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통사고로 죽을 뻔

금강일보는 베이비부머 세대의 효와 사랑 이야기를 담은 임석원의 자전적 에세이 ‘나는 내 아내가 너무 좋다’를 온라인판을 통해 연재합니다. ☞본보 2017년 8월 9일자 10면 보도

1955년부터 1963년 사이에 출생한 우리나라 베이비붐 세대는 한국전쟁 이후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격변의 시대를 관통하며 살아온 세대로, 임석원의 에세이는 그 시대에 태어나 하고 싶은 것, 되고 싶은 것도 많았겠지만 자신을 위해서는 한 가지도 해 보지 못한 채 오직 가족만을 위해 굳세게 살아온 한 남자의 자전적 이야기이자, 곁에서 묵묵히 좋은 동반자가 되어 준 아내에 대한 절절한 고마움을 전하는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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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통사고로 죽을 뻔

나는 직무상 종종 현장이 있는 작은 도시 하일에서 구하지 못하는 자재를 사러, 또는 수입자재 통관을 위해 사우디의 수도 리야드나 서부 항구도시 제다, 동부 항구도시 담맘으로 출장을 갔다. 그러나 사우디 북부 내륙 한가운데 사막 속에서 생활하는 우리 직원들은 좀처럼 다른 지역에 가볼 기회가 없었다. 우리나라 ‘읍’ 정도 되는 하일 시내에 나가봤자 가볼만한 데가 없었다. 외국 사람들이 가서 먹을 만한 음식점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극장이나 오락거리가 있지도 않았다. 기껏해야 옷가게나 기웃거리고 가게에 나온 여자들이나 힐끔거리며 쳐다보는 게 전부였다. 그래 봤자, 여자들의 얼굴은 물론이고 손, 발도 제대로 볼 수 없었다. 중동 이슬람교도 관습상 여자들은 외출 시 검은 천으로 온몸을 둘러쓴 복장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또 여자 혼자는 말할 것도 없고 여자들끼리만 외출하는 경우도 없다. 남편 또는 오빠나 남동생이 여자들을 데리고 나오는 게 관습이다. 이러한 나라에서 살고 있으니 두 주마다 쉬는 휴일인 금요일(중동 이슬람교도 나라에서는 금요일이 휴일임)에도 직원들은 거의 현장 숙소에서 늦잠을 자거나 사무실에 나와 고국에 편지를 쓰거나, 할 게 없으니 그냥 일이나 하기도 한다. 40도를 오르내리는 사막의 뜨거운 날씨에 어디를 간단 말인가? 사우디에 나와 두 번째 맞는 추석 때 현장 팀장들이 피 끓는 젊은 직원들 바람 좀 쐬도록 바닷가로 하루 보내주자는 건의를 했다. 리야드에 근무하던 한 직원이 낚시를 좋아해 휴일에 낚시를 가곤 했던 담맘 해변을 소개했다. 현장 젊은 직원들은 추석 전날 작업을 마치고 저녁을 먹고 출발하기로 했다. 낮에는 차 에어컨을 최고로 틀어도 내리쬐는 햇볕을 피할 수 없으니 장거리 차량 운행은 가급적 하지 않는다.

젊은 우리 사원과 대리 7명은 지엠 써브반(GM Suburban)을 타고 담맘으로 출발했다. 차량 운전은 운전기사 두 명이 교대로 하기로 했다. 현장 주방에서 김밥과 고기, 각종 반찬, 과일을 준비해 큰 아이스박스 세 개에 담고 ‘싸대기’라고 불리는 근로자들이 담근 술도 몇 병 챙겨 넣었다. 고기를 구워 먹을 불판이며 각종 냄비, 접시 등 주방장이 세세한 것까지 다 실어줬다. 하일에서 리야드까지는 800㎞, 리야드에서 담맘까지는 450㎞로 합 1250㎞ 거리다. 시속 150㎞로 달려도 중간에 주유하고 10시간이 넘는 여정이다. 담맘에는 추석 날 아침 7시 전후 도착 예정. 젊은 우리들은 왁자지껄 떠들며 기분 좋게 출발했다. 사막을 빠져나와 아스팔트 도로에 진입하자마자 현장의 분위기 메이커, 1공구 공사담당 이 기사가 분위기를 잡는다.

