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말 황윤보 낙향하여 건립 조선시대 후손들이 비영리 운영

1980년 초 대청댐 준공 후 수몰 ··· 부속건물 '남루' 1980년에 복원

여말선초 사농공상의 신분제 사회에서 호족이 3대에 걸쳐 아무런 인연도 없는 사람에게 선행을 베푼다는 것은 민주주의와 인권을 강조하는 현대사회에서도 귀감이 된다고 할 수 있는 일인데, 우리 역사에서 가진 자가 보여주는 그런 대표적인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의 유적이 대청호변에 남아있다.
대전에서 옥천으로 통하는 4번국도 중 식장산 입구인 동신 고등학교 삼거리에서 좌회전하면 대청호로 가는 길인데, 산길을 넘어 약5km쯤 들어가면 왼편에 큰뫼골, 시골집 등 대형 간판을 세운 음식점들이 있고, 오른편에는 미륵원지, 마산동산성 입구를 알리는 안내판이 있는 마산동삼거리가 있다. 이곳에서 대청호 쪽으로 좁은 시멘트 농로를 약1.8㎞쯤 가면 다시 왼편으로 마산동산성과 냉천골로 가고, 직진하면 미륵원지와 은진 송씨 쌍청당(雙淸堂) 송유(宋愉: 1389∼1446)의 어머니 고흥 유씨 묘소와 재실인 관동묘려(寬洞墓廬; 대전시문화재자료 제37호)로 가는 삼거리가 있는데, 관동묘려를 알리는 작은 비석과 정자가 있는 오른쪽 길을 고르면 미륵원지가 있다(대전시기념물 제41호).

미륵원이 잠긴 대청호.
조선의 기본법전인 경국대전(工典 院宇編)은 도로는 매 10리마다 팬 곳을 메우기 위하여 자갈을 쌓아두는 적치장인 소후(小堠), 매 30리마다 대후(大堠)를 설치하고, 각 후에는 반드시 장승을 세우고 거리숫자와 지명을 새기도록 했으며, 그밖에도 매 5리마다 정자를 짓거나 30리마다 버드나무를 심도록 했다(2012.08.08. 천안삼거리 참조). 그리고 고려 원종 15년(1274) 관리들이 역참에 묵을 수 있는 출장증명서 격인 초료(草料), 일정한 숫자의 말을 이용할 수 있는 마패제를 원나라에서 도입했는데, 조선시대에는 더욱 확대하여 공공여관인 원(院), 말과 함께 묵을 수 있는 역(驛)을 설치했지만, 일반 나그네들은 묵을 수 있는 시설이 크게 부족했다.
조선 성종 때 펴낸 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충청도 회덕현은 동으로 옥천군(沃川郡) 경계까지 22리, 남쪽으로 전라도 진산군(珍山郡) 경계까지 30리, 서쪽으로 공주(公州) 경계까지 9리, 북쪽으로는 문의현(文義縣) 경계까지 29리이고, 서울은 320리라고 하는데, 회덕현에는 지금의 유성구 전민동 부근에 정민역(貞民驛) 1개, 원은 회덕현에 5개, 진잠현에 2개가 있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정확한 위치가 밝혀진 것은 미륵원 한곳뿐이다.

회덕현 동쪽 24리에 있는 미륵원은 삼국시대 영호남에서 금강을 건너 한양으로 가는 대로변에 위치하여 사람들은 미륵원을 지나 대덕구 황호동에 이르러 금강을 건너는 교통의 중심지로서 옛 대덕군 동면 소재지로서 지서와 의원, 학교 등이 있었으나, 1980년 초 대청댐 준공후 수몰되면서 지금의 장소로 이축했다. 원래는 굴파원(屈坡院)이라 했던 것을 고려 공민왕 7년(1374) 호부전서를 역임한 황윤보(黃允寶)가 낙향한 뒤 나그네들이 묵고 갈 수 있는 사설여관을 확대하면서 미륵원이라 개칭했다고 하는데, 훗날 회덕 황씨 집안과 혼인하여 인연을 맺은 은진 송씨 가승(家乘) 제7권에 ‘굴파원은 귀래원(歸來院)이라고도 한다’고 기록하고 있다.

