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청호오백리길 5구간의 가을]

산에선 울긋불긋 단풍이 물들고 들에선 새하얀 억새가 춤을 춘다. 거리에선 샛노랗게 물든 은행나무가 운치를 더한다. 거스를 수 없는 자연의 시계는 또다시 가을을 지나고 있다. 일 년에 한 번 꼭 되돌아오는 시간이지만 가을이 기다려지는 건 감수성을 자극하는 이 ‘가을색’에 대한 그리움 때문이리라.

나무들은 제멋대로 가을색으로 물드는 것 같은데 묘하게 어우러진다. 사람이 했다면 언밸런스의 극치일 텐데 자연이 스스로 그린 그림은 퍼펙트한 가을을 만들어낸다. 높고 파란 하늘, 그리고 그 하늘을 닮은 호수가 배경으로 깔리면 금상첨화다. 자연의 조화라는 게 바로 이런 게 아닐까.

해와 달, 하늘과 물, 나무는 모두 제각기 존재하지만 서로에게 좋은 영향을 주면서 그렇게 가을을 완성해간다. 자연의 일부지만 사람이라서 다행인 건 이 자연의 조화를 느끼고 즐길 수 있기 때문이 아닐까.

   만추, 그 色의 찬미   
-대청호오백리길
5구간의 가을-

대전 동구 흥진마을 억새숲길(신상동) - 백골산성 - 방축골(신촌동)

#1. 흥진마을의 가을동화

계절의 변화에 맞춰 대청호도 옷을 갈아입었다. ‘가을의 운치란 바로 이런 것’이란 걸 소리 없이 뽐낸다. 대청호오백리길 5구간은 대청호의 숨겨진 보석이다. 특히 가을에 그렇다. 흥진마을-백골산-방축골로 이어지는 호반길 10㎞ 구간은 가을의 매력에 흠뻑 빠지게 할 요소들을 두루 갖춰 사진 찍는 재미를 선사하고 트레킹과 등산의 절묘한 조화는 걷는 즐거움을 느끼게 해준다. 억새로 시작해 억새로 끝나는 여정이다.

 
5구간 흥진마을 코스는 마을 한 바퀴 약 3㎞를 도는 둘레길이다. 신상교 아래에서 흥진마을에 발을 들이는 순간 예쁘게 물든 낙엽이 비처럼 쏟아지고 가을동화는 시작된다. 마음속 깊은 곳에서 추억을 소환하고 설렘을 끄집어내는 순수한 가을 이야기가 이곳에 있다.

흥진마을 가을동화의 주된 소재는 억새다. 햇빛에 반짝이는 하얀 솜털이 바람에 하늘거릴 때마다 마음은 한순간에 ‘무장해제’ 된다. 허전한 마음을 저격한 이 억새들의 향연은 마음을 추스를 시간도 허락하지 않고 가을동화의 몰입도를 점점 높여간다. 사람 키보다 웃자란 억새들이 인도하는 동화나라의 길을 따라 걷다 보면 하염없이 가을에 취한다.

억새의 향연을 뒤로하는 순간, 가을을 온몸으로 마주하기에 아주 딱 좋은 자리에 벤치가 놓여 있다. 경계의 담장이 무너지고 가을 정취가 온 마음을 가득 채운다. 따사롭고 포근하고 평화로운 순간을 영원히 붙잡고 싶은 마음에 발길은 떨어지지 않고 엉덩이는 벤치 더 깊숙한 곳으로 파고든다. 사진으로는 도저히 다 담아낼 수 없어 흥진마을 가을색을 눈에 담고 또 담는다.

흥진마을 가을동화의 대미 역시 억새가 장식한다. 어마어마한 억새의 향연이 펼쳐지고 잔잔한 호수는 아기자기한 마을과 단풍의 운치를 또 한 번 담아낸다. 저물어가면서 더 뜨거워지는 만추(晩秋)의 이미지는 ‘행복 세포’를 깨우고 이내 꿈같은 시간에 대한 추억 한 컷을 마음에 새긴다. 바쁜 세상살이 탓에 자연에 무뎌진 감각도 되살아나 궁극의 힐링을 맞이한다. 카메라 배터리는 가을동화에 취한 이 짧은 시간에 참 많이도 닳았다. 

#2. 느림의 미학: 백골산 산행의 중독성

흥진마을 가을동화에서 빠져나오면 바깥아감이다. 마을 이름이다. 산의 형세가 물고기의 아가미를 닮았다고 해서 아가미산. 이 산 아래 마을은 그래서 아감이라 불리고 다시 산 안쪽에 있는 곳은 안아감, 밖에 있는 곳은 바깥아감이 됐다. 바깥아감에서 백골산에 오른다.

