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일보는 베이비부머 세대의 효와 사랑 이야기를 담은 임석원의 자전적 에세이 ‘나는 내 아내가 너무 좋다’를 온라인판을 통해 연재합니다. ☞본보 2017년 8월 9일자 10면 보도

1955년부터 1963년 사이에 출생한 우리나라 베이비붐 세대는 한국전쟁 이후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격변의 시대를 관통하며 살아온 세대로, 임석원의 에세이는 그 시대에 태어나 하고 싶은 것, 되고 싶은 것도 많았겠지만 자신을 위해서는 한 가지도 해 보지 못한 채 오직 가족만을 위해 굳세게 살아온 한 남자의 자전적 이야기이자, 곁에서 묵묵히 좋은 동반자가 되어 준 아내에 대한 절절한 고마움을 전하는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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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느리를 찾습니다

“에이, 보다보다 이런 데를 다 보다니…….”

어머니는 선을 보고 집에 들어오자마자 이렇게 말씀하시며 아가씨의 아버지와 어머니에 대해서 흠을 잡는 얘기를 늘어놓으셨다. 어머니는 또 여자 쪽을 소개한 고모부에 대해서도 평상시 감정이 좋지 않았던 부분까지 들먹이며 불만을 토해 내셨다. 나는 사실 맞선 본 아가씨가 마음에 들었기에 “전화드리겠습니다”라고 얘기하고 왔었다.

“아니, 장인 장모 될 사람을 갖고 그래요? 아가씨만 좋으면 되잖아요.”

“좋긴 뭐가 좋으냐? ‘삐이~’ 해가지고 뭔가 토라진 얼굴상인데.”

“왜요? 저는 괜찮던데요. 제가 키가 작으니 아가씨는 키가 커서 좋고요. 나가는 학교도 우리 집에서 멀지 않으니 맞벌이하기 아주 좋겠던데요. 장모 될 사람도 저를 아주 마음에 들어 하시는 것 같고요.”

“얘야, 나는 맞벌이하는 며느리 싫다. 너 돈 잘 버는데 며느리까지 나가서 일할 것 없다. 학교 선생들이 집에서 남편한테 하는 것 들어보니까 안 되겠더라. 학교에서 아이들한테 뭐든 시켜 버릇해서 집에서도 남편한테 이것저것 다 시킨다더라. 내가 선생 하는 네 막내 이모네 집에 가보니 네 이모가 이모부한테 이러더라. ‘애 아빠, 걸레 좀 빨아 갖고 와서 여기 좀 닦아요.’ 이게 뭐냐? 남자가 밖에서 일 마치고 돌아오면 집도 깨끗이 치워져 있고 편하게 쉴 수 있어야지. 선생 며느리 봤다가 너 심부름이나 시키는 꼴 보란 말이냐? 나 그런 며느리 얻고 싶지 않다.”

어머니는 맞벌이하는 며느리를 원하지 않으셨다. 어머니가 아버지와 함께 장사를 하시면서 자식들 기르고 가르치다 보니 남편에게도 자식에게도 안락한 가정을 만들어 주지 못했던 게 평생 마음에 걸리셨던 것이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 당시에도 학교 선생님은 1등 신붓감이었는데도 어머니는 사회적 지위나 남들이 선망하는 자리 같은 것을 보지 않으셨다.

아버지는 좋아했는데 어머니가 퇴짜 놓으신 경우도 있었다. 완벽하게 결혼 준비가 되어 있다는 서울 부잣집 아가씨였다. 장인 될 분이 건설업을 하시면서 돈을 많이 벌고 강남에 산다고 했다. 딸만 셋인 집인데 상대는 첫째 딸이란다. 그런 집이 시골 출신의 평범한 우리 집과 선을 보게 된 것은 내가 대기업 건설회사에 다녔기 때문이었다. 역시 장인 될 분은 촌티 나는 나의 아버지와는 확연히 비교가 되었다. 그 어르신은 마치 회사 입사지원자를 대하는 면접관처럼 나에게 이것저것 물어보셨다. 어머니는 이런 모양새를 영 맘에 들지 않아했다. 장인 될 사람이 신랑 될 사람에게 이런 것 저런 것 가리지 않고 물어보다니…. 아버지는 잔뜩 긴장하고 계시다가 내가 바로 대답을 못하고 주춤거리면 이렇게 말씀하셨다.

