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협서정문학연구위원

세상이 시끄럽다.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이스라엘과 하마스의 전쟁으로 인한 불안과 공포의 뉴스가 연속된다. 그에 따른 세계 경제의 불안정 및 갖가지 다방면의 문제가 어우러져 온갖 외우내환이 국민을 힘들고 어렵게 한다. 그러나 우리는 숱한 환란 속에서도 오뚝이처럼 일어서는 슬기와 희망의 민족이다.

10월은 상달이다. 우리 겨레는 가을걷이가 끝나는 음력 10월을 일 년 열두 달 중에서 가장 큰 달, 신성한 달로 여겨 조상과 하늘에 감사하는 추수 감사제를 거행했다. 현대는 문화·예술행사로 승화되어 곳곳에 지역축제나 자연 명소 찾기, 문화·예술 감상, 소풍·여행 등으로 발전하고 있다. 중양절은 음력 9월 9일을 이르며 상서로운 날로 여겨 국화주나 국화차, 밤떡 등을 해 즐겼다.

옛 선비들은 등고(登高)라 하여 산에 올라 시를 짓기도 하였다. 절후 중 요즘은 상강(霜降) 무렵이다. 상강은 ‘서리가 내린다’는 뜻이다. 이모작이 가능한 남부지방에서는 보리 파종을 할 때다. 이 시기에는 쾌청한 날씨가 연속되며, 밤에는 기온이 매우 낮아 수증기가 지표에서 엉겨 서리가 내린다. 옛말엔 상강이 지난 다음 입동이 되기 닷새 전에 벌레들이 겨울잠을 자러 들어간다고 하였다. 맑고 높은 하늘과 싸늘해지는 날씨. 곧 등화가친, 독서의 계절이기도 하다. 채근담에 ‘희망이 달아날지언정 용기마저 놓쳐서는 안 된다. 희망은 종종 우리를 속이지만, 용기는 속이지도 않을뿐더러 힘을 북돋워 주는 약이 된다.’라는 말이 나온다. 그렇다. 삶은 희망을 지닌 용기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늘 다시 일어설 용기를 가져야 한다. 차분히 생각이 고이는 이즈음 한 번 되새겨 볼 만한 말이다. 이런 때 꿋꿋하고 올바르게 살았던 호서 사대부가(士大夫家) 여성 시인을 알아보자. 호연재 안동김씨(1681~1722)는 대전광역시 대덕구 송촌동에서 살았던 실제 인물이다.

김호연재는 조선 시대 17세기 대표적 여성 시인으로 그의 한시는 신사임당, 허난설헌, 이매창 등에 견줄 만하지만 비교적 일반인에게 덜 알려져 있다. 호연재는 안동김씨로 군수를 지낸 김성달의 넷째 딸로서 충남 홍성군 갈산면 오두리에서 태어나 동춘당 송준길의 증손자인 소대헌 송요화와 혼인하였다. 슬하에 1남 1녀를 두었으며 42세라는 길지 않은 생애를 살았다.

호연재가 남긴 시작품은 모두 194편으로 후손들이 잘 보존하여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호연재의 시는 주로 혼인으로 인해 헤어지게 된 친정 가족들을 그리워하는 내용이지만, 인간 본연의 순수한 마음으로 삶의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신선과 같이 세상살이를 초월한 품격 높은 여중군자의 모습으로 정성을 다하는 자세와 태도가 엿보인다.

'春日(춘일)'을 감상해 보면 春日遲遲似一年(춘일지지사일년, 봄날이 더디고 더뎌 한 해 같아라)/滿堂遊客懶搖扇(만당유객나요선, 집에 가득한 노는 손들 느릿느릿 부채만 흔드는데)/ 廚房饋食事吾任(주방궤식사오임, 부엌의 음식 만들기 내 소임이니)/ 草食何敢進子前(초식하감진자전, 나물반찬만 어찌 그대들 앞에 내올 수 있겠는가)//라고 읊어 양반가 ‘접빈객’의 어려움을 섬세하고도 진솔하게 토로하고 있다.

또 '고홍(孤鴻:외로운 기러기)'을 보면 何處孤鴻度我門(하처고홍도아문, 어디서 온 외로운 기러기 내 문을 지나는가)/ 數聲凄切怨離群(수성처절원이군, 두어 소리 처절히 무리 속 떠남을 원망하도다)/ 寒窓獨宿思家客(한창독숙사가객, 차가운 창에 홀로 자며 집'친정'을 생각하는 사람이)/ 中夜無眠欲斷魂(중야무면욕단혼, 깊은 밤에 잠 아니 와 혼이 끊어지려 하는구나)// 이 고장 회덕에 몸담고 살면서 세상의 구구한 일에서 벗어나 자연의 섭리와 반가 여성의 고단하고 규범적인 삶에서 탈속, 달관한 시작품을 보여준다.

호연재는 이외 다수의 작품에서도 그 심경을 애이불비하게 서정, 서사적으로 짧고 혹은 길며 광범위하게 펼쳐 보여주고 있다.

호연재의 시는 조선 시대 여성 문학을 연구하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된다. 그의 외손 김종최(金鍾㝡)는 사실기(事實記)에서 ‘부인은 천품이 총명하고 순수·결백하였다. 효우가 독실하고 인자, 검소하였다. 모범으로 안팎이 한결같아 가식이 없었다.’라고 추앙하였다‘ 호연재는 현대인에게도 사표가 될 만한 하다. 깊어만 가는 시월의 끝자락, 차분한 사색의 여유를 지녀가자. 무거운 삶의 울을 벗어나 대덕구 동춘당 공원을 찾아가면, 거기 김호연재의 숨결이 어린 시비(詩碑)가 기다려 반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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