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청호오백리길 5구간] 백골산성낭만길

대전, 다도해를 품다

 

‘우리가 비록 빈한하여 가진 것이 없다 할지라도 우리는 이러한 때 모든 것을 가진 듯하고 우리의 마음이 비록 가난하여 바라는 바, 기대하는 바가 없다 할지라도 하늘을 달리어 녹음을 스쳐 오는 바람은 다음 순간에라도 곧 모든 것을 가져올 듯하지 아니한가?’ <이양하의 신록예찬 중에서>

바야흐로 신록(新綠)을 예찬할 시간이다. 소박한 연초록의 생기발랄함에 동화되기 딱 좋은 시절이다. 초록, 먼셀 표색계에서는 2.5G 10분의 4에 해당한다고 하는 이 초록 중에서도 가장 신선한 초록을 볼 수 있는 건 오직 이때뿐이다. 주저하다간 안구정화의 최적기를 놓치는 슬픔에 몸부림치게 된다. 녹음(綠陰)이 짙어지기 전에 신록의 4월을 온몸으로 맞이하라.

초록은 파랑과 노랑의 중간이다. 그 가운데서도 연둣빛 초록은 사람에게 가장 좋은 색이다. 우선 눈이 좋아하는 색이다. 자극적이지 않아 피로감이 덜 하다. 교실 칠판이 그렇고 병원 집도의의 가운이 그런 것도 다 이런 이유에서다. 무엇보다 연두색은 곧 자연이다. 사람은 초록 또는 연두색을 보면 친환경적이란 이미지를 본능적으로 떠올리게 된다. 굳이 인과관계를 따질 필요는 없다. 그렇게 느끼는 게 자연스러운 거다. 눈이 즐겁고 그래서 머리가 맑아지고 그래서 마음도 편안해진다. 신록은 그래서 선물이다.

 

#. 겨울은 옅어지고 봄은 짙어지네

겨울과 봄이 교차하는 4월, 대청호반에 섰다. 대청호 오백리길 5구간, 백골산성낭만길이다. 옅은 갈색의 갈대와 억새는 이제 제 역할을 다하고 고개를 숙이는 대신 초록빛깔 새 생명들이 슬슬 그 자리를 대체하기 시작했다. 겨우내 스산했던 버드나무 앙상한 가지에도 새 생명이 돋아나고 있다.

‘낭만’ 하면 늦가을 갈대와 억새의 향연인데 초봄에 5구간을 찾은 건 이 길에 ‘백골산성낭만길’이란 이름을 붙여준 분들에 대한 예의가 아닌 줄 알면서도 5구간의 문을 두드렸다. ‘가을낭만=5구간’이란 도식 때문에 쓸쓸히 고독을 느끼고 있을 봄 정취를 위로하고 또 위로를 받기 위해서다.

신상교 끄트머리, 흥진마을 초입에서 여정을 시작했다. 끝없이 이어지는 목책 길을 따라 천천히 걸으며 갈대와 억새의 마지막 몸부림을 감상한다. “아직 살아 있네∼.” 호반을 따라 웃자란 갈대와 억새들이 1㎞ 남짓 길을 안내한다. 군데군데 벤치들이 놓여 있어 잠시 사색에 잠기게끔 만든다. 대청호 건너편으론 벚꽃이 흐드러지게 핀 4구간이 한 눈에 들어온다. 초록 바탕에 연분홍 선(線)이 선명하다. 봄꽃은 벌써 절정을 향해 치닫고 있다. 겨울과 봄의 콜라보레이션이 선명한 흥진마을반도 3.5㎞ 둘레길은 ‘사색힐링길’이라 부르고 싶다.

#. 백골산에서 다도해를 감상하다

흥진마을을 돌아 나오면 바깥아감이다. 아감마을의 바깥에 있다고 해서 바깥아감이다. 아감이란 이름은 이 마을 아가미산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도로 건너 백골산성에 오르는 등산로가 나 있다. ‘백골산성 2.6㎞’ 표시를 따라 백골산에 오른다. 산 옆으로 경부고속도로가 나 있다.

도로에선 달리고 숲속에선 걷는다. 그래서 백골산 숲속에선 마치 과거의 시간에 있는 느낌이다. 지금은 차의 속도에 따라 세상이 움직이지만 과거엔 걷는 속도에 따라 세상이 움직이던 때가 있었다. 요즘 ‘느림의 미학’에 새삼 관심이 가는 건 세상이 너무 빨리 돌아가는 탓에 얻는 것보다 잃는 것이 더 많은 것에 대한 반성 때문이 아닐까?

숲속 나무 사이로 띄엄띄엄 엿보이는 대청호반을 감상하며 산을 오른다. 산새의 노래를 들으며 이따금씩 나타나는 이름 모를 야생화와 눈을 마주치기도 해본다. 강살봉(335m)을 마주할 무렵, 지그재그로 난 길이 재미지다. 심심하지 않다. 약간 지루할 때 쯤 만난 깨알 같은 재미에 한 번 웃는다.

 

백골산에서 바라본 대청호

능선을 따라 다시 길을 잡는다. 숨이 차오르고 종아리근육이 당긴다. 정상에 다다랐다는 신호다. 등산을 시작한 지 1시간 10분 남짓, 해발 340m, 백골산 정상에 선다. “와∼.” 자연스레 입이 떡 벌어진다. 탄성을 자아낸다. 장쾌함이 선사하는 감동이 물밀 듯 밀려온다. 육지에서 느낄 수 있는 다도해 풍경은 산에 오른 수고에 대한 자연의 보답이다.