“우리 아들이 아직 회사 들어간 지 얼마 안 되어서 그런 건 잘 모를 겁니다.”

그런데 내가 누구인가? 어머니 아들 아닌가? 어머니는 경우에 어긋나면 때론 앙칼지게 나서는 분이 아닌가? ‘목에 칼이 들어와도 할 말은 해야 한다’라고 어머니에게서 배우지 않았던가? 물어보는 대로 꼬박꼬박 대답을 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아버지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 양반이 너 잘 본 것 같더라. 그래, 잘했다. 그 집에 딸만 셋이라니 네가 그 집 큰딸한테 장가가면 그 회사는 우리 거다. 네가 그 회사 인수하는 거야. 동생들도 졸업하고 다른 회사 들어가서 윗사람들한테 굽실거릴 것 없다. 네가 그 회사 사장하고 동생들은 임원 하는 거다.”

“꿈도 야무지셔. 그런 집 나는 싫다. 얘야, 너 아예 그 집으로 장가갈 생각 마라. 어디 돼먹지 못한 사람들이 신랑 측 부모 앞에서 신랑 될 사람을 심문하듯이 이거 저거 따져 물어? 너 그 집 데릴사위로 갈 일 없다. 남자는 자기 집보다 좀 못한 집의 여자를 데려와서 큰소리치고 살아야지. 돈 좀 있다고 경우 없는 짓거리 하는 집에 장가갈 생각 꿈에도 하지 마라. 지금 회사에서 버는 것 갖고도 실컷 잘 먹고 잘 살 수 있다. 우리는 너 만큼 못 벌었어도 자식들 다섯이나 다 가르치고 잘 살았다.”

그러나 아버지 생각은 달랐다.

“아무리 네가 잘 벌어도 월급쟁이다. 사업을 해야 큰돈을 모으는 거다. 사람은 돈이 있어야 무시당하지 않는다. 우리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돈 없어서 무시당한 적이 어디 한두 번인 줄 아느냐? 돈 없으면 장사도 못해. 물건 갖다 달라고 주문이 들어와도 돈이 없으면 물건을 사서 갖다 줄 수가 없잖아. 우리 평생에 그런 부잣집 만나기 힘들다. 네 엄마가 나서서 일 틀어지게 만드는구나.”

아버지는 아들을 부잣집으로 장가보내고 싶어 하셨다. 또 이미 잘 닦인 회사를 물려받을 수 있으니 동생들까지도 취직 걱정 끝이다. 그러나 어머니의 반대를 꺾을 수 있는 아버지가 아니었다. 아버지는 그저 순하고 열심히 일만 하는 분이지 자기주장을 관철하지는 못하시는 분이었다.

어머니는 친척이며 교회 친한 사람들에게 아들 중매를 부탁하였고 그들이 소개하는 데를 골라서 열댓 번 맞선을 보게 했다. 세상의 모든 어머니들에게 당신의 아들이 가장 잘난 존재이듯이 어머니에게 있어서도 큰아들인 나도 그랬다. 어렵게 5남매를 키우고 가르치신 어머니에게 학교에 다닐 때는 공부 잘하고 졸업한 후에는 대기업에 취직하고 3년간의 해외근무로 나름 큰돈을 모아 서울에 아파트까지 장만한 아들이 일등 신랑감으로 보일 수밖에 없었다. 어머니는 선을 보는 자리마다 늘 당당하게 말씀하셨다.

“우리 아이는 5남매의 장남입니다. 지금은 서울에서 회사 다니니 우리와 같이 살 수 없어도 늙으면 힘없는 부모를 모셔야 될 테고, 동생들이 서울에서 학교에 다니게 되거나 직장을 잡게 되면 데리고 있으면서 밥도 해줘야 하고 빨래도 해줘야 합니다.”

