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 냉천버스종점→ 마산동삼거리 (12㎞ / 6시간)

0. 들머리 (프롤로그) ; 1년 여정의 시작
1. 1구간 (두메마을길) : 길 위의 호수
2. 2구간 (찬샘마을길) : 백제 눈물의 수묵화
3. 3구간 (호반열녀길) : 절경이 들려주는 옛 이야기
4. 10구간 (며느리눈물길) : 금강, 그 광야

 

[대청호오백리길 3구간]

절경이 들려주는 옛 이야기

사람이나 동물 또는 자동차 따위가 지나갈 수 있게 땅 위에 낸 일정한 너비의 공간, 바로 집을 나서면 사방팔방 뻗어있는 길이다. 그런데 이런 교통인프라로서의 길은 언제부턴가 철학적 개념이 더해져 ‘방법’을 의미하는 것으로 의미가 확장됐다. ‘문제를 해결할 길이 없을까?’라고 말하는 식이다. 이렇게 길은 물질적 개념에 관념적 개념을 더해 의미의 확장을 이뤘고 요즘은 이 길이 인생에 비유되기도 한다. 가수 최희준은 대중가요 하숙생을 부르면서 ‘인생은 나그네 길’이라고 했다.

길 자체가 인생이라면 어떤 길을 어떻게 걷느냐가 인생에선 매우 중요한 선택이다. 물론 정답은 없다. 길을 선택한 사람의 몫이고 그 길에서 무엇을 얻었느냐가 중요할 뿐이다. 잘 닦인 대로를 걷든, 작은 시골마을의 꼬불꼬불 고샅길을 걷든, 비가 내려 질퍽질퍽한 진창길을 걷든, 운 좋게 만난 지름길을 걷든 모두 다 하나의 인생이다.

◆ 길에서 인생의 깊이를 가늠하다

길에서 인생을 느끼고 배우는 마음으로 다시 대청호 오백리길에 섰다. 대청호물문화관에서 두메마을과 찬샘마을을 거쳐 냉천골 버스종점에서 다시 힘차게 발을 내딛는다. 이제 3구간이다. 이 구간엔 마산동산성이 주요 포인트로 포함돼 있었는데 길이 아직은 험해 최근 새로운 구간으로 재편됐다. 사슴골 입구에서 마산동산성 가는 길로 빠지지 않고 곧장 마산동삼거리로 직진(관동묘려, 미륵원)하는 코스다. 그런데 3구간에서 마산동산성을 빼놓으면 뭔가 허전할 것 같아 변경 전 코스를 걷기로 했다.

3구간은 냉천버스 종점-사슴골 입구-마산동산성-고흥 류씨 묘소-관동묘려-미륵원-냉천길 삼거리-말뫼(마산동 삼거리)로 이어지는 12㎞ 구간이다. 쉬엄쉬엄 보통 걸음으로 6시간 정도 소요된다. ‘청풍명월’, ‘충절의 고향’, ‘인심 좋은 고장’이라는 수식어가 왜 ‘대전’을 상징하는 키워드가 됐는지 이 구간에서 모두 이해할 수 있다.

뭍이었다면 산골짜기였을 이곳, 이젠 물을 담아 나무를 적시고 있다. 나무줄기만 호수 위에 피어나 신비로움을 자아낸다. 산골짜기를 따라 층층이 쌓인 논과 밭은 애환 속에서도 삶을 일구려는 끈질긴 생명력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사슴골 입구로 향하는 길은 길게 뻗은 아스팔트길이다. 다소 지루함이 느껴질 찰나, ‘사진 찍기 좋은 명소 0.8㎞’라는 푯말이 발길을 붙잡는다. 살포시 쌓인 눈길에 첫 발자국이 오롯이 새겨진다. 푯말 그대로 이곳은 멋진 풍광을 선사한다. 나지막한 언덕 위에 올라서면 청풍명월(淸風明月) 대청호반이 시야 가득 들어온다. 인생에 있어 ‘행운’ 같은 곳이다.

다시 길을 잡는다. 앞만 보고 향해 온 길, 그 길을 되돌아 본다. ‘내가 걸어온 길인가’ 싶을 정도로 생소하다. 놓친 것들이 너무나 많다. 인생을 되돌아보며 후회하는 것처럼. 그래도 다시 되돌아갈 수는 없기에 ‘현재에 충실하라’는 격언을 되새긴다. 시행착오를 겪지 말자고 마음을 다잡는다. 여전히 아스팔트길이라 심심하다. 그래도 하늘을 닮은 대청호는 바람에 흐늘거리는 갈대·억새와 하모니를 이루며 기쁨을 선사한다. 시점에 따라 변하는 산, 아니 섬의 향연이 마냥 신비롭다.

 

◆ 인생과 역사의 아이러니

사슴골 입구. 이제 2.5㎞를 걸었다. 마산동산성을 넘어야 한다. 대전시 기념물 제30호 마산동산성. 해발 220m 봉우리에 쌓인 테뫼식 석축산성이라는 걸 보니 아마도 백제인이 만들었나보다.

