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훈 작가·국제펜 한국본부 이사

대전은 도시의 역사성 때문에 내세울 만한 인물이 많은 편은 아니다. 하지만 서포 김만중은 우리 대전의 자부심으로 자리 잡고 있는 분이다. 그는 지난 1637년 병자호란 중 선상 위에서 태어나 1692년에 유배지인 남해에서 생을 마칠 수밖에 없었던 시대의 아픔을 겪은 인물이기도 하다. 조선 시대 예학으로 유명한 거유 사계 김장생의 손자이던 아버지 김익겸이, 난리 중에 강화도에서 순절한 탓에 선친의 얼굴도 보지 못하고 유복자로 태어난다.

우리는 그를 한글 소설 ‘구운몽’과 ‘사씨남정기’의 저자인 국문학의 태두로 흠모하고 있고 어머니 파평 윤씨에게 지극한 효를 행한 효자로도 알고 있지만 정치적으로는 당시에 송시열을 흠모한 서인이었다. 이이 율곡에서 사계 김장생, 다시 우암 송시열로 이어지는 기호학파의 줄기를 타고나는데 그 때문에 정치적으로 어려움을 겪기도 한다.

서포의 형인 김만기는 숙종의 장인으로, 현종 말부터 숙종 초까지 막강한 권세를 행사했던 인물이어서 숙종의 환국 정치에도 적극 관여해 남인들을 몰아내는데 한몫을 한 인물이었기에 동생인 서포 역시도 정치적으로는 서인이었고 마지막에는 유배지에서 생애를 마감한다.

바로 서포 김만중, 그는 분명한 대전 사람이다. 지금도 전민동에 위치한 광산김씨의 묘역에는 서포 일가의 흔적이 뚜렷하다. 우선 아버지 김익겸과 어머니 파평 윤씨의 합장 묘가 수백 년의 역사적 풍운을 견디면서 확실하게 자리를 잡고 있다. 조부모의 묘소도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다. 김만중의 효행을 기록한 정려와 그가 어머니를 그리워하는 시 ‘사친(思親)’이 새겨진 문학비를 만날 수도 있다.

아쉬운 건 서포의 무덤이 유배지인 남해에서 다시 연산을 거쳐 두 차례 이장되는 바람에 지금은 이북 지역인 개성에 위치해 있어 만날 수 없다. 대전은 1905년 경부선 철도가 완공되면서 조성된 현대도시다. 이어 1932년 충남도청이 공주에서 대전으로 옮겨가면서 충남의 행정중심지로 부각되기 시작한 도시다. 이웃 공주나, 청주 또는 충주에 비해 역사성을 갖고 있질 못하다. 따라서 인물을 많이 가지지 못한 면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면 그렇지도 않다. 서포를 비롯한 역사적인 인물이 적지 않다. 회덕현에서 태어나 자란 사육신 박팽년, 유학의 거두 우암 송시열, 동춘당 송준길, 유회당 권이진 등이 있다. 그들과 함께 문학적인 인물이요, 효자로 이름난 조선 시대의 문신 김만중의 존재는 뚜렷하다.

서포는 그의 소설 구운몽과 사씨남정기만으로도 대전이 내세울 표상으로 적합한 인물이다. 이미 유배지였던 남해 노도에서는 대전에서 많은 자료를 얻어다가 김만중유배문학관을 건립해 커다란 성공을 했다. 그런데 정작 출생인지 대전에서는 아직도 자리를 잡지 못하고 있다. 여러 해 전에, 대전시와 광산김씨 종중에서 전민동 묘역을 중심으로 해 김민중 문학공원을 조성해 그의 문학 정신과 효 정신을 이어받을 계획을 세운 바 있다. 하지만 용두사미가 돼버린 채 아직까지도 감감무소식이다.

다행스럽게도 최근에 국제 펜 한국본부 김용재 이사장을 중심으로 해 김만중의 문학적 위업을 계승하고 발전시켜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가고 있다. 김만중을 대전의 표상 인물로 내세우려는 노력이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다행히 대전 문화예술을 통해 대전 시민들에게 정신문화를 누리게 함은 물론 자부심을 키우려는 뜻으로 과감한 정책을 펴고 있는 이장우 시장이, 관심을 가지고 이 사업의 뒤를 지켜준다고 한다. 필자는, 문화 예술인의 한 사람으로서 가슴이 뿌듯해진다. 이번에야말로 서포 김만중을 대전의 표상 인물로 내세워 대전의 역사성은 물론 대전의 문화예술 진흥에 큰 계기가 마련될 수 있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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