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청호오백리길 4구간] 호반낭만길

궁극의 버라이어티

 

기어이 봄이 오고야 말았다. 스멀스멀 봄기운이 온 대지에 꿈틀거린다. 겨우내 움츠렸던 꽃나무들이 가장 먼저 반응했다. 대청호반이 서서히 옷을 갈아입는다. 칙칙한 옷을 벗고 산뜻한 옷으로 갈아입는 중이다. 초록색 바탕에 형형색색 꽃무늬가 그려진 그런 옷이다. 도시에서 귀촌하는 사람들이 많아지면서 이 마을 저 마을 새로운 꽃들이 점점 더 많아지고 있다. 2015년 봄 시즌 대청호반이 소개하는 ‘봄 신상’을 찾아 떠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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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4구간은 쉽다. 고된 산행이 없는
대부분 평지길이다. 그래서 추천한다.
아이들도 즐겁게 걸을 수 있는 놀이터.
새들의 지저귐이 12km 내내 들리고
대청호 절경은 걸음걸음마다 이어진다.
도착지 신상교 앞엔 환상적인 뚝방길.
잠수교라고도 불리는 이 길은
황홀한 4구간 여정의 대미를 장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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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봄기운 충만한 대청호

봄바람이 제주도 유채꽃과 진해 벚꽃을 깨우고 남서풍에 실려 북상하고 있다. 도심에서 조금만 벗어나면 온통 꽃밭이다. 대청호반엔 꽃샘추위 속에서도 봄기운이 돋아났다. 추위에 지친 갈대와 억새는 뽀송뽀송한 솜털을 다 털어내고 점점 생기를 잃어가는 대신 푸른 새 생명들이 대청호반의 새로운 표정으로 자리 잡고 있다.

두 달 전 발자국을 남겼던 대청호 오백리길 3구간의 종점, 미륵원 앞에 다시 섰다. 4구간은 대전 동구 마산동 '더리스' 옆 대청호 오백리길 쉼터에서 시작한다. 호반을 따라 신상교까지 12㎞ 구간이다. 5시간 정도 소요된다. 대부분 평지길이고 아름다운 호수 풍경을 가까이서 마주할 기회가 많은 곳이다. 이 구간은 TV 프로그램으로 치면 ‘버라이어티 쇼’라고 할 수 있다. 그만큼 오감을 자극하는 요소가 많다.

대청호의 흔한 절경을 왼쪽에 두고 호반길을 따라 남쪽으로 길을 잡는다. 전날부터 내린 비가 그쳤지만 하늘은 다시 비를 뿌릴 듯 잔뜩 찌푸려 있다. 그래도 대청호는 그 나름의 멋이 있다. 겨울엔 갈대와 억새의 향연이 대청호의 정취를 담당했다면 봄엔 형형색색 꽃들이 그 자리를 대신한다.

 

#. 호반의 절경 속으로

파릇파릇 들풀이 자라나는 한적한 시골길을 따라 여정을 시작하자마자 전망 좋은 곳에 벤치가 놓여 있다. ‘더리스’라는 식당이 자리를 잡고 있는 곳인데 대전에서 연애 좀 한다는 사람들이 한 번쯤 거쳐 간다는 대표적인 데이트코스란다. 그럴 만하다. 이런 걸 두고 대청호의 경제적 효과라고 해야 할까?

