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만 말라, 포기 말라 … 길이 주는 교훈

 

휴가(休暇)라는 말을 풀어보면 ‘쉴 틈’이다. 고단한 일상생활에 잠시 쉼표를 찍는 일이다. 그런데 우리네 휴가문화는 그렇지 않은 것 같다. 휴가의 끝엔 언제나 피곤함이라는 꼬리표가 붙는다. 요즘 휴가는 곧 스트레스다. 혹 떼러 갔다 혹 붙이고 온 경우가 태반이다. 물론 여기엔 단서가 붙는다. ‘긴 여행(旅行)’이 수반되는 휴가가 특히 그렇다. 오죽하면 ‘집 떠나면 개고생’이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그런데 그런 줄 알면서도 으레 ‘휴가=긴 여행’을 동일시하며 거기서 환상을 갖는다. 장마도 막바지로 치닫고 이제 본격적인 휴가철이다. 이 또한 정형화된 하나의 틀인데 그래서 휴가가 스트레스가 되는지도 모르겠다.

이번 대청호 여정은 14구간 장고개구불길이다. 구간의 타이틀답게 ‘장고개’가 핵심 포인트다. 공식적인 14구간은 약 10.5㎞, 5시간이 소요되는 여정인데 대청호의 묘미를 살리려면 좀 더 체력과 시간을 투자해야 한다. 플러스 알파(+α) 구간이 두 개나 된다. 그래서 욕심을 내면 전체 구간은 배로 늘어나는데 충분히 그럴만한 가치가 있다. 11구간 말티고개길에서처럼 플러스 알파 구간을 빼면 분명 후회한다.

14구간은 충북 옥천군 안내면 현리 신촌교 습지공원에서 출발해 새터(한울체험마을), 탑산이, 담양리 임도, 솔목이 갈림길, 화골 갈림길, 장고개 갈림길(막지리(14-1구간)·용호리(14-2구간)), 담양 3교, 보은군 회남면 은운리로 이어진다. 탑산이마을에서 산에 오르는 50분 정도만 제외하면 편안하게 걸을 수 있다.

14구간에선 시작부터 발길이 떨어지지 않는다. 잘 가꿔진 안내천 습지공원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이곳을 거닐다보면 자연스럽게 ‘워밍업’이 된다. 신촌마을 안쪽으로 조금 더 들어가면 전통방식으로 토기를 만드는 공장도 볼 수 있다. 옥천군 안내면 현리 신촌마을은 말 그대로 새로 생긴 마을이다. 대청호가 생기면서 장계대교 인근에 살던 주민들이 위쪽으로 이주해서 생긴 마을이다.

 

#.1 출발하자마자 길을 잘못 들었다. 그래도 후회는 없다. / 느티나무 아래서 탑산이마을 유람을 시작한다. 가다보니 담장 위에 앞발을 걸치고 우리를 바라보는 진돗개도 만난다.

# 예습의 중요성

신촌교에서 표지판(장고개 6.2㎞)을 따라 길을 잡는다. 호반 농지 사이로 큰 길이 나 있다. 장계대교 쪽이다. 열심히 길을 따라 간다. 얕은 개울 징검다리도 건너며 즐겁게 여정을 시작한다. 그런데 길이 끊겼다. 여기가 아닌가? 그렇다. 길을 잘못 잡았다. 다시 리턴. 그러고 보니 신촌교 옆으로 길이 나 있다. 탑산이마을로 곧장 들어가는 포장길이 있다. 신촌교에서 표지판을 보고 내려오자마자 길이 있는데 미처 보지 못했다. 약 15분을 까먹었다. 물론 시간이 아깝지 않은 경험을 선사했기에 위안을 삼는다.

논길을 따라 조금 가면 여지없이 마을 보호수 느티나무가 눈에 들어온다. 탑산이마을이다. 인근에 현리사라는 절이 있었고 그곳에 탑(塔)이 있다고 해서 탑산이란 지명이 생겨났다고 한다. 현리사지(縣吏寺址)엔 1979년까지 탑이 있었다. 마을 뒷산인 용문재(용목재) 남쪽 산 정상엔 산성터도 남아 있다.