어머니는 큰아들의 아내를 찾고 있는 게 아니라, 우리 집 식구 일곱 사람을 잘 섬길 수 있는 며느릿감을 찾고 계셨다. 선을 보면 볼수록 어머니의 마음에는 첫 번에 본 아가씨가 점점 더 빛을 발하는 것이었다. 그 아가씨는 처음 보았을 때 예쁘다거나 어느 부분이 매력이 있다거나 확 끄는 뭔가 있는 그런 인상을 주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냥 조용하고 순하게 보이는 참한 아가씨였다. 열댓 번 선을 본 후 어머니가 선언하셨다.

“아무래도 안 되겠다. 맨 처음 본 선화동 그 아가씨랑 해라.”

어머니는 결혼할 당사자인 아들의 마음은 상관없이 또 아버지의 의견도 묻지 않고 당신이 마음 가는 대로 결정을 하시었다.

어머니는 착한 며느리 맞을 복이 있었다. 인연이 되려고 그랬는지 장모님은 어머니의 조건(?)에 응하셨고 신붓감 역시 친정어머니의 뜻을 따랐다. 그녀와 나는 세 달 동안 내 근무지인 서울과 그녀가 사는 대전을 오가며 데이트를 하고 나서 결혼을 하게 되었다. 철저한 기독교 집안의 부모님 밑에서 순하디 순하게 자란 아내가 호랑이 같은 시어머니가 계신 우리 집으로 덜컥 시집을 오게 된 것이었다.

사실 그때까지 나는 연애 한 번 해보지 못했다. 학교 다닐 때는 가정형편이 어려워 장학금을 받지 못하면 학자금 대출을 받아야 했으므로 공부하느라 여학생 쳐다볼 여유가 없었다. 용돈은 아르바이트를 하여 스스로 벌어야 했으니 용돈이 충분할 리 없었다. 그러니 마음에 드는 여학생을 발견해도 데이트 신청을 해 볼 수가 없었다. 졸업 후 내로라하는 대기업에 취직을 하였지만 바로 돈 벌러 해외로 나갔으니 연애 상대를 만날 기회도 없었다. 귀국했을 땐 어느덧 서른을 향하고 있었지만 대기업의 바쁜 업무에 치여 이래저래 연애할 꿈은 꾸지도 못했다. 게다가 부모님과 동생 넷을 거느린 장남과 결혼하겠다고 할 여자가 어디 있을까? 우리 5남매는 모두 어머니 말씀이라면 절대로 거역하는 법이 없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순종만 요구되는 며느리 자리에 누가 오려고 하겠는가? 나는 가만히 어머니의 선택을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아내는 학교 졸업 후 부모님 곁을 떠나지 않고 대전의 한 공기업에 취직하여 몇 년째 근무 중이었다. 어려서부터 신앙생활을 하였으므로 교회의 여러 모임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남자를 사귈 기회는 많았지만 부모님께서 허락하지 않았다고 한다. 스물다섯을 넘기도록 특별히 사귀는 남자가 없자 주위에서 선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러나 선을 보지는 않았다고 한다.

우리는 둘 다 연애도 못해보고 부모님 말씀에 순종하여 결혼을 하게 되었다. 몇 번의 짧은 만남에서 연애감정이 펑펑 샘솟는 정도는 아니었지만 결혼을 전제로 만났으니 우리는 만날수록 서로에 대한 신뢰감을 확신하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결국 어머니의 ‘며느리 구하기’는 결실을 맺었다.

1983년 여름, 아내와 나는 앞으로 둘이 걸어갈 새로운 인생 여정의 막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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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임석원은...

   
 

1956년 지리산 시골마을에서 태어났다. 대전고와 한남대를 졸업한 후 1980년 S그룹 S건설에 입사해 23년을 근무하면서 사우디·싱가포르·인도네시아 등 8년간 생활했다. 2003년 영국 유통회사 B&Q 구매이사, 2004년 경남 S건설 서울사무소장으로 일했다. 2009년 H그룹 H건설에 입사해 리비아에서 자재·장비 구매업무를, 2011년 E그룹 E건설에 입사해 중국과 동남아 대외구매를 담당했고, 2013년에는 전북 J건설 소속으로 사우디에서 근무했다. 지금은 34년 직장생활을 마감하고 미군부대에서 계약직으로 근무하면서 여러 분야의 책을 읽고 토론하는 분당 판교지역 독서모임에 참여하고 있다. 인생 후반기엔 ‘책 읽고 여행하고 글 쓰는 삶’을 계획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