하얀 벚꽃과 노란 개나리, 연분홍 진달래가 자신의 진가를 뽐내는 각축장에서 버드나무도 수줍게 푸른 새싹을 틔웠다. 20여 분 정도 호반을 걷다 다시 샛길로 빠져 아스팔트길을 2분 정도 걸으니 ‘슬픈연가 촬영지 1.3㎞’라는 푯말이 나타난다. 표시를 따라 대청호 쪽으로 방향을 틀어 오솔길을 걷는다. 진달래와 벚꽃, 개나리들이 길을 안내한다. 15분 정도 아기자기하게 꼬불거리는 예쁜 숲길을 걸으니 그 유명한 슬픈연가 촬영지가 나온다. 세트(오두막)는 철거되고 이곳이 드라마 촬영지였음을 알리는 푯말만 우두커니 서 있다. 2005년에 촬영이 이뤄졌으니 딱 10년이 지났다. 정면에 작은 섬 하나 떠 있고 그 건너 아득한 곳에 5구간 백골산이 펼쳐져 있다. 촬영지 바로 옆, 겨울에 비해 물이 많이 빠지면서 ‘모세의 기적’이 일어났다. 물이 찼을 땐 섬이었던 곳이 30m 남짓 길로 연결되면서 신비로운 풍경을 연출한다. 흰 모래가 백사장을 연상케 한다. 물이 찼다 빠졌다 반복되면서 비롯된 거다.

#. 봄빛, 봄소리, 봄향기

길을 되돌아 나와 가래울로 방향을 잡는다. 호반길이 쭉 이어진다. 40분 정도 잘 다듬어진 돌길과 징검다리들이 걷는 재미를 한층 더 높여준다. 다시 큰길가, 가래울 농산물직판장에서 ‘전망 좋은 곳’으로 다시 오솔길이 시작된다. 오후로 접어들면서 날씨가 개기 시작했다. 햇빛이 따사롭다. 숲속이 다시 분주해졌다. 새들의 지저귐은 서라운드 입체음향처럼 더 다양하고 풍성하다. 봄꽃의 은은한 향기는 자연에 몸을 맡긴 사람에게만 주어진 특권이다. 걷는 내내 나의 오감(五感)은 전부 봄을 쫓고 있었다.

새들이 들려주는 ‘봄의 왈츠’를 따라 25분 정도 걸으니 전망 좋은 곳이 모습을 드러낸다. 왼쪽으로 슬픈연가 촬영지가 보인다. 어디에 서서 어디를 바라보든 절경이다. 호수엔 청둥오리나 왜가리, 고니 같은 덩치 큰 새들이 쉴 수 있도록 인공수초 섬도 조성돼 있다. 이 인공섬은 수질을 정화하는 기능도 함께 갖고 있다고 한다. 대청호의 수면은 데칼코마니처럼 5구간을 그대로 담아내면서 멋스러움을 더한다. 다시 발길을 재촉해 4구간의 하이라이트라고 할 수 있는 대청호반자연생태공원으로 향한다.

 

 

 

#. 바람도 쉬어가는 명품 쉼터

전망 좋은 곳에서 호숫가를 따라 나오면 4구간의 중간쯤에 다다른다. 수변 갈대밭 위로 조성된 데크길을 따라 큰 도로로 나오면 대청호반자연생태공원을 만날 수 있다. 생태습지와 연못, 실개천, 야생초 화원 등이 조화를 이룬다. 야생초 화원 가운데 서 있는 빨간 지붕의 풍차는 이곳의 마스코트다. 저녁엔 조명이 어우러져 또 다른 볼거리를 제공하기 때문에 대전시민이 많이 찾는다고 한다. 눈이 즐겁고 코가 기쁘고 귀가 행복하다. 이곳뿐만 아니라 4구간 전체가 특히 그렇고 봄이라서 더 그렇다.

도로를 따라 가다 주말체험농장에서 다시 호수 쪽으로 몸을 튼다. 황새바위 찾아가는 길이다. 30분 정도 걸린다. 군데군데 세워진 나무 울타리들이 제법 운치 있다. 호수에 눈을 고정하고 길을 따라가면 금세 황새바위 푯말이 보인다. 그런데 이 바위가 왜 황새바위인지는 아직도 미궁이다. 바위 옆에 쉼터가 조성돼 있는데 이곳에서도 대청호의 흔한 풍경이 펼쳐진다. 물론 대청호를 처음 찾는 사람이라면 쉽게 발을 떼지 못한다.