마을길 이곳저곳을 둘러보며 길을 걷는다. 뜨락(집 안팎 자투리 땅)에 조성된 아기자기한 꽃밭이 인상적이다. 인기척을 느꼈는지 진돗개 한 마리가 담벼락에 앞발을 걸쳐놓고 고개를 빼꼼히 내밀어 행인을 유심히 살핀다. 과수원길을 따라 탑산이마을 뒷산으로 조금 오르면 대청호 오백리길 표지판을 만난다. 장고개까지 4.6㎞다.

 

#.2 탑산이마을 뒷산 산행을 시작한다. 편한 임도다. 숲 속에서 시원한 물레방아도 만난다. 그런데 느낌이 싸- 하다. 이 길이 아닌가벼. 또 길을 잘못 들었다.

갈림길인데 방향이 애매·모호하다. 큰 길(임도)을 따라 산에 오른다. 구불구불 임도가 이어진다. 그래서 장고개구불길인가? 가는 길에 작은 사방댐도 만난다. 특이하게 물레방아가 설치돼 있다. 물레방아에서 떨어지는 물소리가 시원함을 선사한다. 임도를 따라 5㎞를 걸었다. 그런데 도무지 산 정상으로 난 길이 없다. 또 길을 잘못 들었다. 한 숨이 나온다. 다시 리턴. 10㎞, 2시간 30분을 허비했다. 두 번의 실수, 허탈하다. ‘장고개 4.6㎞’ 표지판 옆으로 길이 있는데 또 못 봤다. 다시 시작이다.

 

#.3 '코스' 를 따라 가도 길 찾기가 쉽지 않다. 가시덩굴을 헤치며 길을 만들어 나간다. 50여 분 고행길을 간 끝에 이정표를 만난다. 솔목이갈림길. 휴, 살 것 같다.

# 장고개 가는 길

아침 일찍 길을 잡았는데 벌써 해가 중천이다. 실수를 하지 않았다면 장고개에 도착하고도 남았을 시간인데 출발이라니. 이래서 예습이 중요하다고 새삼 깨닫는다. 지금까진 대청호 오백리길 트레킹이 진정한 휴가라고 생각했고 진짜 그랬는데 자만이 화를 불렀다. 말 그대로 고생길이 됐다.

‘멘붕’의 정신 상태를 추스르고 발걸음을 재촉한다. 그런데 그도 잠시, 산길에 들어섰는데 길이 없다. 산 위로 두 갈래, 세 갈래 길이 나 있지만 표지판이 없다. 당최 길을 모르겠다. 아니 길이라고 할 수 있는 길이 없다. 수풀이 우거져 길을 찾기가 쉽지 않다. 개망초, 일명 계란꽃이 흐드러지게 핀 곳으로 올라서면서 길을 살핀다. 수풀을 헤치고 길을 만들어 간다. 숲속으로 들어서자 이제야 오솔길이 보인다.

가쁜 숨을 몰아쉬어야 할 정도로 가파르다. 50분 정도 사투를 벌인 끝에 솔목이 갈림길 표지판을 만난다. 이제야 안심이 된다. 장고개를 향해 3.3㎞. 또 힘을 낸다. 1.5㎞ 정도 걸으니 화골 갈림길이다. 장고개까지 1.8㎞가 남았다고 알려준다. 여기서부턴 제법 큰 임도를 따라 걷는다. 나뭇잎이 자랄 대로 자라 임도는 터널을 이룬다. 간간이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이 피로를 말끔히 씻어준다.

