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청호도 물이 많이 빠졌다, 빠져도 너무 빠졌다
풍성한 모습 되찾길 바라며 4구간을 다시 걷는다
대청호의 문턱을 넘어서자 가을이 마중 나왔다. 대전시 동구 추동. 가을향기가 물씬 풍기는 이름이다. 그렇다. 추동(秋洞)은 가을 동네다. 그런데 마을의 내력을 좀 더 유심히 들여다보면 뭔가 잘 못 됐다. 원래 이 마을이름은 ‘가래울’이었다. 가래나무가 많아서 그렇다. 가래나무를 추자나무라고도 했으니 한자화 하려면 추자나무에 쓰는 추(楸)자를 음차 했어야 하는데 가을 추(秋)자를 가져다 써버렸다. 추자나무마을이 가을마을이 된 거다. 이름 탓일까. 마을의 정체성도 이름 따라 바뀌었다. 지금은 추자나무동네보다 가을동네가 더 어울린다. 추동의 이미지는 이제 가을과 찰떡궁합이 됐다. 봄에 이어 가을에 대청호 오백리길 4구간을 다시 찾은 이유다. 억새물결 넘실대는 추동의 가을 멋과 향이 궁금해서.
[대청호오백리길] 4구간, 가을

4구간은 호반낭만길이다. 구간 길이는 14㎞(약 7시간)로 꽤 길지만 대부분 평지길이어서 그리 부담스럽지 않다. 오히려 호반의 풍경을 가까이서 오래 즐길 수 있는 구간이 많기 때문에 대청호 오백리길 21개 구간 중 가장 인기 있는 구간으로 꼽힌다. 특히 요즘은 가뭄 탓에 물이 많이 빠져 수몰 전의 흔적들을 보듬으며 좀 더 색다른 경험을 할 수도 있다. 공식적인 구간 코스는 대전 동구 마산동 ‘더리스’ 옆 대청호 오백리길 쉼터에서 출발해 대청호 추동수역 최남단인 신상교에 이르는 것인데 이번엔 반대로 걸어보기로 했다.


#. 1 신선바위에서 신선놀음 한 번?
옥천 땅에서 동이 트더니 이내 신상교 위로 햇빛이 쏟아진다. 대청호에 또 다시 아침이 밝았다. 이제는 가을 아침이다. 풀잎에 맺힌 이슬이 영롱하다. 갑갑한 빌딩숲에서 비래동 대전터널 하나만 빠져나오면 이렇게 신세계가 펼쳐진다는 게 놀라울 따름이다.
신상교 아래 제방을 따라 여정을 시작한다. 올 봄까지만 해도 이 제방 양 옆으론 물뿐이었다. 물 위를 걷는 느낌이랄까? 그런데 지금은 다르다. 물이 빠져도 너무 빠졌다. 덕분에 수몰 전 옛 모습, 실개천 흐르고 논과 밭이 어우러졌던 그 모습을 조금이나마 상상해 볼 수 있는 시간을 갖게 됐지만 어서 빨리 대청호의 모습을 되찾길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지난 봄 4구간을 찾았을 때 일행을 맞은 뚝방길-위 사진. 길 양쪽으로 물이 가득 찼었는데, 이번에 찾은 뚝방길 주변은 몰라 보게 변해 있었다- 사진 아래)

제방 건너 10분 정도 엉 고개를 오르다보면 왼쪽으로 신선봉에 오르는 길이 나 있다. 30분 남짓 산에 오르면 입이 떡 벌어지는 돌덩어리들을 만나게 된다. 고인돌과 같은 형상인데 사람들은 이 바위를 신선바위라 부른다. 신선들이 이곳에 내려와 놀았다는 전설이 전해지는데 믿거나 말거나다.

그래도 분명한 건 하나 있다. 신선놀음 하기 딱 좋은 자리다. 신선바위 주변엔 온전한 축성의 흔적도 보이는데 고대 군사적 목적의 성곽이라기보다 신앙 목적이 더 크다는 견해가 많다. 주변에선 오래된 토기 조각들도 발견됐는데 이로 미뤄 삼국시대에 제사를 지내던 곳이었을 가능성도 있다고 한다.
#. 2 바뀐 호반의 윤곽 … 또 다른 느낌
신선바위에서 내려와 하산 길을 타면 금성마을 입구에 이른다. 본격적인 호반 트래킹이 시작된다. 파란 하늘에 흰 구름과 회색 구름이 섞여 햇빛을 머금는 게 느낌이 좋다. 해가 구름에 가리느냐 마느냐에 따라 대청호반의 표정이 달라진다. 햇빛이 드는 데와 그늘진 데가 한데 어울려 한눈에 동시에 나타나면 그 또한 신비로운 경험을 선사한다. 빛의 향연에 따라 대청호가 춤을 춘다.

