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북 청주 문의면 소전리, 후곡리, 가호리 (13㎞ / 6시간)

 

대청호오백리길 17구간 ]

출렁이는 물결, 물 속에 잠긴 고향의 눈물

저 아래 내 고향이 있소. 천렵 하고 미역감던 정겨운 내 고향이 있소.
그랬다. 나그네들에게는 아름다운 풍광 감탄하며 쉼을 얻는 곳이지만,
고향을 잃은 그들은 그리운 고향, 나의 고향 속으로 울음 삼키며
애달픈 망향가를 부르는 곳이었다. 대청호는.
물결, 그것은 물 속에 고향을 두고 온 사람들의 아픔이 가라앉아 출렁이는 눈물이었다.

 

0. 들머리 (프롤로그) ; 1년 여정의 시작
1. 1구간 (두메마을길) : 길 위의 호수
2. 2구간 (찬샘마을길) : 백제 눈물의 수묵화
3. 3구간 (호반열녀길) : 절경이 들려주는 옛 이야기
4. 10구간 (며느리눈물길) : 금강, 그 광야
5. 17구간 (사향길) : 물결, 그 눈물

 

후곡리 초입 고갯마루에 세워진 사향탑.

아! 조상 대대로 살아온 내 고향
서로를 귀히 여기고 언제나 정성을 다하여 정을 나누었던 내 고향 벌말이여
정답게 어울려 살아온 삶의 쉼터, 포근한 어버이 품속 같아라
아! 이곳에 잊지 못할 동심이 있었으니 꿈엔들 어이 잊으리오…(중략)
웃여울, 아랫여울에서 천렵하고 미역감던 우리들은 지금도 잊을 수 없는 마음의 고향!
나라를 위해 정다웠던 이웃들을 마음속에 묻고 뿔뿔이 흩어진 지 어언 16년
실향민들은 통일이 되면 고향을 찾겠지만 우리 수몰민들은 영원히 찾지 못할 수중이어라
이제는 한 줄의 글귀로 남아 역사 속에 남으니 아쉬운 여운만이 마음속에 남는구나

대청호 오백리길 17구간의 주제는 ‘고향을 그리워하는 마음’이다. 그래서 길 이름도 사향(思鄕)길이다. 청주시 문의면 후곡리 초입 고갯마루에 세워진 사향탑에 그 마음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 강촌에서 두메산골이 된 마을

17구간은 대청호 오백리길 21구간 가운데 유일하게 원점으로 회귀하는 코스다. 청주시 상당구 문의면 소전리삼거리 소전교에서 출발해 후곡리, 가호리까지 갔다가 다시 돌아오게 된다. 13㎞, 6시간이 소요된다. 산줄기를 타고 갔다가 마을길을 따라 돌아오든지 아니면 반대로 마을길을 걸어 땅끝까지 간 뒤 산길을 타고 돌아오면 된다. 

사향탑을 지난 뒤 산길 코스를 먼저 찾았던 일행. 그러나 산길을 찾지 못하고 다시 아스팔트로 내려섰다. 아스팔트-임도 코스를 먼저 가기로 했다.

우리 일행은 후자를 택했다. 안타깝게도 사향탑에서 산길을 찾지 못한 탓이다.

소전교는 대청호 오백리길 16·17·18구간이 만나는 지점이다. 16구간과 18구간이 쭉 한 길로 이어지는데 17구간이 끼어 있다. 16·18구간의 중간지점에서 대청호의 심장부를 향해 산줄기가 타고 들어가기 때문이다. 행정구역으로 치면 청주시 상당구 문의면 후곡리와 가호리다. 지도를 보면 17구간은 길게 뻗은 반도의 형태이기 때문에 어디를 둘러봐도 대청호를 볼 수 있다. 257봉-220봉-216봉-228봉으로 이어지는 산등성이를 타면 마치 큰 섬에 있는 듯한 기분이 든다.

소전교에서 1.3㎞ 정도 꼬불꼬불 포장길을 걷다 보면 사향탑이 나온다. 산골짜기 깊숙한 곳까지 물이 들어와 신비롭다. 깊은 계곡의 품에 안긴 대청호가 잔잔하게 일렁이며 쉬고 있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산 중턱에 길이 나 있어 하루 여섯 번 시내버스가 드나든다. 그 길을 따라 걷는다. 후곡길을 타고 가호리로 가는 길. 오른쪽으로 듬성듬성 인가가 펼쳐져 있고 그 앞에 하늘빛을 담은 파란 대청호가 놓여있다. 어느새 봄이 찾아와 호숫가 나무에선 파란 꽃망울이 돋아나고 있다. 옅은 갈색 빛이 대세였던 대청호에 푸른빛이 감돌기 시작했다. 마늘을 심는 촌부의 손길도 바쁘다.