산 이름이 무시무시한데 이 산의 내력 또한 무시무시하다. 나제동맹이 깨진 뒤 백제와 신라는 명운을 건 한판 승부를 벌이게 되고 치열한 전투가 이곳에서 시작됐다. 전투가 얼마나 치열했던지 이곳에 군사들의 백골이 산을 이뤘다고 전해진다. 대청호반 지명엔 백골산과 같이 전쟁의 참상에서 비롯된 것들이 많고 이때 축조된 산성도 많다.

백골산에 오르다 보면 참 묘한 기분을 느끼게 된다. 산허리를 관통해 지나가는 고속도로 탓이다. 시속 100㎞가 넘는 속도로 쏜살같이 달리는 자동차의 소음과 백골산의 적막이 동시에 오감을 자극하면서 시간에 대한 상념에 휩싸이게 된다.

농경사회에서 근대화의 길로 접어들면서 우리의 정신과 신체는 기계의 속도에 맞춰지게 됐고 그렇게 개조됐다. 산업화시대에 태어난 사람들은 아예 기계문명에 최적화된 노동자로 훈육됐다. 세상은 발달했고 경제적 풍요는 더 확대됐다. 그러나 마음 한 편은 구멍이 뚫린 것처럼 허전하다. 속도가 경쟁력이 돼버린 시대의 부작용이다. 그래서 자연에서 힐링을 구하는 사람들이 많아지는 것인지도 모른다.

바쁘게 돌아가는 세상에서 천천히 걸으며 여유를 부릴 수 있다는 건 분명 행복한 일이다. 시간에 지배당하지 않고 온전히 자신의 시간을 누리기 때문이다. 자연의 시간에 몸을 맡긴 채 느림의 미학을 온몸으로 체감하면서 ‘시간’이라는 것에서 나름의 의미를 찾아보는 일이 백골산 산행의 매력 중 하나다.

백골산 산행은 초반 약 30분 정도 가파르게 전개되다 해발 약 330m 정도의 강살봉에 오르면 고속도로의 소음은 사라지고 완만한 능선이 펼쳐진다. 꾀꼬리봉을 지나 마지막 10분 정도 더 힘을 내면 백골산 정상(백골산성)에 도달한다. 산행 길이는 약 2.8㎞, 시간은 약 1시간 10분 정도 소요된다.

향긋한 산내음을 음미하며 정상에 오르면 대청호의 절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대청호가 ‘내륙의 다도해’로 불리는 이유를 알 수 있다. 추동과 최근 대청호반의 핫 플레이스로 뜨고 있는 방축골이 한눈에 들어오고 저 멀리 대청호 1·2 구간과 충북 문의수역까지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가파른 비탈을 오른 탓에 ‘헥헥’거리던 숨은 한순간에 멎고 심장이 두근거린다. 절골마을 방면 하산길에선 광활한 대청호의 장관을 더 가까이서 접할 수 있다. 가까이서 보는 만큼 가을의 깊이도 더 깊다.

#3. 대청호 핫 플레이스, 방축골

대전 동구 추동이 대청호반의 대중적인 관광지라면 신촌동 방축골은 요즘 뜨는 소위 핫 플레이스다. 고급스러운 전원주택들이 들어서고 최근 카페 팡시온이 유명세를 타면서 방축골의 지형이 바뀔 정도로 변하고 있다. 대청호반의 정취에 취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차 한 잔의 여유가 생각나기 마련인데 그 아쉬움을 팡시온이 달래준다.

시간을 조금 거슬러 올라가면 원래 이곳은 ‘꽃님이’ 레스토랑이 개척한 곳이다. 한때 이곳은 연인들의 데이트코스로 명성을 날리던 곳이었는데 꽃님이가 폐업하면서 잊혔다가 팡시온이 생기면서 다시 뜨기 시작했다. 봄엔 벚꽃, 가을엔 억새와 단풍의 향연을 즐기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찾는다.

대청호 수위에 따라 모습을 달리하는 것도 이곳의 매력이다. 가물어 물이 줄면 이곳은 이국적인 표정을 짓는다. 요즘은 물이 차올라 위태롭게 고개만 빼꼼 내민 채 하늘거리는 억새의 물결이 예술이다. 노을 지는 대청호반에서 일렁이는 억새들의 향연은 가히 환상적이다. 마을 깊숙이 들어온 호반은 바람의 영향도 덜 받는 탓에 수면에 비치는 자연의 모습도 더 뚜렷하다. 발길이 떨어지질 않는다.

해는 붉게 타오르며 서산으로 지고 동시에 반대편에선 달이 떠오른다. 이렇게 가을의 한 조각이 또 떨어져 나간다. 대청호반엔 더 깊은 평화가 밀려오고 가을은 더 익어간다. 

이기준 기자 lkj@ggilbo.com
with 강춘규·박동규·차철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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