4구간은 리아스식 해안처럼 호수를 향해 뻗어나간 반도를 수도 없이 들어갔다 나왔다를 반복하기 때문에 호반의 정취를 가장 가까이서 가장 많이 볼 수 있는 곳 중 하나로 꼽힌다. 이제 다시 연꽃마을로 길을 잡는다. 산 능선을 따라 가도 되지만 물이 조금 빠진 관계로 수변을 따라 걷기로 했다. 그래도 길은 통한다. 이곳에선 큰 바위들이 수변에 널려있다. 물이 빠지니 볼 수 있는 모습인데 마치 공룡알처럼 동글동글하다. 이 바위들은 물이 들었다 빠졌다 할 때마다 조금씩 껍질을 벗어 낸다. ‘껍질 벗는 바위’라고나 할까?

 

 

#. 대청호, 예술혼을 깨우다

공룡알을 품에 안고 연꽃마을 초입에 들어선다. 누군가 새를 새겨넣은 패널을 세워놨다. 오소림의 ‘대청호 올레길’, 오희용의 ‘감사’를 천천히 읊으며 걷는다. ‘한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보다…’로 시작하는 서정주의 ‘국화 옆에서’와 마주한다. 이렇게 시를 쫓아온 발걸음이 멈춘 곳은 ‘글사랑놋다리집’. 장덕천 시인의 집이다. 이웃한 집은 송영호 화가의 작업실이다. 이곳 역시 개인의 사적 공간이지만 누구나 잠시 여장을 푸는 쉼터다.

이곳 연꽃마을엔 이들처럼 예술 하는 사람들이 속속 모여드는 곳이다. 연꽃농장도 있어 여름엔 사진 좀 찍는 사람들이 한 번씩 거쳐 가는 곳이다. 조만간 이곳 예술인들이 각자의 특기를 살려 콜라보레이션 작품 전시회를 열지도 모르겠다.

이제 4구간의 막바지다. 이정표가 없어도 길 잃을 위험은 없다. 거의 외길이기 때문이다. 연꽃마을을 조금 벗어나면 수변을 따라 나무난간과 디딤돌길이 어우러져 지친 발걸음을 가볍게 한다. 15분 정도 걸으면 또 쉼터를 만난다. 버드나무가 우거진 수변 늪, 똥개들이란 이름을 가진 이곳을 크게 돌아 엉고개를 넘는다. 호수를 가로질러 신상교까지 제방길이 시원하게 뻗어있다. 이곳은 대전 쪽 대청호 오백리길의 최남단이다. 4구간의 반도들이 한 눈에 조망된다. 튼튼한 두 다리로 자연과 교감하는 이 즐거움이 바로 대청호 오백리길 여정의 가장 큰 이유다.
글=이기준 기자 lkj@ggilbo.com 사진=이기준 이승훈 기자

 

 

[연꽃마을 송영호 화백이 건넨 차 한 잔]

 

풍경화 같은 '송영호화실' 쥔장
대청호에 반해 자리잡은 지 11년
물이 좋아 물 그림만 그린다는 송 화백
"여기에 왜 사느냐는 질문이 제일 많아
그럼 이렇게 답하지, 한 번 살아보라고"
화백은, 여백같은 삶을 건네줬다

 

철나무 담장 삼아 단출하게 서 있는 한 채의 단층 가옥이 연꽃마을에서 눈에 띈다. 집 창문과 벽채 앞에 조성된 화단은 작지만 소담하다. 잔디와 클로버가 아웅다웅 친구처럼 자라는 마당은 포근함을 선사한다. 선비의 가옥에 어김없이 등장하는 배롱나무(백일홍목)와 작은 연못도 있다.

긴 장대 하나가 세워져 있는 것을 보니 집주인이 안에 있나보다. 제주도의 정낭(대문)문화를 본 따 이 집도 장대 하나(제주도는 3개)로 대문 역할을 대신한다. 집에 들어서니 하얀 꽃을 피운 미선나무가 반긴다. 좀처럼 보기 힘들고 자생·군락지는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나무여서 보는 사람도 반갑다. 개나리를 닮은 영춘화도 있다. 이 집에서 가장 먼저 꽃을 피워 봄을 알렸을 것이다.