사향탑에서 조금 더 가면 뒷골이 나온다. 앞골은 수몰됐고 뒷골만 남았다. 그래서 이름도 후곡이다. 대청호 오백리길 2구간(대전 성치산)에서 정면으로 바라보였던 곳이다. 호수 주변에 낙타의 등처럼 생긴 산봉우리들이 펼쳐져 이채롭다. 할머니 두 분이 마을회관 겸 경로당 앞 의자에 앉아 햇볕을 쬐고 있다. 북적북적했던 옛 기억은 희미해지고 이제는 몇 안 남은 이웃과 의지하며 여생을 살고 있다. 예전엔 금강변 평지에 살았지만 대청댐에 막혀 차오른 물을 피해 산 중턱까지 올라와 새 둥지를 틀었다. 강촌 인생에서 두메산골 인생으로 삶이 바뀌었지만 이제는 추억이 됐다. 후곡리엔 지금 10여 가구만 산다.

 

#. 사람은 떠나고 흔적만 남아

성치산과 앞에 펼쳐진 대청호를 바라보며 후곡길을 걷다보면 후곡리의 마지막 마을, 진사골에 다다른다. 대각사라는 절이 있고 더 들어가면 빈집들 가운데 김이웅 할아버지 부부가 사는 집이 나온다. 이 노부부가 지금도 진사골을 지키고 있으면서 또 한 번의 겨울을 났다.

진사골에서 후곡길은 멈춘다. 후곡리 다음은 가호리인데 이곳엔 현재 아무도 살지 않는다. 차량통행을 막는 차단기가 설치돼 있어 사람의 발길만 허락된다. 포장된 길보단 훨씬 아늑하다. 호반의 힐링 정취가 물씬 풍긴다. 호수 건너 대전 직동(3구간)이 한 눈에 들어온다.

임도 쉼터에서 서쪽으로 바라보면 대청호오백리길 3구간 출발점인 냉천버스종점이 보인다.

조금 더 끝을 향해 가면 곡계고개를 만난다. 수몰 전 가여울마을과 곡계마을을 연결하는 유일한 통로였다고 한다. 고갯길의 상징인 보호수 한 그루가 우뚝 솟아 있다. 높이가 23m에 이르는 상수리나무다.

가호리 땅끝. 대전 직동과 내탑동 사이로 파란 호수가 펼쳐진다. 손에 잡힐 듯한 야트막한 산들은 예전엔 어느 동네의 뒷산 정도 됐겠지만 지금은 호수 위에 놓인 섬 같은 곳이 됐다. 물이 좀 빠지면 육지로 연결될 산들이다. 그곳엔 옛 마을의 흔적들이 남아 있겠지? 지금은 억새와 갈대밭, 그리고 동복 오씨 묘소가 쓸쓸함을 대변한다. 그래도 대청호 오백리길에서 만나는 묘소가 늘 그렇듯 이곳 역시 빼어난 풍광을 자랑한다. 눈앞엔 첩첩산중이 펼쳐지고 그 사이 사이로 유유히 흐르는 금강이 머릿속에 그려진다.

 

#. 악어섬, 악어밥섬 이야기

동복 오씨 묘소에서 다시 출발지점으로 향한다. 이번엔 산길이다. 왼쪽으론 대전 땅이, 오른쪽으론 충북 보은 땅인데 그 사이에 대청호가 산골짜기 깊숙한 곳까지 들어와 있다. 물이 차기 전엔 나룻배로 1∼2분도 안 걸리는 지척이었을 텐데 지금은 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땅이 됐고 대신 육로가 새로 생겨났다. 물론 30∼40분을 돌아가야 하지만 말이다.

 

 

 

악어처럼 보이나요? 악어섬, 악어밥섬이라 불리는 곳.

228봉에 오르면 대청호가 만들어낸 신기한 풍경을 엿볼 수 있다. 이름하여 ‘악어 악어밥섬’이다. 지형이 마치 악어 한 마리가 먹이를 먹기 위해 다가서는 모습이다. 예전엔 높고 낮은 산봉우리들이었는데 물이 차오르니 이런 신기한 볼거리도 생겨났다.

가호리 땅끝에서 보면 악어밥섬은 손에 잡힐 듯 가까이 있다. 수몰 전엔 가호리 땅끝과 이어진, 말 그대로 육지였다. 마을사람들의 쉼터가, 어린 아이들의 놀이터가 됐을 법 하다. 그러나 지금은 밑둥은 물에 잠기고 다 녹아가는 빙산처럼 꼭대기 부분만 살포시 수면 위에 떠 있다. 위에서 내려다보는 풍경은 이래서 더 흥미롭다.

