차피 물에 풀어서 다시 재활용하는 거니까….”
장마철 속도 모르고 내리는 비는 백발의 노인에게 유달리 가혹한가보다. 오늘 벌이는 1800원. 적어도 우리 손주 공책은 살 수 있겠지….

글·사진=김지현 기자 kjh0110@ggilbo.com
※이 기사는 27일 폐지 줍는 노인의 오전 일과를 동행하며 이야기한 내용을 바탕으로 재구성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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