미륵원지 표지석(왼쪽)과 미륵원 남루.
미륵원지 입구에는 콘크리트 대문 기둥 양쪽에 ‘회덕황씨 재실’임과 ‘미륵원지’임을 밝히는 글씨가 음각되어 있고, 왼편에는 미륵원지 유래비와 문화재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철문 안으로 들어서면 왼쪽 약간 높은 비탈에 회덕 황씨 선조추모비가 있고, 호숫가 있는 끄트머리에 농가 한 채가 있다.
평범한 여느 농가 대문에 회덕 황씨 재실임을 밝히는 ‘삼성문(三省門)’이라는 현판이 눈길을 끄는데, 재실은 살림집과 오른편의 행랑채 같은 건물 한 채가 전부다. 살림집에는 황윤보의 13대손이 살고 있고, 재실은 따로 짓지 못하고 오른편의 행랑채 같은 전면 4칸, 측면 2칸 규모의 겹처마 팔작지붕의 단층 남루(南樓) 건물을 재실로 이용하고 있다.
1977년 충남대 발굴조사팀의 미륵원지 조사보고서에 의하면 미륵원은 동서 90m, 남북 60m로 약 1670평에 이르는 대규모 건물이었으며, 남루도 동서 4.9m, 남북 3.5m 규모로 밝혀졌으나 건물 일부만 이축한 것이다. 남루는 비록 낡긴 했어도 단청된 기둥이며 대들보, 그리고 황금빛으로 칠한 지붕 기와가 옛 품위를 느끼게 하지만, 본래 단층인 휴식공간은 정(亭)이라 하고, 2층 이상의 건물을 루(樓)라고 하는데, 남루는 그 명칭이나 바람과 햇볕을 쐬기 위해서 사방의 문틀을 걸어두는 쇠고리가 매달려 있는 구조 등으로 보아 2층 건물임이 분명한데도 아래층 숙박시설은 복원하지 못하고 2층 부분만 옮긴 것 같아서 아쉽기만 하다.

회덕 황씨의 선행이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은 여말삼은(三隱) 중 1인인 목은 이색(李穡)이 그의 회덕현 미륵원남루기(懷德縣 彌勒院南樓記)에서 회덕 황씨의 시조인 황윤보의 아들 황연기(黃衍記; 1332~1351)가 미륵원을 중건했으며, 나그네들에게 비바람을 가리고, 누각이 있어서 더위를 피할 수 있고, 탕(湯)을 제공하여 언 창자를 녹게 하며, 나물로 입맛을 도와주니 나그네들이 황씨의 혜택을 받음이 많으니 마땅히 사관(史官)이 기록할 일이다.”라고 기록한데 있다. 조선 태조 때 영의정을 역임한 하륜(河崙), 변계량, 정인지를 비롯하여 송시열 등이 찬한 제영기(題詠記)에도 선행이 기록되어 있다.
황연기는 1332년(충숙왕 복위 원년) 미륵원을 중건하고, 죽을 때 정(精)·수(粹)·립(粒)·종(粽) 등 네 아들에게 조상의 유업을 계승하라는 유언을 남겼는데, 황연기의 둘째아들 황수는 수안군수로 있을 때 조선이 개국되자 불사이군으로 벼슬을 버리고 은둔한 두문동 72현 중 일인으로서 후에 대제학에 추증되었고, 사위 송명의(宋明誼)가 이곳에 정착하여 은진 송씨가 회덕에 뿌리를 내리는 계기가 된다.
황수의 아들 황자후(黃子厚; 1363~ 1440)는 태종 때 음직으로 출사하여 공주목사, 충청감사를 역임하고, 호조참의·지중추부사·한성판윤, 이조판서 등을 역임했으며, 세종 때 혜의공(惠義公) 시호를 추증 받은 인물로서 1381년 미륵원을 확장하여 동쪽과 서쪽에 각각 집을 지어서 남자와 여자의 숙소를 따로 만들고, 그 앞에 우물을 파서 지나가는 나그네들이 시원한 물을 마시고, 남루(南樓)에 올라 잠시 더위를 식힐 수 있게 해주었다. 또, 황자후의 아들인 황유는 태종의 11녀인 숙안 옹주와 혼인하여 회천군이 되었다.

재실 현판(왼쪽)과 미륵원지 입구.
훗날 회덕 황씨의 중시조이자 회천군(懷川君)에 봉해진 황윤보가 교통의 요지였던 회덕현에 미륵원을 세우고 나그네들에게 식사를 제공하고, 하룻밤을 묵을 수 있는 선행을 베풀게 된 것은 그가 상당한 재력가였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그가 왜 이곳을 낙향지로 삼았으며, 또 미륵원이라는 불교식 명칭을 붙이고 운영하였는지에 관해서는 알려진 것이 없다. 또, 황윤보에서 시작된 선행이 5대에 걸쳐 이어졌다는 사실은 단순히 재력을 가졌다는 이유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귀감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회덕 황씨 종중에서는 미륵원지를 문화재로 지정해 줄 것을 원하고 있으나 당국에서는 원래의 건물이 아니라는 이유로 받아들이지 않고 있는데, 미륵원은 대전 지방에 있던 7개 원(院) 중 가장 오래되고 유명하고, 또 그 유적지를 파악할 수 있는 유일한 곳이라는 점에서 중요성이 있다. 또, 600년 전 충청지방에 뿌리내린 회덕 황씨의 오랜 선행은 이기주의가 팽배한 현대사회에서 모두가 반성해야 할 귀감이어서 미륵원지의 대대적인 복원과 홍보가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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