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남대 명예교수

여러 가지 기쁜 일들, 깊은 일들을 만나지만, 나는 내 아내가 이끄는 ‘명상춤’을 따라할 때 어떤 깊은 감동을 받을 때가 많다. 동작이 없는 듯, 단순한 움직임인 듯, 그러나 살짝 다른 생각 하면 곧 뒤틀려지는 발놀림. 별로 배울 것도 익힐 것도 없는 듯한 단순한 춤사위를 고요히 반복하는 동안 모든 것을 잠시 잊고 깊은 침잠에 빠질 때가 있다. 그 시간이 참 좋다. 아마도 다른 사람들도, 여기저기에서 그 명상춤 워크숍에 참석하려고 오는 이들도 그런 청량하고 아늑한 느낌을 얻으니까 오고 또 오는 듯하다. 그런 춤사위 중에 그저께는 ‘없는 노래 부르며’라는 노래에 맞춘 춤을 추었다. 그 때 나는 깊은 명상에 빠졌었다.

배삼식 씨가 노랫말을 짓고, 정재일 씨가 피아노로 반주하고, 한승석 씨가 노래를 부른다. 가사는 이렇다.

“길 위에 한 아이 노래 부르며 가네/ 풀잎같은 노래는 바람에 흩날리는 데/ 반쯤 감은 두 눈에/ 불러도 대답 없이/ 모르는 노래 하나 부르며 혼자 가네/ 새벽어둠 풀잎 끝에 가만히 맺혔다가/ 아침 바람 불어오면/ 가벼이 돌아가는 한 방울 이슬처럼/ 한 방울 눈물처럼/ 온다는 소식 없이/ 간다는 기별 없이/ 그렇게 가만히 찾아오는 그 노래/ 그렇게 가뭇없이 돌아가는 그 노래/ 슬픔도 없는 노래/ 아픔도 없는 노래/ 미움도 원망도 그리움도 없는 노래/ 이 세상 어디에나 가득한 설움/ 이 세상 어디에도 없는 그 노래/ 보고 싶지 않아도 자꾸 눈에 들어와/ 듣고 싶지 않아도 그의 귀에 들어와/ 가만히 눈을 감고/ 없는 노래 불러요/ 없는 줄 알면서도 없는 노래 부르네/ 저 길에 한 아이 노래 부르며 가네/ 별빛 같은 그 노래/ 멀리서 가물거리네/ 동그만 어깨 위에/ 어스름 내리는데/ 세상에 없는 노래/ 부르며 멀리 가네/ 세상에 없는 노래/ 부르며 멀리 가네”

이 노래를 여러 번 반복하여 들으면, 가만히 눈을 감고 들으면 한없는 깊음 속으로 빠져들어가는 느낌이다. 문득 굉장한 그림이 펼쳐지는 느낌이다. 내가 오래 전 어린 시절 시골에 살 때 우리 집 앞을 지나고, 우리 집에 들려 하룻밤 자고 가던 어떤 나그네들이 떠오른다. 굽이굽이 돌고돌아가는 물길처럼 나 있는 좁은 길을 따라, 어디에나 있는 아리랑고개, 새재, 말티고개를 괴나리봇짐 이고지고 비틀거리며 혼자 걸어 넘어가는 사람들의 그림이 그려진다. 어떤 때는 높은 소리로, 어떤 때는 들리지 않는 속소리로, 어떤 때는 천지가 진동할만한 거대한 소리를 내지르다가도 밑모르는 깊은 침묵으로 묵묵히 걸어가는 그 그림, 길위에 솟아있는 원망스런 돌뿌리에 걸려 넘어질 뻔하다가, 산들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에 얼굴 쓱 내밀면서 하늘 바라볼 때, 멀리 둥실 떠가는 흰구름 보고 실없는 웃음 던지는, 그 때 산새소리 들으며 가던 길 묵묵히 걸으면서 원망도 슬픔도 그리움도 희망도 잊은 채, 그냥 깔끔하게 정화된 빈 몸 하나 후여후여 걸어가는 그 그림. 그렇게 걸어가면서 흥얼거려 부르는 노래, 그것이 ‘없는 노래’요 ‘천지 어디에나 가득한 노래’가 아닐까? 나는 이 대목에서 눈시울을 적시지 않을 수 없다. 참 고마운 그 노래. 함석헌 선생이 노래했던 ‘씨ᄋᆞᆯ의 설움’을 이렇게 정화하는 것인가 싶었다. 없는 노래, 그러나 천지 어디에나 가득한 노래 그것이 바로 씨ᄋᆞᆯ의 노래가 아닐까? 그래서 나는 이 길, 이 노래가 그렇게 그립다. 왜?

어디에서 칼부림이 있었다고 하고, 어디에서 시달리고 시달리다가 교실에서 자기 집에서 일터에서 그 귀한 목숨을 바쳤다 하고, 주체할 수 없는 원망과 분노 속에서, 내 혼자만 분하고 옳다는 거대한 착각 속에서 보복을 반복하는 소리가 들린다. 보이스피싱으로 계좌가 털렸다는 소리를 듣고, 빚더미에 앉았다가 뽀시시 일어날 무렵 또 다시 덮치는 재난을 이길 수 없었다는 소식, 뙤약볕에 온몸을 불살라 외쳐대는 저 소리, 그 소리 아랑곳 않고 그냥 내 갈길 가는 저 무도한 사람들. 이리저리 둘러보면 이것저것 좋아서 기분 좋게 사는 사람들도 많지만, 또 한 편으로 원망과 분노와 불만족과 불안감과 복수심으로 가득한 세상인 듯이 보이는 곳도 많다. 이 때 나는 바리데기가 생각이 나고, 없는 노래 부르며 길 걸어가는 모습이 떠오른다. 그것은 상상의 그림으로만 보일 뿐 실제 우리 삶에서 그런 길은 없고, 그런 노래도 없다.

가만히 생각하니 지금은 고갯길이 없다. 굽이도는 길이 없어진다. 혹시 그런 곳이 있다고 하여도 거기를 걷는 사람은 거의 없다. 고개 대신 터널이 뚫렸고, 굽잇길 대신 직선 고속도가 생기고, 쉬고가던 바윗터에는 휴게소나 카페가 생기고. 언제나 더 빨라지는 기차나 자동차나 버스길만이 있다. 혼자 가도, 여럿이 가도 흥얼거리며 삭히면서 묵히면서 갈 길이 없어졌다. 없는 노래 부르고 들으면서 갈 일이 없어졌다. 그래서 각박해지는가? 물론 걷는 사람들은 많아졌다. 길가, 강가, 운동장, 산허리를 굽이도는 길에 떼는 아니지만 떼처럼 보이는 걷는 사람들은 많아졌다. 어떤 목적을 세우고, 칠천보 만보 만오천보를 목적하고 재면서 걷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그러나 그 길에서 없는 노래 듣고 부르며 혼자 갈 수는 없다.

혼자 ‘없는 노래’ 부르며 갈 수 있다면, 문명한 이 때 솟아나는 야만이 혹시 좀 사그러들 수는 없는 것일까? 특히 미래가 불안하다면서 성적과 경쟁에 시달리는 청소년들이 흔들거리며 ‘없는 노래’ 부르면서 걸어갈 길과 조금 여유를 만들 수는 없을까? 그런 길 만들자는 것이 아니라 그런 길 스스로 찾아 나선다면 내가 정화되지 않을까? 세상이 좀 맑아지지 않을까? 문명 속에 원시를 꿈꿀 수 있는 자유와 행동을 생각하고 살아볼 수는 없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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