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말 선초 부사정 지낸 송유선생이 지은 별당

박팽년과 안평대군의 시·기문 고스란히 남아

조선초 건축양식 잘 보존한 대전의 문화유적

충청도 회덕현은 사방이 30리에 이르지 못할 만큼 작은 고을이었지만, 우암 송시열을 비롯하여 수많은 고관대작을 배출한 고을로 명성과 함께 회덕현의 은진 송씨는 회덕 송씨라고 할 만큼 번성했다.
신라의 삼국통일 이래 역대 왕조에서는 각 고을마다 중심으로 삼는 진산(鎭山)을 하나씩 정했는데, 회덕현의 진산은 계족산(423m)이었다. 계족산은 지금은 대전시 동구와 대덕구의 둘레 산이 되었지만, 산세가 마치 항아리 같다고 해서 삼국시대에는 ‘옹산(甕山)’이라고 부르다가 신라의 삼국통일 이후 산줄기가 닭의 발과 비슷하게 갈라졌다고 해서 계족산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계족산이란 지명은 고려사, 세종실록 지리지 회덕현조에도 기록되어 있으나, 원래는 봉황산(鳳凰山)이라고 부르던 것을 봉황산 밑에 은진 송씨가 정착한 후 과거급제자가 많이 나오자 이것을 시기한 사람들이 봉황산을 격하시켜서 계족산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고도 한다.

대전 대덕구 중리동 소재 쌍청당.
아무튼 산세가 북에서 남으로 쇠스랑처럼 몇 개가 ‘물(勿)’자 꼴로 뻗어 내린 계족산 동쪽은 삼남지방에서 한양으로 가는 중요한 길목이었으나 대청댐 건설로 대부분이 수몰되어 버렸고, 서쪽의 비래동, 가양동, 송촌동, 읍내동 일대는 대도시로 성장한 한밭 대전에 편승해서 크게 발전했지만, 북쪽 계곡인 장동 일대는 개발제한구역으로 묶여서 옛 모습 그대로이다(2013.05. 15. 계족산 황톳길 참조).
송촌동은 고려 말 이래 은진 송씨가 살던 집성촌으로서 윗중리, 백달리(또는 배달촌), 하송촌이라고 불렀는데, 은진 송씨가 회덕현 배달촌에 정착하게 된 것은 송대원의 증손으로서 고려 공민왕 때 문과에 급제하여 교남안찰사, 사헌부집단(司憲府 執端; 종5품)등을 역임하면서 정몽주·이색 등 당대의 명망가와 같은 평가를 받은 송명의(宋明誼)가 처가인 회덕현의 명문인 회덕 황씨 마을에 정착한 뒤부터이다.
그러나 은진 송씨가 ‘회덕 송씨’라고 할 만큼 크게 번성한 것은 송명의의 손자인 쌍청당 송유(雙淸堂 宋愉; 1389∼1446) 때부터여서 은진 송씨 종중에서는 송명의를 입향조, 송명의의 손자 송유를 중시조로 모시고 있다.

중리동 네거리에서 선비마을로 통하는 선비마을길에서 대덕구청소년수련원 뒤 골목 주택가에 쌍청당은 여말 선초 학자로서 부사정(副司正)을 지낸 송유가 48세 때인 조선 세종 14년(1432)에 낙향후 지은 별당이다. 쌍청당이란 당호는 평소 송유와 교분이 두터웠던 난계 박연(蘭溪 朴堧; 1378~1458)이 ‘천지간에 바람과 달이 가장 밝은데……. 대개 연기와 구름이 사방에서 모여들어 천지가 침침하게 가려졌다가도 맑은 바람이 이것을 쓸어내고 밝은 달이 떠오르면 위아래가 투명하게 맑아져서 티끌만큼도 흐르러짐이 없게 된다’며, 청풍과 명월의 맑은 기상을 가슴에 새긴다는 의미로 지었다고 한다.
좁은 골목길을 지나 쌍청당 대문을 들어서면, 오른쪽에 근래 복원한 정자 봉무정(鳳舞亭)이 있고, 그 옆에 우물이 있다. 보문산의 옛 이름이 봉무산이니, 지금은 높은 건물들로 가로막혀서 보이지 않지만, 쌍청당은 이곳에 올라 멀리 아름다운 보문산의 정경을 감상하였으리라.
하지만, 왜 터를 잡고 사는 회덕현의 주산 봉황산을 향하지 않았을까?
아무튼 왼편에는 후손이 거주하는 고택인데, 회은당(懷恩堂)이란 편액이 눈길을 끈다.

