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천 군북면 추소리 절골(부소담악) ~ 옥천 이지당(각신리) ~ 소옥천 생태습지 ~ 옥천 군북면 석호리 돌거리고개 (13km 6시간)

세월 참 빠르다. 도시의 삶을 살아가는 탓이다. 그나마 대청호반을 걸으며 계절의 흐름을 한 줌 더 잡아보기라도 한다. 계절은 벌써 봄을 지나 여름을 향해 달려간다. 신록(新綠)은 그새 녹음(綠陰)을 만들었다. 봄꽃들도 이제 꽃비 내리며 내년을 기약한다. 봄의 끄트머리를 쫓아 대청호 오백리길 8구간에 섰다. 7구간 여정의 피로를 단박에 날려준 부소담악 절경 앞에서 다시 8구간의 여정을 시작한다. 부소담악은 또 봐도 신비로움 그 자체다. 언제고 한 번은 추소리 뒷산 성인봉 중턱에 올라 부소담악을 끼고 도는 서화천의 감입곡류(嵌入曲流)를 한 눈에 조망하리라.


 

[ 대청호오백리길 8구간 ] 선비길

유유자적 신록샤워, 옛사람 풍류에 젖다

 

#. 서화천 마을길 풍경

대청호 오백리길 8구간은 대청호반보단 마을길 산책이 루트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충북 옥천 추소리 절골에서 시작해 환평리, 국가생약자원관리센터, 이지당, 소옥천생태습지, 지오리 보골, 이평리, 석결마을을 거쳐 돌거리고개에서 끝난다. 13㎞, 쉬엄쉬엄 약 6시간이 소요된다.

추소리 절골 마을 보호수 그늘 아래서 길을 나선다. 보호수 옆엔 여지없이 돌탑이 웅장하게 서 있다. 마을사람들은 성황탑이라고 한다. 마을 공동체 문화가 복원되기 시작하면서 주민들이 2004년에 다시 쌓았다. 마을의 무사안녕을 기원하는 마음이 한가득 담겨 있다. 부소담악을 감상하며 호반을 걷는다. 오백리길 표시론 이백리 방향이다. 발끝에서 빛나는 야생화들이 밟힐까 조심조심 애를 써본다. 서화천 강가엔 사람들이 제법 많이 모였다. 작은 배를 띄워 우암 송시열이 느꼈을 풍류를 맛본다.

잠시의 힐링을 뒤로하고 ‘추소마을향혼비’부턴 포장길을 걷는다. 금강을 품고 있는 준봉들이 병풍처럼 펼쳐진다. 도로가 가로수엔 벌써 잎이 자라 뜨거운 햇빛을 가려준다. 옻나무와 두릅나무에선 초록빛 새 생명이 돋아나 싱그러움을 선사한다.

아스팔트길이 지루할 때 쯤 동화 속 집 한 채가 눈길을 잡는다. ‘마노하우스’라는 카페인데 아래쪽으로 확장 이전한 듯하다. 푯말을 보고 다시 마을길로 접어든다. 환평길이다. 봄 햇살 아래 가수원에선 과실수들이 열매를 맺을 준비를 한다. 배나무에선 꽃이 떨어지고 잎이 자라고 복숭아나무에선 분홍색 꽃이 피기 시작했다. 옥천의 자랑, 포도나무에서도 결실의 대장정이 시작됐다. 환평리 사람들의 손놀림도 분주해졌다.

 

#. 곧은 절개의 숨결을 찾아

환평리 들녘을 따라 걷다 고개 하나 넘으니 신식 건물이 하나 나온다. 식품의약품안전처가 운영하는 국가생약자원관리센터다. 황기며 울금이며 맥문동이며 다양한 약초들이 재배되고 있다. 그런데 네 갈래 길에 ‘대청호 오백리길’ 표시가 없다. 한참을 헤매다 길을 찾았다. 왔던 길에서 그대로 직진이다. 큰 도로가 아니라 새들의 노래가 정겨운 마을길을 그대로 걸으면 된다. 이곳에서도 농삿일이 한창이다. 마늘 심어놓은 밭 옆에 깨를 심는 농부들의 손놀림이 정겹다.

