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청호오백리길 13구간] 한반도길

반전을 꿈꾸는 그대에게

 

언 땅이 서서히 녹으면서 생기가 돋아난다. 꽃샘추위가 유독 기승을 부렸어도 끝내 봄은 오고야 말았다. 연중 가장 춥다는 1월부터 대청호 오백리길 21구간의 여정을 시작했다. 전체 구간의 4분의 1에 해당하는 5개 구간을 돌면서 겨울이라는 계절 하나를 보냈다. 겨울의 대청호반은 모든 것이 움츠러들어 한산하고 쓸쓸한 표정이었지만 억새와 갈대의 향연이 나름 운치를 선사했다. 12월에 눈·비가 제법 많이 내린 탓에 대청호의 풍부한 수량은 시린 가슴을 따뜻하게 채워주었다. 이제 꽃피는 봄, 대청호 오백리길은 우리에게 어떤 모습을 보여줄지 기대만발이다. 계절은 겨울에서 봄으로 한 고개를 넘어가고 대청호 오백리길의 여정도 이제 새롭게 봄옷으로 갈아입는다.

 

0. 들머리 (프롤로그) ; 1년 여정의 시작
1. 1구간 (두메마을길) : 길 위의 호수
2. 2구간 (찬샘마을길) : 백제 눈물의 수묵화
3. 3구간 (호반열녀길) : 절경이 들려주는 옛 이야기
4. 10구간 (며느리눈물길) : 금강, 그 광야
5. 17구간 (사향길) : 물결, 그 눈물
6. 13구간 (한반도길) : 반전을 꿈꾸는가

 

#. 향긋한 봄비를 맞으며

남서쪽에서 불어오는 따뜻한 바람이 겨우내 북서쪽에서 불어온 찬바람을 몰아낸다. 향긋한 봄바람이 봄비를 부르고 이 봄비는 싱그러운 기운을 온 세상에 내뿜는다. 이른 봄, 봄비와 함께 안개가 내려앉은 아침, 대청호 오백리길 13구간(한반도길)의 시작, 옥천군 안남면사무소 앞 배바우 잔디광장에 섰다. 이곳에 배처럼 생긴 바위가 있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그래서 마을 이름도 배바우마을이다. 봄비 때문일까. 여느 때와 달리 마음이 차분하다.

이곳 사람들은 이웃끼리 우애가 좋은가보다. 광장에 놓인 ‘화합의 상징 돌탑’을 보니 그렇다. 안남면 열두 마을에서 하나씩 가져온 주춧돌을 둥글게 놓고 그 위에 각 마을 사람 수만큼의 크고 작은 돌을 쌓아 노적가리 모양으로 탑을 세웠다. 일 년 열두 달, 십이지신의 보살핌을 기원하면서 돌탑을 세운 사람들. 그 애틋한 마음을 느끼니 발걸음이 가볍다.

안남면사무소 앞에서 북동쪽으로 가면 안내면 인포리고 남동쪽으로 가면 독락정이 나온다. ‘독락정 1.2㎞’ 표시를 따라 길을 잡는다. 안남천을 중심으로 펼쳐진 드넓은 농지엔 벌써 봄이 내려앉았다. 파릇파릇한 청보리와 밀이 봄내음을 물씬 풍긴다. 길가 텃밭에서 마늘 심는 할머니의 표정도 봄처럼 밝다. 역시 시골길은 은은한 안개가 살포시 내려앉은 모습이 제격이다.

졸졸졸 안남천을 따라 내려온 물이 금강과 만나는 지점, 그곳에 독락정(獨樂亭)이 있다. 1630년 초계 주씨 주몽득이 세웠다고 한다. 힘차게 내달려온 금강이 이곳 앞에서 U턴 하는 모양새가 감탄사를 자아낸다. 독락정에 모여 담론과 풍류를 즐겼을 옛 선비들의 기분이 고스란히 전해진다. U턴하는 금강 저 건너는 동이면 청마리 임야인데 그게 바로 그 유명한 ‘한반도 좌우반전 지형’이다. 독락정 앞에 농어촌공사 시설건물이 들어서 있어 아름다운 풍광을 가로막아 아주 큰 아쉬움이 남는다. 그래도 13구간에선 금강의 절묘한 U턴을 3번이나 만날 수 있다.