#. 대청호반 또 하나의 보석, 방축골

파란 하늘, 그 빛을 닮은 대청호, 그리고 짙어지는 녹음이 어우러진 한 폭의 수채화. 이 절경에 대한 아쉬움을 뒤로 하고 한식마을 방면으로 하산길을 밟는다. 이제 막 자라기 시작한 나무들에선 신록의 향연이 펼쳐진다. 신록에도 일생이 있다면 지금 이 때의 신록은 청춘기쯤 되겠다.

한식마을 도로변엔 벚꽃이 물결친다. 이따금 바람이라도 불면 꽃비를 선사한다. 벚꽃터널 도로를 따라 절골마을 입구에 선다. 1500년 전 백제와 신라가 패권을 다툴 때 지금의 대청호는 가장 치열한 격전지였는데 한 스님이 죽은 병사들을 위해 이곳에 절을 세우고 이들의 넋을 위로했다고 해서 절골이란 마을 이름이 생겼다고 한다.

 

꽃님이는 어디 가고 ...

동심을 깨우는 절골마을 벽화를 감상하며 방축골로 향한다. 고개 하나를 넘는다. 고개의 끝자락, 그 유명한 ‘꽃님이식당’이 눈에 들어온다. 연인들이 북적이던 풍경은 사라지고 지금은 흉측하게 변한 건물만 남아있다. 이곳이 이렇게 오래 방치되고 있는 건 ‘꽃님이의 저주’ 때문이라는 전설이 있는데 어서 이 저주가 풀리길 기대해 본다. 건물 뒤편으로 돌아가서 바라본 대청호의 풍경은 여전히 일품이다.

호수 건너 모래톱에 거대한 돌들이 층층이 쌓인 두 개의 탑이 있고 그 사이에 나무 한 그루가 서 있는데 이 모습이 대청호반의 운치를 더한다. 꽃님이식당을 대신해 이곳에선 ‘팡시온’이란 카페가 새로운 명소로 자리 잡았다. 이 카페를 돌아 방축골반도 끝을 향해 가면 백골산 정상에서 희미하게 보였던 절경이 뚜렷하게 눈에 들어온다. 일명 ‘햄버거섬’이라 불리는 섬이 손에 잡힐 듯하다. 햄버거섬 건너가 3구간의 끝자락, 관동묘려인데 섬에 가려 보이진 않는다.

반도의 끝에서 본 호반 풍경은 대청호의 흔하디흔한 풍경이지만 이곳은 좀 더 특별하다. 발길이 쉽게 떨어지지 않는다. 방축골 어디에서 바라봐도 대청호의 풍광은 보석처럼 빛난다. 땅거미 내려앉은 대청호반, 저녁노을이 지면 새들도 다시 날아와 휴식을 취한다.

#. 연분홍 꽃비 내리는 회남로를 따라

방축골에선 병풍처럼 펼쳐진 산과 나무, 아름다운 집들이 대청호에 그대로 투영된 모습을 감상하느라 걷는 내내 호수에서 눈을 뗄 수 없다. 바람 없는 날엔 호수의 표면도 거울처럼 판판해져 더 선명한 자연의 데칼코마니를 선사한다. 또 다시 아쉬움을 뒤로 하고 방축골을 돌아 나온다. 다시 회남로(신촌 버스승강장). 공식적인 5구간은 여기서 북쪽(청주방면)으로 길을 따라 모래재와 와정삼거리를 거쳐 방아실마을 입구까지 가는 것인데 이번 여정에선 반대로 원점으로 되돌아가는 루트를 택했다.

신촌에서 회남로 벚꽃길을 따라 10분 정도 내려오면 절골마을과 다시 만나고 또 20분을 더 가면 한식마을과 만난다. 또 20분을 걸으면 백골산 등산로 입구가 있는 바깥아감(조선식당)에 도달한다. 회남로를 중심으로 좌우 이리저리로 ‘8’자 여정을 거친 셈이다. 지도가 없으면 방향감각을 상실할 수도 있겠다. 그래도 길을 잃을 걱정은 붙들어 매시라. ‘대청호 오백리길’이라고 쓰인 정사각형 표시가 대청호반에만 1500여 개가 깔려 있고 이곳을 다녀간 사람들이 나뭇가지에 남겨 놓은 흔적(꼬리표)들이 널려 있다.

바깥아감 버스승강장에 이르기 전 대청호반과 어우러진 잘 가꿔진 한옥을 만날 수 있는데 이곳은 충암 김정(沖菴 金淨, 1486∼1521) 선생을 모신 사당이다. 김정은 조광조와 더불어 지치주의(至治主義)의 기치를 들고 향약을 전국에 널리 알린 인물이다. 기묘사화(1519년, 중종 14년)로 화를 입어 제주도로 유배됐다 36세에 사사됐다. 인종 1년(1623년)에 신원복직됐고 영조 24년(1748년)에 영의정으로 추증됐다. 1978년 대청댐 수몰로 물에 잠긴 내탑리에서 이곳으로 묘를 옮기면서 신도비, 별묘, 산해당도 함께 옮겼다. 무덤 동쪽엔 부인의 정려가 있다.
글 이기준 기자 lkj@ggilbo.com  사진 이승훈 기자

0. 들머리 (프롤로그) ; 1년 여정의 시작
1. 1구간 (두메마을길) : 길 위의 호수
2. 2구간 (찬샘마을길) : 백제 눈물의 수묵화
3. 3구간 (호반열녀길) : 절경이 들려주는 옛 이야기
4. 10구간 (며느리눈물길) : 금강, 그 광야
5. 17구간 (사향길) : 물결, 그 눈물
6. 13구간 (한반도길) : 반전을 꿈꾸는가
7. 4구간 (호반낭만길) : 대청호길 대표주자
8. 5구간 (백골산성낭만길) : 대전, 다도해를 품다

 

[5구간 이렇게 걸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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