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5월을 계절의 여왕이라 했던가. 아직 5월인데 계절은 벌써 한여름이다. 강한 햇살에 모든 것이 녹아내릴 듯 푹푹 찐다. 2015년의 봄은 오는 듯하다 여름의 기세에 쫓기듯 가버렸다. 5월 초순까진 그런대로 봄 같았는데 하순엔 참기 힘들 정도로 더웠다. 대전지방기상청에 따르면 올해 5월 하순 기온은 1973년 이후 42년 만에 가장 높았다. 말 그대로 기록적이다. 이상고온으로 대표되는 기후변화, 이 자연의 역습을 온몸으로 느끼면서 다시 대청호 오백리길에 섰다.

# 석탄리? 탄광이 있나?

11구간 대청호 오백리길은 충북 옥천군 동이면 석탄리 고인돌공원에서 산길을 따라 청마리 폐교까지 약 11㎞, 약 5시간이 소요되는 코스다. 구간 종점인 청마리는 대청호 오백리길의 최남단이라고 할 수 있다. 인프라 측면에서 관광지로서의 면모를 두루 갖춘 오백리길 최북단 20구간 문의과거마을길과 달리 이곳은 원시자연 그대로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동물의 왕국까진 아니어도 두메산골 오지 중의 오지다.

구간의 시작점은 석탄리 고인돌공원이다. 석탄리라고 해서 탄광이 있는 줄 알았다. 그런데 그게 아니다. ‘석탄’이란 지명은 지석리와 직탄리가 합해지면서 한 글자씩 따온 거란다. 여기서 ‘탄’자는 숯(炭)이 아닌 여울 탄(灘)자를 쓴다. 석탄리는 한때 동이면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잘사는 마을이었지만 대청댐 건설로 인해 주민들이 거의 타 지역으로 이주하고 지금은 아주 작은 마을로 변했다. 안터, 산얼기, 피실, 덩기미마을이 있었는데 피실과 덩기미는 수몰돼 마을이 완전히 없어졌다.

선사시대에도 이곳 마을엔 사람이 살았다. 고인돌과 선돌이 발굴됐다. 고인돌 무덤을 지석묘라고 하는데 옛 지석리의 지명은 여기서 온 듯하다. 마을 사람들도 그렇게 믿고 있다. 이 고인돌과 짝을 이루는 선돌은 마을입구에 세워져 수호신 역할을 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 동물의 왕국 살짝 맛보기

안터1길 벽화를 따라 여정을 시작한다. 모내기에 분주한 마을을 지나 산길을 걷는다. 아침인데도 숨이 금방 차 오른다. 반딧불이체험마을 고갯길을 넘어서자 비포장 임도가 이어진다. 기계음에서 벗어나 자연으로 들어간다. 아직 덜 자란 뱀 한 마리가 마중을 나왔다. 작은 바람에도 먼지 흩날리는 습기 제로인 마른 땅에서 혹서(酷暑)를 체험하다 발길에 놀라 이내 숲으로 사라진다.

출발지에서 약 2㎞ 지점, 가리내농원 푯말이 보인다. 갈림길이다. 직진 방향 산길을 탄다. 꾸불꾸불 길이 이어진다. 틈틈이 설치된 반사경들이 이곳이 도로(임도)임을 말해준다. 그래도 다행히 울창한 숲이 햇빛을 가려줘 산행이 수월하다.
1㎞ 정도 더 가니 이번엔 지폐 한 장 길이만한 지네 한 마리가 길을 안내한다. 다리가 무려 서른여덟 개다.

이놈 역시 뭔가 위험을 감지했는지 빠른 속도로 숨어버린다. 감사고개라는 이름을 가진 큰 고개 하나 넘어 다시 내리막을 탄다. 조금 가니 데크길을 조성해 놨다. 11구간에서 유일하게 산에서 금강(대청호)이 보이는 지점이다. 한반도 반전지형과 둔주봉 산줄기, 피실을 연속으로 휘돌아온 물줄기다.
S자 형태의 꼬불길이 계속 일행을 산 아래로 이끈다. 대략 700m 정도 이어진다. 생명강전원마을 삼거리다. 이번엔 개들이 마중을 나왔다. 짖는 모양새가 반기는 것 같지는 않다.

# 수몰마을에서 다시 싹트는 삶

출발지에서 3.8㎞ 지점, 생명강전원마을 푯말에서 청마리 방면으로 길을 잡는 게 공식 코스다. 그런데 갑자기 피실이 궁금해졌다. 정식코스의 반대쪽이다. 왕복 5㎞를 벗어나야 한다. 11구간+α(알파)가 되는 셈이다. 명색이 대청호 오백리길인데 대청호를 품에 안아보지 않을 수 없다. 제법 강변으로 길이 나 있다. 이제야 진정한 대청호 오백리길을 걷는 느낌이다. 물론 대청호의 흔한 풍경이지만 볼 때마다 새롭고 신비롭다. 대청호의 초입이라 그런지 물길이 시원하고 거침없다. 막힌 가슴이 뻥 뚫리는 기분이랄까?

11구간+α(알파) 구간인 피실에서 만나는 풍경

대청댐이 만들어지기 전, 이곳은 금강 여울, 실개천이 흐르고 그 주변에 농경지가 조성돼 있었을 것이지만 지금은 금강물이 다 먹어버렸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도 모두 떠났다. 한반도 반전지형과 둔주봉 산줄기를 크게 휘돌고 다시 한 번 감입곡류의 절정을 이루는 곳, 피실이다. 아무도 없을 줄 알았던 이곳. 그런데 말끔하게 지어진 집 한 채가 떡 하니 자리를 잡고 있다.

