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멀리... 올 한해 묵은 나를 보낸다

 

시나브로 찾아온 겨울, 뜨거웠던 2016년의 열정도 식어간다. 한 해의 끝이면서 새로운 시작을 맞이하는 시점에서 만감이 교차하는 오묘한 기분을 온전히 감당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허전함이 물밀 듯 몰아치는 순간, 흘러간 시간을 되짚어 삶을 반추하며 채울 건 채우고 비워낼 건 시원하게 털어내는 수밖에…. 이것이 대부분의 사람이 새로운, 앞으로 다가올 시간을 준비하는 일반적인 자세다.

대청호의 고심도 깊다. 잔뜩 찌푸린 날씨까지 더해져 스산한 느낌마저 든다. 하늘빛이 우울하니 잔잔한 호수의 표정도 어둡다. 무슨 시름에 잠겨 있을까. 자연의 이치대로 말없이 그대로 그 자리에 있었을 뿐인데 말이다. 흐린 겨울 어느 날 대청호에서 서로의 마음을 부둥켜안고 동병상련을 느끼며 지금 이 순간 필요한 위로의 힐링 조각을 찾아 맞춘다.

 

#. 내탑수영장의 추억을 찾아서

대전과 청주의 경계, 대청호오백리길 5구간엔 히든카드가 있다. 5구간의 종점, 6구간의 시작점인 방아실 입구 와정삼거리에서 대청호를 가로질러 깊숙이 파고드는 고해산을 타는 거다. 거대한 호수를 가로지르니 능선을 타고 산행을 하면서 보이는 황홀한 장관은 ‘말하면 입 아플 정도’다.

[관련기사] - 2015년 가을 5-1구간 내탑수영장길

고해산 정상은 220m 정도로 높지 않다. 오르막도 그리 가파르지 않다. 그러나 얕잡아 보면 큰코다친다. 고해산 등산의 목적이 호수와 맞닿은 산의 끝을 향하는 것이라면 그렇다. 고해산 등산로는 단 하나다. 출발점에서 시작해 산의 끝에 도달한 뒤 다시 그 길로 되돌아와야 한다는 얘기다. 그 길이가 자그마치 왕복 약 8㎞다. 걷는 데만 꼬박 3시간을 투자해야 한다. 또 다른 고비가 있다. 봉우리 두 개를 넘어야 한다. 고해산 정상 하나, 그리고 탑봉(140m) 하나인데 봉우리와 봉우리 간 능선이 급해 여정을 두 번 소화해야 하는 부담이 있다. 산행의 강도는 그리 어려운 건 아닌데 괜히 지치는 기분이랄까?

이 같은 수고로움에도 5-1구간 고해산·탑산 종주를 마다하지 않는 건 그만한 이유가 있다. 그 수고로움에 대한 보상이 분명히 따르고 또 충분하기 때문이다. 흘린 땀에 대한 보상의 순간, 힐링의 정의는 머리로 이해되는 게 아니라 모든 감각기관에 의해 자연스럽게 체득된다.

5-1구간은 내탑수영장의 추억을 따라잡는 여정이다. 경부고속도로가 뚫리고 자동차가 보급되기 시작한 1970년대 들어서면서 대전에 두 개의 수영장이 개장했다. 지금의 신탄진철교 아래에 있던 신탄진수영장과 바로 이곳 내탑수영장이다.

대청호 조성으로 이 지역이 수몰되기 전 이곳엔 여름만 되면 수많은 파라솔과 텐트가 줄지어선 수영장이었다. 현대식 수영장을 그려보겠지만 그건 아니다. 그냥 강변에서 물놀이를 즐기던 그런 곳이다. 산줄기를 따라 폭 약 100m 정도인 금강이 흐르고 강변엔 모래밭이 펼쳐진 이미지를 떠올리면 된다. 내탑수영장은 특히 모래밭이 넓었는데 모래밭 중앙에 돌산 하나가 섬처럼 솟아 있었는데 그게 바로 탑산이다.

탑산은 전설 하나를 간직하고 있다. 조선 초기에 여름 장마가 있었는데 전라도 무주 구천동에 있던 산이 금강을 따라 떠내려와 지금 이곳에서 멈췄다. 이 소문이 퍼지자 무주에 사는 산 주인이 내탑으로 와서 주민들에게 산의 값을 치르라고 했다. 그러나 주민들은 필요 없으니 다시 가져가라고 했다. 산 주인은 어쩔 수 없이 그냥 돌아오고 말았다고 한다.