출발점으로 되돌아가는 길은 조금 험하다. 마을도로(후곡길) 쪽으론 오래된 나무들을 베어내고 새로운 묘목을 심는 벌목사업이 펼쳐지고 있어 시야가 확 트이는데 반대쪽은 소나무들이 울창하다. 산 위에서 보면 내륙에서 뻗어나간 산줄기들이 얼마나 많은지 실감할 수 있다.
글 이기준 기자 lkj@ggilbo.com 사진 이승훈 기자

 

 

 

후곡리 사향탑 주인공 최성근 씨 ]

"문의보다 더 컸던 마을, 지금은 12가구만 남았지"

청주시 문의면 후곡리 첫 마을, 숯고개마을로 불렸던 곳에 60대의 젊은(?) 농부가 산다. 최성근(62) 씨다. 후곡리 초입에 세워진 사향탑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사향탑에 새겨진 16명의 이름 맨 끝에 최 씨의 이름이 있다. 개구쟁이 동네 꼬마 녀석들이 뜻을 모아 고향을 그리는 마음을 담았다고 했다.

최 씨는 어린시절을 이곳에서 보냈다. 그 당시, 지금은 호수에 잠긴 후곡리 앞골엔 솥 걸어놓고 산 집이 100여 가구나 됐을 정도로 후곡리는 큰 동네였다. 지금의 문의보다도 컸다. 인근에서 가장 큰 초등학교(용흥국민학교)가 이곳에 있었을 정도다. 소전리 아이들은 산 넘어 산으로, 30개가 넘은 개울 다리를 건너 학교에 다녔다. 그래서 수십 명이 입학을 해도 졸업한 학생은 손으로 꼽았다.

"영화배우 김지미 보러 나룻배 타고 신탄진 가기도 했지"

대청호가 조성되기 전, 후곡리 사람들은 나룻배를 타고 금강을 건너 신탄진에서 장을 봤다. 한 짐 짊어지고 30리길을 걸어야 했다. 걷다가 나룻배를 타고 강 건너기를 몇 차례 반복해야 집에 도달할 수 있었다. 모든 게 신기했던 시절, 이 마을 사람들은 기차를 구경하기 위해, 영화배우 김지미 씨를 보기 위해 신탄진역에 가기도 했다고 한다. 지금은 차로 1시간도 안 걸리지만 그땐 하루를 꼬박 투자해야 했다.

후곡리엔 보리밭이 많았다. 이곳에서 보리가 반출되지 못하면 청원군 일대 밥줄이 끊길 정도로 규모가 컸다고 한다. 보리 낙곡을 주워 학비를 댔을 정도다. 담배농사도 많이 했고 고추와 참깨를 심어 삶을 영위했다. 그 때만 해도 이곳의 생활권은 대전이었다. 그런데 이제는 청주로 나간다.

최 씨는 초등학교 다닐 때 대전으로 전학한 뒤 줄곧 대전에서 생활하다 30여 년 전 고향마을로 돌아왔다. 도시에서 궁핍하게 사느니 시골마을에서 맘 편히 살자는 아내의 권유에서 비롯됐다고 했다. 고향마을에 들어와선 농사를 짓는다. 농산물을 가공해 청주에 나가 판다. 얼마 전까진 집 앞 대청호에서 붕어와 메기, 쏘가리 등을 잡아 매운탕을 해 팔았는데 지금은 베스와 블루길 같은 외래어종이 대청호를 장악해 토종 물고기를 잡기 힘들다고 한다. 그래서 요즘은 문의면 어촌계(내수면어업) 사람들이 모여 장어 치어를 뿌려볼까 생각 중이다. 최 씨는 자연에 순응하며 행복하게 삶을 살아가는 방법을 지금도 대청호에서 배워가고 있다.

"전두환 전 대통령이 청남대 올 땐 군인과 경찰이 쫙 깔려서 ... "

최 씨는 청남대가 만들어졌을 때 일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전두환 전 대통령이 한 번 오면 후곡리엔 군인과 경찰이 쫙 깔려 모든 게 불편했다. 후곡리 연안 이씨 산에 오르면 청남대가 한 눈에 들어오는데 이곳에 초소가 있었다. 군인들이 얼마나 자주 왔다 갔다 했는지 산길이 기가 막히게 잘 만들어졌다고 최 씨는 힘 줘 말한다. 대통령이 이곳에 한 번 오면 그래도 이것저것 선물도 많이 준비해와 마을 사람들에겐 그럭저럭 보상은 됐다고 한다.

특히 경호실 사람들이 학용품을 한 차 실어다 줘서 이 마을엔 항상 학용품이 넘쳐났다. 청남대 인근 마을에 통신선과 전기선이 나름 일찍 들어온 것도 다 청남대 덕분이다.
대청댐 조성 이후 참 많은 것이 변했다. 최 씨를 비롯해 이곳 마을 사람들에겐 이제 다 추억이 됐다. 대청호 수몰이라는 난리를 겪었지만 마지막까지 남아 고향을 지키는 이들은 이제 다 백발 성성한 노인이 돼 옛 추억과 함께 오늘을 산다. 후곡리와 가호리를 통틀어 원주민만 딱 12가구 남았다.
이기준 기자 lkj@ggilbo.com

 

[17구간 이렇게 걸었습니다]
산행일 : 2015년 2월 27일 금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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