 

#. 절벽 사이 물길 따라 2㎞

독락정을 뒤로하고 고성마을로 향한다. 왼쪽엔 푸른 빛깔 금강이 유유히 흐르고 오른쪽엔 이 구간의 하이라이트인 둔주봉이 우뚝 솟아있다. 병풍처럼 둘러싼 산 사이로 흐르는 금강, 강폭이 제법 널찍하다. 조용하면서도 웅장하다. 그 속에서 우리는 겸손해지는 법을 배운다. 강 건너 청마리 땅에서 삶을 일구는 농가가 눈길을 사로잡는다. 그림 같은 풍경이다. 독락정에서 약 2㎞ 지점, 이곳에서 금강은 다시 한 번 크게 U턴한다. 옥천을 흐르는 금강은 감입곡류(嵌入曲流)의 결정판이라고 감히 말할 수 있다. 여기서 금정골까지 1㎞ 구간에선 금강의 초록 빛깔이 눈부시게 아름답다. 발걸음이 쉽사리 떨어지지 않을 정도다.

 

 

고성과 피실의 중간지점, 금정골에서 본격적으로 산행을 시작한다. 둔주봉까지 1.3㎞다. 산을 오르는 중간중간 뒤를 돌아보면 굽이치는 금강을 만날 수 있는데 그러면서 조금씩 숨을 돌린다. 둔주봉 정상은 384m, 그리 높지 않지만 사방이 확 트여 시선은 시원하다. 아침의 뿌연 안개도 조금씩 걷히고 하늘도 제 빛깔을 찾아간다. 그나마 다행이다. 조금 뒤 만나야 할 한반도 좌우반전 지형을 조금이나마 말끔한 모습으로 볼 수 있어서다. 그래서 둔주봉에서 시간을 좀 끌어본다.

 

둔주봉에서 피실 반대쪽으로 길을 잡는다. 이 구간의 첫 발을 뗀 안남면사무소 쪽이다. 산등성이를 타고 15분 정도 가면 둔주봉정(屯駐峯亭)이 나오는데 여기가 바로 한반도전망대다. 발밑에 바로 독락정이 있다. 금강길 따라 돌고 돌아 다시 그 자리. 발 디디고 서 있는 곳의 높이만 달라졌을 뿐이다. 그러고 보니 안남면사무소를 등지고 정면으로 바라보였던 산이 바로 이곳이다.

 

#. 한반도지형의 기막힌 좌우반전

역시 이름이 난 이유가 있다.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카메라를 손에 들고 이곳까지 찾아오는 이유가 다 있다. 자연이 새겨놓은 자연 그 자체에 매료되고 싶어서다. 속세에서 찌든 때를 조금이나마 씻어내려는 심산이다. 속세에서 얻은 근심·걱정을 조금이나마 덜어내려는 심산이다. 조금 순수해지고 깨끗해지는 희열을 맛보기 위해서다. 둔주봉정, 이곳은 그 목적을 이루기에 충분한 곳이다.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쾌감을 선사한다. 한반도지형의 기막힌 좌우반전이 있는 곳. 이곳은 그런 곳이다.

 

좌우반전된 한반도 지형 모습(왼쪽)을 다시 반전시킨 모습(오른쪽)과 함께 붙여놓으면 이런 모습이...

강원도 영월 선암마을의 한반도지형과 비교하면 이곳은 좌우가 바뀐 형태다. 나란히 옆에 놓으면 영락없는 데칼코마니다. 그래서 더 신기할 수도 있겠다. 그래서 더 이곳을 찾아오고 싶은지도 모르겠다. '한반도' 하면 가장 먼저 따라붙는 단어는 역시 '통일'일 게다. 북쪽으로 드넓게 펼쳐진 광야를 향해 힘차게 내달릴 꿈을 그리면서 말이다. ‘어서 빨리 통일이 됐으면…’ 하는 바람이 간절하지만 통일은 자꾸 멀어지는 느낌이다.

