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설위원

나는 교사에 의한 학생 폭력이 극심하던 시대에 학교에 다녔다. 초등학교에 입학한 이후부터 고등학교를 졸업하던 때까지 달라진 건 없었다. 무자비한 폭력이 수시로 자행돼 언제든, 누구든 그 희생양이 될 수 있었다. 폭력의 이유는 상식에서 한참 벗어난 경우가 많았고, 인정사정없이 감정적으로 자행되는 일도 많았다. 어린 시절의 나는 그런 이유로 학교가 무서웠고, 싫었다. 학교에서 누군가가 매를 맞는 모습을 거의 매일 지켜봐야 했다.

군대도 사정은 같았다. 거의 매일 주먹질, 몽둥이질을 지켜봤다. 나도 언제 그 희생양이 될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상존했다. 폭력은 늘 훈육으로 포장돼 있었다. 그래서 저항할 수 없었고, 꼼짝없이 당해야 했다. 폭력에서 벗어나고 싶어 하루빨리 어른이 되고, 사회인이 되고 싶었다. 어른이 되고 사회인이 되면 그 공포에서 해방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지금은 학교에서도, 군대에서도 폭력이 사라졌다. 폭력을 몰아내기까지 녹록지 않은 과정을 겪었다. 사회 곳곳에서 체벌이 금지됐을 때, 폭력이라는 아주 손쉬운 방법을 쓰지 않고 다수를 통솔하려니 현장에서는 울화통 터진다는 하소연이 이어졌다. 학교와 군대, 교도소 등에서 폭력을 없애겠다고 했을 때, 누구라도 곧이듣지 않았다. 폭력 없이 통솔은 불가능하다는 신념이 강했기 때문이다.

폭력의 피해자가 됐을 때를 생각해보자. 주먹질이나 매질을 당했을 때 육체적 고통이 따르는 것은 말할 나위 없고 비굴함과 공포감, 모멸감 등 온갖 부정적 감정이 밀려와 감정에 큰 상처를 입는다. 폭력은 인간이 올바른 인격체로 성장하는 데 막대한 지장을 준다. 어린 시절에 입은 마음의 상처는 평생 트라우마로 남아 가치관에 부정적 영향을 끼친다.

폭력환경 속에 자란 사람 중 상당수는 폭력을 혐오하면서 한편으로 폭력을 찬양하는 성향을 보인다. 폭력은 상대를 굴종시켜 단시간에 저항을 없애고 목표한 성과에 도달할 수 있는 최상의 방법이라는 사실을 지켜보았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학교와 군대, 교도소 등에서 폭력을 부활해야 한다고 믿는 이들이 많다. 손쉬운 방법을 놔두고 왜 멀고 어려운 길로 돌아가느냐는 것이다.

폭력이 당장 효과를 얻을 수 있을지언정 근본적인 대책이 될 수 없음을 깨닫지 못하는 것이다. 눈앞의 폭력을 피하고자 순응하는 것은, 진정한 순응이 아니다. 마음속에선 폭력에 대한 분노와 굴종에 대한 자괴감이 움트게 마련이다. 대부분 폭력 피해자는 분노와 모멸을 해결하는 수단으로 자기보다 약한 이를 향해 폭력을 행사한다. 폭력의 대물림은 이렇게 형성된다.

폭력이 빠르고 정확하게 문제를 해결해주는 수단이 된다는 생각은 위험하다. 폭력 앞에 이루어지는 복종은 진정한 복종이 아니다. 눈앞에 닥친 위기를 모면하기 위한 거짓 굴종에 불과하다. 그것이 순응이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진정한 순응은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생각이나 행동을 바로잡겠다는 반성을 동반해야 한다. 반성 없는 복종은 순간 모면을 위한 거짓 행동일 뿐이다.

학교현장에서 교사가 수난을 당하는 교권침해 사건이 잊을 만하면 한 번씩 발생한다. 그럴 때마다 교사의 체벌을 정당화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터져 나온다. 또한, 폭력을 포함한 강력한 제재 수단을 동원해 학생을 지도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는 일제 강점기나 군사정권 시대의 학교로 회귀해야 한다는 전근대적인 생각에 불과하다.

교사가 학생을 제대로 지도하고 학습시킬 수 있도록 교권을 확립해야 한다는 데는 충분히 동의한다. 그러나 그 수단으로 폭언과 폭행을 동원해야 한다는 논리에는 수긍할 수 없다. 또한, 교사의 인권을 신장해야 한다는 목소리에도 공감한다. 하지만, 학생의 인권을 인정해서는 안 된다는 주장에 대해서는 수긍할 수 없다. 인권은 법을 앞세우기 이전에 모든 인간이 갖는 고유한 권한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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