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전 대전문인협회장

여행 중의 최고는 기차여행이 아닐까 한다. ‘기차역은 늘 그리움의 장소다. 삶의 웃음보다 눈물이 더 많은 곳이다.’ 정호승 외 3인의 공저 ‘우리가 사랑에 빠졌을 때’에 나오는 말이다. 그렇다. 어쩌면 우리는 인생이라는 기차를 타고 각자 거쳐 가야 할 역을 지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꼭 기쁨보다 눈물이 더 많은 곳은 아니겠다.

생각해보면 나도 적지 않은 역을 거쳤다. 내 가슴속에는 내가 지나온 역들의 애틋한 풍경들이 살아 꿈틀거리고 있다. 나는 광복 직후 늘 촉촉하게 젖어 있는 옥토의 중심 당진시 합덕에서 부모님이 태워주신 기차를 타고 여행을 시작했다. 그곳은 내 유년의 푸른 꿈과 추억을 키워준 곳이다. 그리고 80년 가까이 무릎 떨림 없이 기차여행 중이다. 내가 들른 기차역은 수도 없이 많다. 그때마다 나는 그곳에 추억이란 것들을 남겨 놓았다.

그간 천둥도 만나고 번개도 만나며 그때그때 슬기와 지혜로 잘 견뎌내면서 오늘에 이르렀다. 나는 여행 중에도 약속시간이 되면 부모님이 사시는 곳으로 돌아가는 걸 잊지 않았다. 가슴 한쪽을 도려내는 고통을 수반하는 일을 당하지 않은 것만도 다행이다.

여행 중에 앞장서며 힘이 되어준 떡잎 같은 사람도 만났다. 그녀는 삭풍이 몰아치고 눈비가 내려 어디로 가야 할지 방향조차 찾을 수 없는 순간이 왔을 때도 맞잡은 손 놓지 않고 나를 감싸 안았다. 내 유토피아는 아직도 내 마음에 존재하는 작은 소망을 향해 매일매일 희망의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

내가 지나는 레일 옆 초목들은 다행히 기상이변보다는 인간이 만든 달력에 더 잘 순응하고 있다. 수채화 물감으로 찍어 바른 듯 형용할 수 없이 고운 빛깔의 꽃들이 다소곳이 제 향을 피워내고 있다.

기차를 타고 달리다 초록 숲에 몸을 맡기고 마음을 열어놓으면 어느새 새로운 내가 거기에 있었다. 성현들이 생각한 최고의 경지는 부끄러움 없이 사는 삶이었다. 여행하면서 나는 그런 철학을 몸소 깨달았다.

나의 앞길은 영롱한 색깔의 우산들이 걸어가는 듯한 것들로 채워졌다. 경륜과 지혜를 탑처럼 쌓아온 어른이 아이의 마음으로 회귀하는 일은 퇴화가 아니라 승화로 일컬을 수 있을 것이다. 포도밭을 가꾸듯이 삶을 가꿔 좋은 열매를 거두려 노력했는데 과연 그 목표가 달성되었는지는 계속 살펴보아야 할 것 같다. 젊음이란 시간은 결코 나에게 우호적이지 않았다. 여행하면서 깨달은 것은 사물에 구속받지 않고 세상의 흐름에 몸을 맡기며 사는 것이 제일이라는 것이었다.

내 여행길에는 봄이면 붉고 노란 꽃들이 향연을 펼쳤고, 여름에는 무쇠 팔뚝 같은 근육질의 강건함이 같이 했고, 가을에는 온갖 과실들이 내 여행을 축하해 주었고, 겨울에는 순백의 하얀 도화지를 제공해 줌으로써 나에게 순정의 그림들을 그리게 했다. 그리하여 은은한 피리 소리를 들려주는 난의 부드러운 선율을 감상할 수 있게 했다.

지금에 와서 생각한다. 흐르는 물은 앞을 다투지 않는데 늘 작을 것을 탐하다 큰 것을 잃는 우를 범하지 않았는지 눈 쌓인 골목에 다다라 생각해본다. 채워지지 않은 탐욕을 붙잡고 어리석음으로 황무지가 되어버린 내 안의 뜰은 아니었는지 생각해본다.

겨울은 여백의 계절이라는데 나는 겨울을 어떻게 맞을지 생각에 잠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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