 

여기서 제대로 된 한반도지형을 보고 싶다면 둔주봉 정자 안에 달려있는 거울을 보면 된다.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은 똑같아서 잘 몰랐는데 거울에 비친 좌우반전 한반도지형을 보니 ‘아∼거울이 이런 거구나’ 새삼 알게 된다. 안개가 아직 걷히지 않아 시야가 썩 좋지는 않지만 구름 위에서 내려다본다고 생각하면 나름 또 다른 운치를 느끼게 된다.

#. 봄바람 살랑거리는 평온한 시골마을

한반도전망대에서 내려오면 점촌고개 삼거리가 나온다. 이정표를 보니 0.8㎞를 내려왔다. 

오른쪽으로 가면 안남면사무소, 왼쪽으로 가면 피실나루터라고 돼 있다. 공식루트는 왼쪽으로 길을 잡아야 하는데 오른쪽 길을 선택했다. 논·밭과 농사시설물을 구분 짓는 꼬불꼬불한 길이 인상적이다. 공식루트에 비해 약 30분 정도 거친 숲길을 지나쳐야 했지만 봄의 길목에 선 논·밭의 생동감을 느낄 수 있어 좋았다.

산을 하나 넘으면 관골이 나온다. 배나무 등이 자라는 밭과 논이 아름답게 어우러져 풍광이 좋다. 경치를 즐기며 임도와 농도를 따라 쭉 내려가면 575번 도로와 만나는데 이곳은 행정구역상 인포리에 속한다. 화인리와 걸포리가 합해져 생긴 이름이다. 고려때 화인리엔 출장 나온 관리가 머물 수 있는 화인원과 화인나루터가 있었다. 걸포리는 ‘갈대가 우거진 갯벌’이 있었다고 해서 갈포로 불렸다가 한자화 하면서 걸포리가 됐다.

 

포장된 도로가를 따라 조금 걸으면 37번 국도와 만난다. 국도를 따라 걷지 않고 대청호반으로 내려가면 자연 상태의 길이 나 있다. 그 길을 따라 걷는 게 좋다. 그게 안전하고 볼거리도 많다. 물이 얕아 초목이 수면 위로 드러나는데 해질녘 노을과 늪이 어우러진 모습이 아름답다. 한반도전망대에서 느낀 희열이 잊혀질 정도다. 13구간의 여정은 이렇게 안내면 현리 신촌교에서 마친다. 신촌교 옆에 조성된 안내습지공원에서 한 숨 돌려도 좋다. 아늑하니 괜찮다.

글=이기준 기자 lkj@ggilbo.com 사진=이기준·이승훈 기자

 

[오늘의 운세] 오랜 고난과 역경의 시간이 지나고 새싹과 밝은 빛이 대지를 비추리라.
봄비가 흩뿌리는 아침 길을 나선다.
오전에 갠다는 예보를 믿고 갈 길을 간다.
그런데 도무지 하늘이 맑아질 기세를 안 보인다.
이대로는 한반도 지형이 잘 안보일 것 같은데 ...
강변길을 걷고, 둔주봉을 넘으면서도 시야가 그리 맑지 않다.
한반도 지형은 안개 속에 잠겼다. 선명하지 않다.
그래도 이 곳은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쾌감을 선사한다.
한반도지형의 기막힌 좌우반전이 있는 곳.
다시 반전된 모습을 그려본다. 제대로 된 한반도의 모습.
좌우반전된 한반도 지형을 보며 '반전'을 생각한다.
현재보다 더 나으리란 꿈,
모두의 소망이 이뤄지리라는 꿈.
반전은 곧 꿈이고 미래다.
우리 삶도 그러한 것 아닌가.
지금은 흐리고 아파도, 새로운 해가 뜨면 더 맑은 날 오지 않던가.
그대, 반전을 꿈꾸는가.

 

[13구간 이렇게 걸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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