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남대 14·15대 총장

노인들은 남루하게 늙지 않기를 소원한다. 낡아지지 않고, 익어가기를 원한다. 낡는다는 것은 부패(腐敗)요, 익어간다는 것은 발효(醱酵)다. 이런 시가 있다. “아름답게 늙어간다는 것/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욕망의 가지를/ 피를 토하는 아픔으로 잘라내는 일/ 혈관의 동파에도 안으로 조용히 수습하여/ 갈라진 우리들의 마른 강물에/ 봄비가 되어 주는 일// 그리하여 너 혹은 나의 처진 어깨를 펴주고/ 가끔은 나를 벌려 우리를 사랑하는 일이다./ 추하지 않게 주름을 보태어 가는 일/ 하루하루의 소중함을 모르고 지난 날들이/ 다만 슬펐을 뿐”(김한규/아름답게 나이든다는 것)

자기가 노인이라고 생각되는 사람은 다음 성경(잠17:6, 16:31, 20:29, 사65:20, 렘31:13, 겔27:9)을 정독하기 바란다. 뜨거운 여름을 지내고 태풍의 질주도 겪어내고 이제 하늘은 한층 더 높아지고(天高), 말들도 살이 찌는(馬肥) 계절이 왔다. 고추잠자리들은 더 높게 높게 날아오르고 있다. 이런 아름다운 계절에 남녀노소 그 누구라도 시 한 편을 읽거나 외워야 제격이다.

①“그대/ 9월이 오면/ 9월의 강가에 나가/ 강물이 여물어가는 소리를 듣는지요/ 뒤따르는 강물이/ 앞서가는 강물에게/ 가만히 등을 토닥이며 밀어주면/ 앞서가는 강물이 알았다는 듯/ 한 번 더 몸을 뒤척이며/ 물결로 출렁/ 걸음을 옮기는 것을/ 그 때 강둑 위로/ 지아비(男便)가 끌고 지어미(妻)가 미는 손수레가/ 저무는 인간의 마음을 향해/ 가는 것을// 그대/ 가을의 강가에서 생각하는지요/ 강물이 저희끼리만/ 속삭이며 바다로 가는 것이 아니라/ 젖은 손이 닿는 곳마다/ 골고루 숨결을 나누어 주는 것을/ 그리하여 들꽃들이 피어나/ 가을이 아름다워지고/ 우리 사랑도 강물처럼 익어가는 것을// 그대/ 사랑이란/ 어찌 우리들만의 사랑이겠는지요/ 그대가 바라보는 강물이/ 9월 들판을 금빛으로 만들고 가듯이/ 사람이 사는 마을에서/ 사람과 더불어 몸을 부비며/ 우리도/ 모르는 남에게 남겨줄/ 그 무엇이 되어야 하는 것을/ 9월이 오면/ 9월의 강가에 나가/ 우리가 따뜻한 피로 흐르는 강물이 되어/ 세상을 적셔야 하는 것을”(안도현/9월이 오면)

②“코스모스는/ 왜 둑길에서만 피는 것일까?/ 아스팔트가/ 인간으로 가는 길이라면/ 들길은 하늘로 가는 길/ 코스모스 들길에서는 문득/ 죽은 누이를 만날 것만 같다./ 피는 꽃이 지는 꽃을 만나듯/ 9월은 그렇게/ 삶과 죽음이 지나치는 달/ 코스모스 꽃잎에서는 항상/ 하늘 냄새가 난다/ 문득 고개를 들면/ 벌써 엷어지기 시작하는 햇살/ 태양은 황도에서 이미 기울었는데/ 코스모스는 왜/ 꽃이 지는 계절에 피는 것일까/ 사랑의 기다림에 앞서듯/ 기다림은 성숙에 앞서는 것/ 코스모스 피어나듯 9월은/ 그렇게/ 하늘이 열리는 달이다”(오세영/9월)

③“9월이/ 지구의 북반구 위에 머물러 있는 동안/ 사과는 사과나무 가지 위에서 익고/ 대추는 대추나무 가지 위에서 익고/ 너는/ 내 가슴 속에 들어와 익는다// 9월이/ 지구의 북반구 위에서 서서히 물러가는 동안/ 사과는/ 사과나무 가지를 떠나야 하고/ 너는/ 내 가슴 속을 떠나야 한다.”(나태주/9월이)

나는 요즘 이렇게 스스로에게 다짐을 해본다. ‘나무는 꽃을 버려야 열매를 맺고, 강물은 강을 떠나야 바다에 이른다.’ (나도 이 세상을 떠나야 천국에 이른다). 최근에 김동길 교수, 이어령 박사, 송해 선생, 현미 가수가 떠나더니 외교의 달인 임덕규 전 의원과 성결교회 원로 조종남 목사님이 세상을 떠났다. 가을엔 사명을 완수한 나뭇잎들이 지상으로 떨어져 초목귀근(草木歸根)을 알려주고 있다. 아, 나도 언젠가 저렇게 가겠지! 죽을 줄 알고 죽음을 준비하는 사람만이 삶을 아끼고 감사하며 최상급으로 살 수 있다.(自我實現人/ 社會奉仕人). 죽음은 아름답게 열심히 산 사람들의 결론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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