장고개에 이르니 이제야 대청호반을 느낀다. 진걸선착장이 손에 잡힐 듯 가까이 있다. 9구간의 출발점(진걸선착장)에서 강 건너 보였던 곳에 선 거다. 진걸선착장 앞으로 크게 휘돌아 강줄기가 빠져나가는 모양새가 장관이다. 물론 대청호에선 흔한 풍경이지만 언제나 감회가 새롭다. 장고개에서 14구간 구간 종착지인 은운리까진 약 3㎞. 그런데 여기서부터 또 다른 시작이 펼쳐진다. 플러스 알파구간이 이어진다. 용호리로 가는 길이 있고 막지리로 가는 길이 있다. 시간이 없어 일단 용호리 가는 길은 다음을 기약한다.

#.4 편안한 임도를 따라 걷는다. 터널 같다. 드디어 장고개에 다다른다. 그제서야 대청호반 느낌을 느낀다. 9구간 출발지인 진걸선착장도 보인다. 막지리 가는 길, 손대창 선생의 효자문도 만난다.

# 막지리 가는 길

장고개에서 막지리 표시를 따라 하산한다. 2.5㎞를 왕복해야 한다. 여정 초반의 큰 실수 탓에 발걸음은 천근만근이다. 그래도 대청호반의 손짓을 외면할 순 없다. 시원스럽게 흐르는 금강, 대청호 물줄기를 따라 걷다 보면 장고개마을 비탈진 언덕배기에 허름한 옛 가옥이 한 채 서 있다. 집은 아니고 ‘효자문’이란 것인데 이곳 효자비의 주인은 손대창(1752년 출생)이다. 얼마나 효자였는지 글공부를 할 때 부모님이 뙤약볕에서 일하고 있음을 생각해 자신도 햇볕 아래서 공부를 했다는 설화가 전해진다.

장고개마을을 지나 호반에 다다르면 맥기마을이다. 정자 하나가 손님을 반긴다. 마을 앞에 펼쳐진 대청호가 장쾌하게 펼쳐진다. 올 봄부터 시작된 가뭄 탓에 물이 많이 빠져 잡초가 많이 자랐는데 그 초록 물결이 호수와 어우러져 보는 이의 마음에 안식을 준다. 마을 이장님 댁에서 도란도란 이야기꽃을 피우니 해는 뉘엿뉘엿 서산으로 저물어 간다. 바람은 이내 잦아들고 평온해진 호수는 또 하나의 산과 하늘을 만들어낸다.

#.5 막지리. 눈에 띄는 저 집. 막지리 이장님인 이대석 이장님의 집이다. 막지리 선착장의 풍경도 품는다. '신통방통한 녀석' 공기부양정 '막지호' 도 만난다.

호수 건너편 소정리를 오가며 바쁘게 주민들을 실어 날랐던 철선 한 척도 선착장에 의지해 쉼을 청한다. 지난 겨울 막지리 주민들의 교통편의를 위해 K-water가 지원한 수륙양용 공기부양정은 물 빠진 곳, 초지에서 ‘임무수행 대기 중’이다. 요놈 타고 용호리 선착장으로 가서 두 번째 플러스 알파 구간(14-2구간)을 시작하면 ‘딱’인데 희망사항일 뿐이다. 그냥 눈요기로만 만족한다. 평온한 호수를 뒤로하고 다시 장고개로 향한다. 소소한 호반의 모습을 눈에 새기며 발걸음의 무게를 애써 잊는다. 장고개부터 종점(은운리)까진 포장길이다. 과수원집에서 흘러나오는 뽕짝 장단에 발걸음을 맞추며 15구간의 여정을 접는다.

글·사진=이기준 기자 lkj@ggilbo.com

[14구간 이렇게 걸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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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지 속 섬, 막지리 장고개·맥기마을>

막지리(莫只里)는 원래 옥천군 안내면에 속해 있었지만 1973년 행정구역 개편 때 군북면에 편입됐다. 금강이라는 자연 경계를 놓고 보면 안내면에 있는 게 맞는데 실생활은 군북면에 속하는 게 편하다. 차를 타고 멀리 돌아가는 것보다 배 타고 강을 건너는 게 편리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뱃길이 막히면, 특히 겨울철 호수가 얼어버리면 낭패다. 옥천장을 볼 수가 없다. 그대로 고립되고 만다. 육로를 따라 먼 길을 돌아가는 것은 너무나 큰 수고로움이 뒤따른다. 대청호를 관리하는 K-water가 지난 겨울 막지리에 공기부양정을 제공한 것도 이 때문이다. 이젠 호수가 얼어도 스키 타듯 빙판 위를 날아갈 수 있다. 요즘은 요놈 한 번 타보려고 막지리를 찾는 사람들이 꽤 많이 늘었다고 한다.