쌍청당재실 입구.
회은당 건물을 뒤로 돌아가면 쌍청당이 있는데, 쌍청당은 화강암으로 쌓은 기단 위에 정면 3칸, 옆면 2칸의 남서향 건물로서 오른쪽 2칸은 대청마루이고, 왼쪽 1칸은 온돌방이다.
또, 북쪽으로 반 칸짜리 달림채를 두고, 윗부분은 반침(半寢)으로, 아래는 함실로 사용하였는데, 홑처마와 팔작지붕을 네모기둥으로 받친 대청 전면에는 여살 문이, 뒷면에는 쌍여닫이 판장문이 달려 있는데, 한옥에서는 보기 드물게 단청을 했다.
쌍청당에는 난계 박연(蘭溪 朴堧; 1378~1458)의 제(題), 박팽년과 안평대군의 시와 기문, 선원 김상용(仙源 金尙容; 1561∼1637)의 쌍청당서액 등이 있어서 쌍청당의 고고한 인품을 엿볼 수 있다. 특히 사육신중 한분인 박팽년(1417~1456)은 지금의 가양동인 회덕현 흥농촌 왕대벌 출신으로서 그가 지은 쌍청당기는 매우 상세해서 많은 도움이 되는데, 박팽년은 이곳이 회덕현 백달리였음과 함께 사당의 동쪽에 따로 7칸의 쌍청당을 세워 중간을 온돌로 만들어서 겨울에는 춥지 않게 하고, 오른편 3칸은 여름에 터서 대청으로 시원하게 지내도록 하고, 왼편 3칸을 터서 부엌, 욕실, 제기 등을 저장하는 곳으로 했고, 아담하게 단청하고 담장을 둘렀지만 화려해도 사치스럽지 않았다고 적었다(2013.01.30. 박팽년 유허지 참조).
또, 쌍청당이란 당호도 난계 박연이 쌍청이라 하였음을 밝히고 있는데, 박연은 세종 때 충청도 영동 출신으로서 거문고를 만든 고구려의 왕산악, 가야금을 만든 신라 우륵과 함께 우리나라 3대 악성 중 한분이다. 그밖에 세종의 아들로서 수양대군의 찬탈과정에서 처형된 안평대군도 기문을 남겼다.

회은당 전경.
고려 창왕 원년(1389)에 진사 송극기(宋克己)와 고흥 유씨(柳氏; 1371~1352) 사이에서 태어난 쌍청당 송유는 4살 때 아버지가 죽자, 당시 고려 서울 개경의 친정에서 살고 있던 22살의 젊은 과부 고흥 유씨는 부모가 개가시키려고 하는 사실을 알고 시부모가 사는 회덕으로 내려왔다고 한다. 송씨 가문에서는 고흥 유씨 사후에 그녀를 열녀로서 정려를 세워주었는데, 대청호변인 추동에 은진 송씨의 회덕 입향시조인 송명의의 유허비, 고흥 유씨 묘소, 그리고 은진 송씨 재실인 관동묘려(대전시문화재자료 제37호)가 있다(2013. 02.06. 미륵원지 참조).
송유는 벼슬이 호분위(虎賁衛)·부사정(副司正)에 올랐으나, 23살 때 태조의 계비인 신덕왕후 강씨(康氏)가 죽었음에도 태조 묘에 모셔지지 않는 것을 보고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여 학문에 몰두했다.
44세 되던 세종 14년(1432) 집 동쪽에 사당을 짓고, 집 서쪽에 가묘를 두고 제사를 지내기 시작했는데, 사당 동쪽에 별도로 7칸짜리 집을 지어 학문을 연구하던 곳이 쌍청당이다.
쌍청당은 건립이후 1524년(중종 19), 1563년(명종 18), 정유재란이 발생한 1597년(선조 30)에 소실된 것을 대대적으로 보수하고, 1616년(광해군 8), 1708년(숙종 34), 1888년(고종 25), 1937년 등 7차에 걸쳐 중수되었지만, 조선 초기 건물로서 원형을 가장 잘 보존하고 있다고 평가받고 있다.
특히 민가임에도 불구하고 단청이 되어 있는 것이 가장 두드러진 특징인데, 당시 단청의 원료는 전부 중국에서 수입해왔기에 값이 매우 고가여서 세종은 1429년 민가에서 단청하는 것을 금지하기도 했지만, 여러 번의 보수와 개축을 하면서도 단청을 계속할 수 있은 것은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3년 동안은 아버지의 도를 고치지 않아야 효라고 할 수 있다는 공자의 예를 따른 것이라고 한다. 쌍청당은 대전 지역에 현존하는 최고 한옥건축물이다(대전시유형문화재 제2호).

저작권자 © 금강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