호수 건너 5구간의 땅이 손을 뻗으면 닿을 듯 가깝게 느껴진다. 간간이 보였던 섬들도 모두 사라졌다. 물이 빠지자 육지와 연결돼 버렸다. 수면 위로 고개만 빼꼼 내민 작은 봉우리. 몇 발짝만 가면 내디딜 수 있을 것처럼 가까운 곳에서 우리의 애간장을 녹였던 그 봉우리들이 이제는 우리의 발걸음 아래 놓이게 됐다. 이 얼마나 기대했던 순간인가. 봉우리와 봉우리를 연결하는 능선이 물 빠짐과 함께 드러난 덕분이다. 물론 호수 한 가운데 놓인 섬으로의 모습이 더 아름답긴 하다. 뭔가 아쉬움이 남는 그 순간이 가장 아름답다.


호반에 놓인 나룻배 한 척. 이미 물과 거리가 멀어져 있다. 배 안에 담긴 물이 원래 대청호반의 물길이 어디까지 다다랐는지를 말해주고 있다. 물이 나간 자리엔 녹색 식물들이 자라 물길의 흔적을 대신한다. 연갈색과 초록의 대비가 역력하다. 그 경계가 바로 호반의 흔적이다.

#.3 물, 바람, 구름, 억새 ... 가을이 왔네
억새는 대청호반의 가을·겨울 정취를 책임지는 중요한 상징물이다. 대청호반으로 사람들의 발길을 끌어당기는 힘이다. 그리고 이 억새의 강력한 힘이 가장 잘 드러나는 곳이 바로 이곳, 4구간이다. 땅과 물의 경계면을 따라 걷는 즐거움을 만끽하다 보면 어느새 추동 취수탑에 접어든다. 4구간 중에서도 이곳이 억새 향연의 최고 명소다. 대청호자연생태공원도 아기자기하게 잘 조성돼 있어 나들이하기에 딱 좋다.



공원 앞에 조성된 데크길에선 바람에 넘실대는 억새와 푸른 대청호의 어울림을 극적으로 대면할 수 있다. 데크길은 억새밭 위를 걷도록 만들어졌는데 대전 장태산 스카이워크와 비슷한 느낌을 선사한다. 구불구불 데크길을 걷다보면 어느새 가을 정취에 젖어든다. ‘언제부턴가 갈대는 속으로 조용히 울고 있었다…’, ‘억새꽃 다발은 사랑하는 이에게는 보내지 마세요….’ 갈대와 억새를 소재로 한 시도 감상하면서 그렇게 가을의 정취를 가슴에 담는다.


요즘 대청호반은 호수라기보단 바다에 가깝다. 하얀 백사장 비슷한 모습을 간직하고 있어서다. 호반을 걷는 게 아니라 해변을 걷는 기분이다. 물에 씻기고 씻기기를 반복한 땅엔 고운 모래가 남아 햇빛에 빛나고 그 빛을 따라 호반길은 끝없이 이어진다.



#. 4 호반, 그리고 낭만
4구간엔 역시 호반낭만길이란 이름이 제격이다. 계절과 풍경이 요즘 말로 깔맞춤이다. 4구간과 5구간도 나름 깔맞춤이다. 대청호를 사이에 두고 사이좋게 마주보고 있다. 드라마 ‘슬픈 연가’ 촬영지였던 추동 모래톱과 5구간 방축골길 끝지점이 특히 그렇다. 모래톱에서 팔짝 뛰어 금세 5구간으로 넘어가고픈 충동이 일 정도로 가깝게 마주보고 있다.
4구간과 5구간의 중간엔 햄버거섬이 외롭게 떠 있다. 호수면에 반영이 비치면 햄버거처럼 생겼다고 해서 이름 붙여졌다. 구간 여정의 막바지에 접어들자 억새의 하얀 솜털이 더 뽀얗게 반짝인다. 찬바람에도 따스함을 선사하는 참 특이한 녀석이다.
하늘과 하늘빛을 담은 호수, 그리고 억새의 새하얀 어울림은 단언컨대 가을 정취의 끝판왕이다. 아참! 올 여름 문을 닫았던 4구간의 명소인 더리스 레스토랑이 새 단장을 하고 최근 다시 문을 열었다. 식당에서 바라보는 풍경이 아름다워 유명해진 곳이다. 성악가 김동규가 부른 ‘10월의 어느 멋진 날에’ 노래 가사가 입가에 맴도는 가을 오후, 대청호반에서 낭만을 노래하며 단풍의 절정을 기다린다.
글·사진=이기준 기자 lkj@ggilbo.com
헬리캠 촬영=전우용 기자 yongdsc@ggilbo.com

[4구간 거꾸로 걷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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