# '자유인' 이대석 이장님

30여년 전 막지리에 정착한 대전 토박이
연극 영화 미술 사진까지 예술인
집 문패엔 쥔장 이름대신 '자유인'

공기부양정을 관리하는 막지리 이장은 대전 토박이다. 30여 년 전 이 마을에 들어와 이곳 사람이 다 됐다. 마을에서 이장님 집을 찾는 건 그리 어렵지 않다. 매우 특이한 모양새를 하고 있어서다. 돌벽에 돌지붕이 얹혀있다. 알고 보니 돌지붕은 FRP(유리섬유강화플라스틱)를 가공한 것이라고. 집 울타리는 제철을 만난 능소화와 딱 백일만 아름다운 붉은 꽃의 매력을 뽐낸다는 목백일홍(배롱나무 꽃, 백일홍과는 다른 것임)이 대신한다.

집 문패엔 쥔장 이름 대신 ‘자유인’이란 글자가 쓰여 있다. 집이라기보단 작업실이다. 이대석 이장은 예술인이다. 대전에서 처음으로 연극을 했고 서울에서 영화감독도 했다. 그러면서 틈틈이 그림도 그렸다. 지인의 손에 이끌려 이곳에 발을 디딘 첫 날, 막지리는 그의 제2의 고향이 됐다. 그날 바로 지금 집을 샀다. 숨 막히는 절경이 그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호연지기(浩然之氣)가 절로 생겼고 이곳에서 많은 영감도 얻었다. 요즘 대청호반에 둥지를 트는 예술인들이 많아졌는데 그 원조가 바로 이대석 이장이다.

이 이장이 이곳에 터를 잡았을 때만해도 마을엔 아이들 웃음소리가 제법 컸다. 아침이면 배 타고 학교 가는 아이들이 많았다는 얘기다. 그러나 대청댐이 생기면서 맥기마을은 수몰됐고 사람들은 고향을 떠나갔다. 지금은 약 10여 가구가 산기슭에 새 터를 잡고 맥기의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자유인’을 꿈꿨던 이 이장은 자연스럽게 마을에서 가장 젊은 사람이 됐고 그래서 이장이란 책무를 맡게 됐다.

말이 이장이지 마을 머슴이나 다름없다. 그의 손이 닿지 않으면 마을 농사일이 돌아가지 않는다. 농기계를 제대로 다룰 줄 아는 사람이 이제 이 마을엔 그리 많지 않다. 마을에 처음 들어왔을 땐 텃새도 심했지만 욕심 없는 그의 진정성이 마을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지금도 이 이장은 집(작업실) 한 채를 산 것 말고는 마을 땅 한 평도 소유하지 않았다. 마음 비우고 농사일 하며 인생을 배우고 그 깨달음을 화폭에 담는다.

막지리 선착장 풍경. 지친 심신을 위로해준다.

막지리의 이전 이름은 맥계(麥溪)였다. 우암 송시열의 입에서 나온 이름이다. 우암 선생이 이곳을 지나다 금강변에서 일렁이는 보리밭을 보고 이렇게 부른 이후 자연스럽게 지명이 됐다. 시간이 지나면서 음운이 변화돼 맥기가 됐고 일제 때 한자화 되면서 막지리가 됐다.
지명의 변화만큼 마을 생활상도 많이 변했다. 1000명에 가까운 주민이 북적였던 옛 영화는 온데간데 없고 이제 새로운 사람들이 이 마을의 새로운 역사를 쓰고 있다. 나룻배가 아닌 공기부양정이 다니는 시대이니 말 다했다.
이기준 기자 lkj@gg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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