‘송영호 화실’이라는 명패가 달린 이곳. 그렇다 이 집 쥔장은 송영호(65) 화가다. 4구간 여행자라면 꼭 안에 한 번 들어가 보고 싶은 욕구를 불러일으키는 명소다. 일면식 없는 손님도 허물없이 대해주는 집 주인의 따뜻한 성정도 한 몫 하지만 그렇다고 집 주인을 보러오는 건 아니다. 집 정원이 예쁘게 꾸며져 있어서다. 최근 겨우내 집 안에 있던 화분이 모두 밖으로 나와 마당 분위기가 더 화사해졌다.

송 화백은 11년 전 이곳에 새 둥지를 틀었다. 대청호 풍경을 화폭에 담아내는 작업을 하면서 좋은 자리 하나 물색하던 차에 운 좋게 이 집을 건졌다. 27년 전 정착한 장덕천 시인과 이웃이 됐다.

손님 접대한다고 차 한 잔 끓여 내온 송 화백. 자연스럽게 대화의 창이 열렸다. 감히 예술의 세계를 논할 순 없고 그래서 그의 삶을 들여다보기로 했다.

“왜 이곳에 화실을 마련하게 됐나요?” “원래 물을 좋아해. 그래서 물 그림만 그려.” “대청호는 4계절 중 언제가 가장 좋아요?” “다 좋지. 가장 좋은 건 없어. 다 나름의 멋이 있는 것이고….” “이곳 생활이 불편하진 않나요?” “내가 좋아서 온 건데 뭘.” “나무들이 많은데 관리는 어렵지 않나요?” “이웃들한테 다 배워서 하면 돼.” “이곳에 살면 좋은 건 뭐죠?” “자연을 가까이서 느낄 수 있다는 것?” “사람들이 자꾸 찾아오면 귀찮지 않아요?” “사람들 북적거리는 맛도 있어야지.”

작업실로 자리를 옮겨 얘기를 이어갔다. 자연과 함께 살아서일까. 이미 달관한 사람마냥 대답이 군더더기 없이 핵심만 간단·명료하다. 그래도 작품을 설명할 땐 열정을 토해낸다. 평생 그린 그림 창고를 공개하며 인생을 풀어내기도 한다. 예전엔 유화를 했지만 요즘은 수채화를 그린다. 유화는 긴 시간이 필요해 힘이 달린단다.송 화백의 화법은 특이하다. 종이를 물에 적신 뒤 거의 마를 때쯤 물감을 입힌다. 물을 따라 물감이 자연스럽게 번지게 하는 거다. 그 바탕에 솟대를 그려 넣기도 하고 꽃을 그려 넣기도 한다.

이곳을 찾는 사람들이 송 화백에게 가장 많이 하는 질문은 “어떻게 여기서 11년 넘게 머물러 있게 됐느냐”란다. 그럼 대답은 딱 하나라고. “당신도 한 번 살아봐. 욕심 없이 초연하게.” 이 말밖엔 없단다. 어디에 살든 다 털어내 마음의 부자가 되면 더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다는 뜻이 아닐까.

녹차향 가득한 화실은 이야기 꽃으로 가득하고 창밖엔 꽃비가 내린다

글·사진=이기준 기자 lkj@ggilbo.com


0. 들머리 (프롤로그) ; 1년 여정의 시작
1. 1구간 (두메마을길) : 길 위의 호수
2. 2구간 (찬샘마을길) : 백제 눈물의 수묵화
3. 3구간 (호반열녀길) : 절경이 들려주는 옛 이야기
4. 10구간 (며느리눈물길) : 금강, 그 광야
5. 17구간 (사향길) : 물결, 그 눈물
6. 13구간 (한반도길) : 반전을 꿈꾸는가
7. 4구간 (호반낭만길) : 대청호길 대표주자
8. 5구간 (백골산성낭만길) : 대전, 다도해를 품다

 

[4구간 이렇게 걸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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