당초 3구간이 왜 변경됐는지 이제야 알았다. 가파른 데다 산불이 있었는지 검게 그을린 고목들이 여기저기 쓰러져 있어 험하다. 머리도 조심해야 하고 발 디딤도 조심해야 한다. 그래도 단숨에 산성에 올랐다. 2구간의 노고산성·성치산성처럼 역시 와르르 무너진 돌덩어리들이 백제인의 한(恨)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삼한통일’ 대업을 향한 치열한 전투의 순간, 긴장감이 가득했을 이곳은 이제 평화로운 힐링(healing)의 장소가 됐다. 시간, 역사는 흐르고 또 흐른다. 봄이면 이곳에 진달래꽃이 무성하다는데 이 검은 땅에서도 다시 꽃이 피겠지?

오르막 만큼이나 내리막도 가파르다. 조심조심 발을 디뎌야 안전하게 산을 내려올 수 있다. 길고 곧게 뻗은 소나무숲이 펼쳐진다. 바람이 숲에 부딪치는 소리가 요란하다. 옛 병사들의 함성 소리마냥. 하산하면 곧장 관동묘려로 갈 수 있지만 대청호반을 더 가까이 느끼기로 했다. 그래서 또 마산동반도의 끝을 향해 직진. 호수와 뭍이 만나는 곳은 언제나 신선한 감동을 준다. 길을 개척한 성취감도 솟구쳐 오른다. 이렇게 두 번을 원래 코스에서 이탈해 대청호반을 더 가까이서 느끼며 함께 호흡했다. 그러면서 알게 됐다. 이곳이 항상 새로운 이유를.

◆ 호반열녀길 탄생의 배경

사슴골에서 오솔길을 탄다. 조금 걸으니 곧바로 심상치 않은 묘소를 발견하게 된다. 고흥 류씨 묘소다. 3구간을 호반열녀길로 명명하게 한 그 분이 모셔진 곳이다. 고흥 류씨(柳氏, 1371∼1452년)의 남편은 당시 포은 정몽주, 목은 이색 등과 함께 명망가로 평가 받은 송명의(宋明誼)의 아들 송극기(宋克己)다. ‘충절의 고향’ 충청도를 있게 한, 대전의 역사에서 아마도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이후 우암 송시열(1607∼1689년)이라는 걸출한 인물을 배출한 은진 송씨 집안이다.

열녀 고흥 류씨 부인 묘소

그런데 고흥 류씨는 왜 열녀일까? 기록은 이렇게 전한다. 송극기는 젊은 나이에 성균관 진사로 선발돼 개성에 살았는데 단명하고 만다. 당시 외아들이 있었는데 그의 나이 4살 때였다. 류씨의 시부모는 관례에 따라 스물 둘의 나이에 청상과부가 된 류씨를 개가시키려고 했는데 이 소식을 접한 류씨는 아들을 업고 시부모가 있는 회덕으로 오백리길을 달려왔다. 시부모는 그러나 삼종의 도(三從之道, 여자가 어려선 아버지를 따르고 혼인하면 남편을 따르고 남편이 죽으면 아들을 따르라)에 어긋난다며 류씨를 나무랐다. 류씨는 울며 말했다. “지금 저의 삼종지도는 이 아이에게 있지 않습니까.” 그러면서 류씨는 3일을 떠나지 않고 자리를 지켰다. 시부모는 감명을 받았고 류씨를 받아들였다. 이후 류씨는 시부모를 극진히 모시고 아들을 훌륭히 키웠다. 그 아들이 바로 쌍청당 송유다.

관동묘려

고흥 류씨 묘소에서 내려오면 송유가 어머니 장례를 치르고 만든 재실인 관동묘려(寬洞墓廬, 관동(마을이름)에 있는 묘를 돌보는 집)가 있고 은진 송씨의 회덕 입향시조인 송명의 선생 유허비 등 은진 송씨 유적이 한데 모여 있다. 송명의가 처가가 있는 회덕으로 낙향하면서 은진 송씨는 회덕 송씨로도 불린다.

고흥 류씨의 한 많은 삶을 뒤로 하고 다음 목적지로 향한다. 대전의 또 다른 뿌리를 만날 수 있는 미륵원지(彌勒院址)다. 대전지역 최초의 곳이고 어쩌면 우리나라 최초의 여관이라는 타이틀이 붙을 수도 있는 곳이다. 이 지역 유력 가문이었던 회덕 황씨가 3대에 걸쳐 나그네에게 선행을 베푼 곳에서 마지막 휴식을 찾는다. 이곳을 지키고 있는 회덕 황씨 가문의 종부 할머니로부터 옛 이야기를 들으면서 말이다.
글=이기준 기자 lkj@ggilbo.com 사진=이승훈 기자 

 

미륵원 건물 가운데 유일하게 남은 남루.

[미륵원의 베푸는 삶] 후손들 마음씨도 미륵보살 같았다

대청호 오백리길 3구간의 막바지는 미륵원지(彌勒院地)가 장식한다. 말 그대로 미륵원이 있었던 터다. 이곳은 예전엔 영호남에서 한양으로 가는 큰 길이 있었던 곳이다. 지금의 대전이 그렇듯 옛날에도 교통의 요지였다. 경부선과 호남선이 만나는 곳에서 불과 10㎞도 안 되는 거리다.