부소담악부터 대략 4㎞ 지점, ‘환평리 갈림길’ 표시판을 만난다. ‘이지당 가는 길’을 따르면 된다. 강변 혹은 대청호반이 아니어도 온통 푸른 녹음과 친구하며 마을길을 가로지르면 금세 이지당을 만난다.

서화천(소옥천) 너럭바위 앞 낮은 산기슭에 자리 잡은 이지당은 임진왜란 때 의병장이 돼 금산전투에서 산화한 중봉 조헌(1544∼1592) 선생의 발자취가 남아 있는 곳이다. 그래서 대청호 오백리길 8구간은 선비길이다. 꼿꼿한 선비의 기상이 서려있는 곳이기 때문일 게다.

 

 

이지당은 전체적으로 서화천과 제법 잘 어울린다. 한옥의 미(美)가 바로 이런 게 아닐까. 경관을 해치지 않으면서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려는 마음씨가 예쁘다. 서화천과 어우러진 이지당을 바라보고 있자면 그냥 저절로 마음이 평온해진다.

이지당 바로 앞, 세화천 물살이 널찍한 바위에 부딪친다. 마을사람들은 이 바위를 방바위라고 한다. ‘바위에 걸터앉아 술 한 잔 기울였으면…’ 하는 생각이 절로 드는 명당인데 이지당에서 글을 가르쳤던 중봉이 그랬고 훗날 중봉을 흠모한 우암 송시열 또한 그랬다고 한다. 선비에게 풍류는 빠질 수 없는 덕목. 술 한 잔에 시조를 읊조리는 맛은 어땠을까 짐작해 본다.

조선 영조4년(1728) 김천택이 편찬한 시조집 ‘청구영언’(靑丘永言)엔 조헌의 시조 한 편이 전해진다. 봄의 정취와 외로움을 노래한 한 폭의 수묵화 같은 작품이다.

지당(池塘)에 비 뿌리고 양류(楊柳)에 내 끼인 제
사공은 어디 가고 빈 배만 매였는고
석양에 짝 잃은 갈매기만 오락가락 하더라.

 

#. 8구간의 새로운 명소 생태습지

서화천을 가로지르는 다리를 건너면서 먼발치서 이지당을 다시 눈에 넣는다. 각신리에서 이평리 쪽으로 길을 잡는다. 이지당이 아득해질 무렵, 고개 하나를 넘으면 물길이 쉬어가는 습지가 나타난다. 용목리와 지오리 일원에 조성된 소옥천생태습지다.

3만 4500㎡나 되는 너른 들판에 조성된 수질정화시설이다. 서화천이 대청호에 유입되기 전 한 번 거르는 역할을 한다. 하루 1만 8000톤의 물이 이곳에 유입돼 이틀을 머문 뒤 불순물을 털어내고 대청호로 유입된다. 갈대와 물억새, 꽃창포, 노란꽃창포, 수련, 부들 등이 수질여과장치 역할을 한다. 습지를 빠져나온 물길을 따라 이평리 쪽으로 방향을 튼다.

지오리 보골에서 마을 안쪽으로 직진이다. 지오3길을 따라 담쟁이들이 길을 인도한다. 마을 담벼락에 그려진 벽화를 감상하며 쉬엄쉬엄 걷는다. 마을을 빠져나와 다시 오솔길이다. 울창한 숲속을 조금 걷다보면 메타세쿼이아가 제법 우뚝 솟아있다. 잠시 산림욕을 즐기면서 지그재그 숲길을 오른다.

아스팔트길, 보골 갈림길에 선다. 이평리 쪽이다. 오른쪽으로 마성산 자락이 길게 늘어서 있다. 길 따라 대략 1.5㎞, 그 끝에서 이평리 마을을 만난다. 7구간 막바지의 반대편이다. 산 너머가 부소담악이란 얘기다. 서화천(소옥천)을 중심으로 U턴을 한 셈이다. 드디어 대청호와 다시 마주한다. 또 하나의 고개를 넘어 석호리, 산골짜기 깊숙이 파고든 대청호가 푸른빛을 선사하며 긴 여정의 피로를 풀어준다.
글 이기준 기자 lkj@ggilbo.com
사진 이승훈·이기준 기자