아름드리 나무들의 호위를 받으면서 말이다. 얼마 전까지 줄배가 다녔던 흔적도 남아 있다. 분명 누군가 이곳에 살고 있다는 증거인데 역시 그랬다. 10년 전 도시에서 이주해 온 젊은 부부가 살고 있다. 타지 사람은 아니다. 원래 이곳에서 태어나 어렸을 때 수몰로 마을을 떠난 뒤 다시 고향마을로 귀농한 부부다. 이들은 이렇게 자연과 더불어 고향땅에서 인생 2막을 열었다.

# 원시림 속 기적의 연속

대략 1시간 30분, 피실로의 외도를 접고 다시 원점(생명강전원마을)에서 정식 코스를 탄다. 청마리로 가는 임도, 해가 중천이다. 휴대폰도 안 터지는 두메산골길, 사방 어디를 둘러봐도 산봉우리에 가로막혀 있다. 좀 높은 곳에 올랐다 싶어도 산봉우리 넘어 또 산봉우리. 말 그대로 첩첩산중이다. 단언컨대 이곳은 전쟁이 나도 모를 수밖에 없다. 보이는 건 하늘과 숲뿐이다.

탑산 임도를 따라 걸은 지 대략 한 시간. 슬슬 허기진다. 그런데 임도 주변에 쉴 곳이 마땅찮다. 찾다 찾다 인내심에 한계를 느껴 그늘진 임도에 자리를 폈다. ‘설마 이곳에 차가 나타날 확률은 거의 제로에 가깝다’는 판단에서다. 이날 여정 내내 임도에서 차를 한 대도 보지 못한 경험치가 밑바탕에 딸려 있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어디서 우렁찬 엔진소리가 들려온다.

이곳에 차가 다닌다. 부랴부랴 길을 피해줬다. 운전자도 놀랐을 일이다. 차를 보내고 다시 자리를 펴고 점심을 이어갔다. 그런데 5분도 되지 않아 또 한 차례 엔진소리가 들어온다. “이런 젠장.” 어쩌랴 다시 길을 열었다. 2대까진 우연이라 쳤다. 그냥 기적의 연속이라고 치부했다. 그런데 그제야 임도의 뜻이 확실히 되새겨졌다. 또 다시 차 한 대가 오붓한 점심식사 자리를 깬다. 더위에 지친 심신의 꿀맛 같은 휴식은 이렇게 날아가고 말았다.

# 말티 넘어 다시 금강의 품으로

대략 430m 고지에서 이제 내리막이다. 이곳은 아직 봄의 정취가 물씬 풍긴다. 뜨거운 햇살만 빼면 말이다. 그래도 자연의 시계에 맞춰 걸으며 많은 생명체들과 마주했다. 대략 20분 정도 내려오니 고도상으론 약 100m 정도가 낮아졌다. 여기선 지양리에서 시작된 길과 만난다. 바로 말티다. 말티라는 지명은 꽤 익숙하다. 말재, 마티, 마치 등과 함께 쓰인다. 모두 같은 어원인데 시대와 지역마다 조금씩 다르게 쓰인 것뿐이다. 말티는 흔히 말(馬)과 연관 지은 전설에서 유래한 것으로 전해지는데 말티의 말은 말 마(馬)자가 아니라 산, 우두머리를 뜻하는 우리말이다. 고로 ‘말티’라고 하면 큰 고개를 뜻한다.

말티에서 숨을 고르고 다시 내리막을 탄다. 같이 이어지는 작은 계곡에서 물이 졸졸 흐른다. 요즘 비도 많이 오지 않았는데 도대체 이 물은 어디서 온 걸까. 탑산은 알다가도 모를 곳이다. 임도 옆, 산기슭과 마주한 곳에 작은 웅덩이가 패였다. 물이 있는 곳, 역시 생명체가 있었다. 이번엔 개구리다. 머리엔 초록 반점이 있고 배 쪽은 주황빛이 도는 희귀한 놈이다. 참 못생겼지만 애정이 가는 놈이다.

종점에 거의 다다를 무렵, 사방댐이 눈에 들어온다. 폭우에 따른 재난을 막아줄 장치다. 마을의 안전을 위해 이런 게 필요할 정도로 기후변화의 역습은 무섭다. 사방댐 수로를 따라 내려오면 청마리 말티마을 폐교가 눈에 들어온다. 11구간의 종점, 12구간의 출발지다.

 

# 청마리 말티마을, 역사의 숨결

폐교 바로 옆엔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돌탑이 서 있다. 청마리 제신탑이다. 잘 보존됐다 싶더니 역시 이건 문화재다. 그것도 충북 민속문화재 제1호다. 마한시대부터 이어진 것으로 이 탑과 함께 솟대, 장승, 산제당 등 4가지 복합적인 민속신앙 유물들이 남아 있다. 그래서 이것들을 모두 모아 탑신제당이라고 부른다. 마을사람들은 해마다 정월대보름에 탑신제를 지내며 마을의 안녕을 기원한다. 말티라는 지명에서 나타나듯 이곳은 예전엔 옥천으로 통하는 큰 길목이었다.
청마초등학교 폐교 부지 앞으로 금강 본류가 흐른다. 상류답게 아주 우렁차다. 센 강물이 조약돌에 부서지는 소리가 요란하고 시원하다. 탑산에서의 신록샤워를 다시 한 번 말끔하게 정리해주는 느낌이랄까?

글=이기준 기자 lkj@ggilbo.com  사진=이승훈·이기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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