십 년이면 강산이 변한다고 하는데 벌써 대청호가 조성된 지 40년 가까이 되는 상황에서 옛 모습은 그저 남아 있는 기록을 머릿속에서 이미지로 재현하는 수밖에 없어 아쉽기만 하다.

 

#. 끝의 절정, 절정의 끝

내탑수영장의 추억을 더듬어 보려면 고해산에서 시작해야 한다. 예전엔 약해산(若海山)이란 지명으로 많이 알려졌는데 최근 고해산(苦海山)으로 정리된 듯하다. 약해산이란 이름은 이 산에서 보는 대청호의 풍경이 마치 바다와 같다는 의미에서 붙여진 거다.

와정삼거리에서 ‘고해산 2㎞’ 방향 푯말을 따라 산에 오른다. 쉬엄쉬엄 20여 분 정도 오르면 왼쪽으로 대청호의 수려한 풍광이 눈에 들어온다. 마치 다도해의 모습처럼 크고 작은 섬들의 향연이 인상적이다. 고해산에선 정상보다 이곳의 조망이 가장 좋다.

40여 분 정도 산을 더 오르면 고해산 정상 표시를 볼 수 있다. 다시 하산길이다. 쉼 없이 내려가면 다시 오르막이 나온다. 탑봉에 올라야 한다. 탑봉은 해발 140m 정도로 그리 높지 않다. 20분 정도면 탑봉에 오를 수 있다. 이게 끝이 아니다. 다시 15분 정도 내리막을 타고 호수와 육지의 경계에 도달하면 신세계가 펼쳐진다.

 

 

내탑수영장의 추억을 좇아 땅끝을 향해 차근차근 발을 내디뎌 마침내 닿은 곳, 그곳엔 눈에 익지 않은 자연의 풍경이 살아 숨 쉰다. 추억의 옛 사진과는 전혀 다른 대청호의 푸른 물결이 일렁인다. 낯설지만 경이로운 풍경에 한 번 놀라고 의외로 맑은 물에 또 한 번 놀란다.

햇빛은 호수면에서 부서지고 햇빛을 머금은 파도는 땅끝에서 더 깊게 퍼진다. 땅끝에서 맞이하는 절경은 이 세상 절경의 끝이 어디인지 보여준다. 거대하고 환상적인 자연 앞에서 한순간에 천상천하 유아독존의 경지에 도달하는 짜릿함을 맛본다. 내탑반도의 이국적인 풍경과 함께 어우러진 대청호를 지긋이 바라보며 내탑수영장의 옛 모습을 머릿속에 그려본다.

 

지난해 11월 내탑반도, 내탑수영장 터.

 

#. 머릿속에 맴도는 여운

내탑반도 끝의 절경이 주는 깊은 여운은 다시 출발점으로 되돌아가는 시간 내내 수천 억 오감 세포에 오롯이 새겨진다. 왔던 길을 다시 되돌아가는 게 지루할 법도 한데 발걸음이 가볍다. 고해산과 탑산의 늘 푸른 소나무가 주는 향긋한 산내음과 대청호반이 아니면 찾아보기 힘든 이국적인 풍경이 한데 섞여 힐링의 원천이 되는 신비로운 경험 때문이다.

와정삼거리에 도착할 즈음 왼편으로 또 다른 땅끝 풍경이 펼쳐진다. 고해산 산기슭에 자리 잡은 배말마을에서 바라보는 대청호 풍경인데 내탑반도 끝의 절경에 버금간다. 와정삼거리에서 북쪽으로 도로를 따라 조금만 가면 배말 입구에 도착한다. 한적한 시골마을길을 따라 다시 호숫가로 진입한다. 호수가 마을 깊숙이 파고들어 길을 걷는 내내 특별한 대청호반의 풍경을 감상할 수 있다. 이 마을 역시 경치 좋은 명당은 묘지들이 차지하고 있다. 묘지를 발견하면 그곳이 바로 포토존이다.

배말에서 부엉데미뜰과 올개논골을 지나 반도 끝까지 가는 데 채 20분이 안 걸린다. 평화로운 마을 풍경이 정겹다. 반도 끝에 도달하면 대전과 청주의 경계에 있는 국사봉을 등진 아기자기한 대청호반이 한눈에 들어온다. 깊숙한 산골짜기 곳곳으로 물이 들어온 터라 아기자기한 반도들이 현란한 자태를 뽐낸다. 2015년 가뭄으로 바닥을 드러냈던 호반엔 다시 물이 들어차 생기가 돈다.

글·사진=이기준 기자 lkj@gg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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