 

 서화천 물길 따라 글 읽는 소리 퍼지네

서화천(소옥천)은 대청호가 조성되기 훨씬 이전에도 빛이 났나보다. 일찍이 우암 송시열(1607∼1689)은 서화천과 어우러진 부소담악을 ‘소금강’이라 극찬했고 앞서 중봉 조헌(1544~1592)은 서화천이 금강 본류로 스며드는 곳에 각신서당(覺新書堂)을 지어 후학을 양성했다. 기호학파의 맥을 이으면서 훗날 조선 중기 권세를 누렸던 송시열은 조헌을 흠모했음이 분명하다. 조헌의 업적이 서려있는 이곳을 다시 고쳐 세우고 ‘이지당(二止堂)’이란 현판을 써 서당에 걸었다.

이지당은 송시열이 시전(詩傳)에 나오는 ‘산이 높으면 우러러 보지 않을 수 없고 큰 행실은 그칠 수 없다’라는 뜻의 ‘고산앙지경행행지(高山仰止景行行止)’란 문구에서 두 개의 지(止)자를 따 지은 것이라고 한다. 조헌에 대한 흠모를 고스란히 담고 있다. 송시열은 조헌의 묘 이장 당시 묘비를 쓰기도 했다.

조헌은 경기도 김포에서 태어났다. 5살 때 글을 읽는 등 자질이 뛰어나고 효성이 지극했다. 가난했지만 글 읽기에 전념해 성균관에 입학했고 1567년(명종22년) 문과에 급제했다. 조헌은 ‘행동하는 양심’의 전형이었다. 철저하게 유학자의 길을 걸으면서 죽음을 두러워하지 않는 충언으로 신하의 도리를 다 했다. 1589년 도끼를 들고 시정의 폐단을 극론으로 상소한 일화가 유명하다. 또 1591년 일본 도요토미가 겐소를 시켜 ‘명나라를 칠 것이니 길을 빌려달라’고 조선에 요구했을 때도 도끼를 들고 대궐문 밖에서 일본 사신의 목을 벨 것을 요구하기도 했다. 물론 받아들여지지 않자 조헌은 낙향해 전쟁에 대비했다.

1592년(선조25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조헌은 호남의 고경명·김천일, 영남의 곽재우·정인홍과 함께 호서에서 처음으로 의병을 일으켰다. 옥천에서 거병한 조헌은 승장(僧將) 영규대사와 함께 청주성을 수복해 충청도 공략의 본거지를 탈환하는 전과를 올렸다. 그러나 관군의 시기와 방해로 의병이 흩어지자 조헌은 남은 700여 명의 의병을 이끌고 금산에서 왜군과 일전을 치른다. 물론 중과부적(衆寡不敵)이었지만 왜군도 이 전투에서 혼쭐이 났다.

조헌은 금산전투에 앞서 이렇게 말했다. “오늘, 죽음만 있을 뿐이다. 장부는 죽음이 있을 뿐 구차하게 모변해선 안 된다. 의(義)에 부끄러움이 없도록 하라.”  현재 금산 칠백의총(七百義塚)엔 조헌과 칠백의병의 넋이 고이 잠들어 있다.

 

지금의 이지당은 1901년 옥천 금(琴)·이(李)·조(趙)·안(安) 네 문중이 중건한 것이다. 건물구조는 목조 기와집으로 정면 일곱 칸 측면 한 칸의 팔작집인데 가운데 세 칸은 대청(마루)이고 서편의 세 칸 중 두 칸은 방이며 한 칸은 부엌이다. 부엌 위로 두 칸의 누각이 있고 동편 한 칸 방 위에도 이층 두 칸의 누각을 만들어 여름에 사용하기 좋도록 했다. 누에 올라서면 바람과 시냇물 흐르는 소리가 무척 시원할 듯하다. 누마루는 ‘출입금지’다.

서화천 너머에서 이지당을 바라보면 나라의 미래를 걱정한 조헌의 한숨과 미래 동량의 희망찬 글 읽는 소리가 귓가에 맴돈다.

이기준 기자 lkj@ggilbo.com

 

[8구간 이렇게 걸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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