미륵원지 종부 육애숙 할머니가 귤을 까주며 미륵원의 내력을 설명하고 있다.

이곳엔 아직 미륵원을 세운 황윤보(회덕 황씨의 시조)의 13대손 황경식 씨 부부가 살고 있다. 종부인 토끼띠 육애숙 씨와 함께 미륵원 건물 가운데 유일하게 남은 남루(南樓)를 지키고 있다. 대청호 오백리길이 유명세를 타면서 미륵원의 존재가 많이 알려졌고 그래서 사람들이 많이 찾는다. 그래도 귀찮거나 싫은 내색 없이 손님을 반긴다. 시조가 그랬듯 누추하지만 손님을 맞이하는 마음씨가 미륵보살님과 같다. 불가에선 석가의 다음으로 부처가 되리라는 예언(수기(受記))을 받은 보살을 미륵불이라고 하는데 이와 일맥상통한다. 그래서 황윤보가 이곳을 미륵원이라 했는지 모르겠다.

미륵원은 고려 말 공민왕 때 황윤보가 벼슬을 그만 두고 낙향해 건립한 일종의 여관이다. 당시엔 역(驛)·원(院) 제도가 있어 공공관리들이 이용할 수 있는 여관이 있었지만 일반 나그네들에겐 허락되지 않았고 그래서 미륵원은 이들에게 유용한 휴식처가 됐다. 비바람을 피하게 하고 먹을 것을 베풀 뿐만 아니라 아픈 이는 치료도 해주는 의료·복지기관의 역할까지 했다고 한다.

미륵원에 대해선 황윤보의 아들 황연기와 그의 아들 황수에 이르기까지 3대에 걸쳐 봉사한 기록이 전해진다. 여말삼은(麗末三隱)의 한 명인 목은 이색이 기록한 회덕현 미륵원남루기(彌勒院南樓記)에 말이다. 황수는 남매를 뒀는데 그 사위가 은진 송씨 회덕 입향조인 송명의다. 학덕이 높아 조선 중기 문묘에 배향된 송준길·송시열의 직계 선조이기도 하다. 여기가 바로 당대 최고의 가문이었던 은진 송씨와 회덕 황씨의 교차점이다. 미륵원남루기는 이 황수의 요청에 의해 이뤄졌는데 당시 역사를 기록하던 이색은 이렇게 썼다. ‘미륵원을 세워 바람과 비를 막게 하고 누각을 세워서 화염과 같은 열기를 피하게 하며 탕을 주어서 얼어붙은 배를 따뜻하게 해주고 채소로 구미를 돋워 주니 행려자가 황씨의 혜택을 받음이 많다. 황씨 부자가 사랑하고 효도하고 우애하고 공경해 남에게 널리 베푸는 것이 이와 같으니 이는 사관(史官)이 마땅히 기록할 바다. 이 소식을 들을 때 영사사(領史事)인 내가 서둘러서 이를 기록한다.’ 그러면서 이색은 ‘好施者 仁人長者之事也(호시자 인인장자지사야)’라고 하며 선행을 칭송했다. ‘베풀기를 좋아하는 것은 어진 사람, 큰 덕이 있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라는 의미다. 하륜, 변계량, 정인지, 송시열 등 당대 내로라는 인물들이 남긴 제영기(題詠記)들은 미륵원의 위상을 짐작케 한다. 현재 남아 있는 미륵원 남루에 들어가면 미륵원남루기부터 다양한 제영기를 볼 수 있다.

대청댐 건설과 맞물려 시작된 발굴조사(1977년 충남대 조사팀)에서 이 터가 발견됐고 여기선 적어도 3채 이상의 건물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됐다. 대청댐 완공으로 물이 차오르자 후손들이 남아 있던 남루 일부 자재만 갖고 현재의 위치로 이축했다. 단층을 정(亭)이라 하고 2층 이상의 휴식공간을 루(樓)라고 했으니 아마도 원래 남루는 2층으로 지어졌지 않을까 싶다.

그런데 하나 아쉬움이 남는다. 후손들 역시 크게 욕심내지 않고 ‘나눔의 삶’을 살았고 그래서 대전을 인심 좋은 고장으로 만들었는데 지금 이들의 거처는 너무 초라하다. 지금도 나무장작으로 아궁이에 불을 때고 생활한다. 남루 나무문은 금방 떨어져 나갈 것 같다. 닭이 알을 낳는 지푸라기 주머니나 처마 밑에 주렁주렁 매달린 옥수수나 모두 시골정취를 느낄 수 있어 좋다고 할지 몰라도 이곳 황씨 부부의 생활은 고향이 수몰된 아픔보다 더 큰 아픔을 안고 살아가고 있는지 모른다. 나눔의 미덕을 배우러 온 수많은 사람들이 되레 부정적 인식만 떠안고 발길을 돌릴지도 모르겠다.
글·사진=이기준 기자 lkj@ggilbo.com

[3구간 경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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