“야~ 홍 방장(홍 주방장) 김밥 좀 먹어보자. 프랑스 요리 교육받은 지 얼마 안 됐으니 홍 방장이 싼 김밥은 프랑스식이 아닐까? 달팽이라도 들어있는지 모르지.”

“야, 저녁 먹은 지 얼마나 됐다고 그래? 김밥은 내일 먹을 건데.”

곽 대리가 제지를 했지만 먹는다는 사람을 말릴 수는 없었다.

“내일은 무슨 내일? 사우디에서 내일이 어디 있어? 압둘라(하일 시내 자재 상가 사장)가 오늘 없으니 내일 갖다 놓겠다고 ‘부꾸라(내일) 인솰라(신의 뜻대로)’ 해도 내일 자재 들어오는 것 봤어? 지금 내 입에 들어가야 먹는 겨. 내일 먹자고 아껴놓고 내일 못 먹을 수도 있어.”

이 기사는 아이스박스에서 김밥 한 상자를 꺼냈다. 한 상자는 2~3인분 정도 됐다. 젊은 우리들은 밥 먹은 지 2시간도 안 지났는데도 금방 한 박스를 해치웠다.

“야~ 이거 달팽이 안 들었잖아? 다른 거 한 박스 더 풀어보자.”

또 한 박스도 금방 해치운다.

“야, 다 먹고 내일은 뭘 먹으려고 그러냐? 이제 그만 먹어.”

정 대리가 제지를 했다.

“싸대기는 지금 먹어선 안 되겠지?”

“야, 내일 먹어야지. 술 먹고 경찰 검문에 걸렸다간 골로 간다. OO건설 세 사람 술 먹고 걸려 감방 가 있는 것 몰라?”

피 끓는 청춘들이 정말 오랜만에 실컷 떠들어 본다. 그렇게 떠들다가 밤 1시, 2시가 넘어가자 한 사람, 한 사람 잠이 들었다. 사고는 새벽 3시쯤 났다. 리야드를 통과하고 막 벗어난 지점에서 도로공사를 하고 있었다. 공사 구간의 우회도로에서 속도를 줄여 운행했어야 했다. 그러나 리야드의 복잡한 시내를 답답하게 통과한지라 유 기사가 오히려 속도를 올렸기에 발생한 사고였다. 리야드 시내를 벗어나 길게 뻗은 넓은 도로를 만나자 운전을 하던 유 기사가 속도를 쭈욱 올렸는데 갑자기 좌측으로 90도 급각도의 우회도로를 만났다. 속도를 줄여 좌회전을 했어야 했는데 속도를 미처 줄이지 못하고 좌회전하면서 차량 앞 우측 조수석 코너가 공사장 흙더미와 충돌하고야 말았다. 갑작스러운 사고에 차 안에선 일대 혼란이 일어났다. 나는 어찌 된 영문이지 몰랐다. 왜 차를 세웠는지 의아했다. 잠에 취해 비몽사몽 상태에서 나는 용변 볼 사람들 용변 보라고 차를 세웠는가 보다 생각하고 차문을 열고 나왔다. 밖으로 나오니 갑자기 소변이 보고 싶어졌다. 후미진 곳에 가서 시원하게 소변을 보고 차로 돌아오니 모두들 “아이고!~”, “아이고!~” 저마다 비명소리를 질러댔다.

큰 사고였다. 맨 뒷좌석에서 혼자 드러누워 자고 있던 정 대리가 부웅 떠올라 바로 앞좌석의 곽 대리의 상체에 떨어져 곽 대리 허리가 꺾였다. 정 대리의 허리도 온전할 리 없었다. 평상시도 오른쪽 다리가 아프다던 권 기사도 오른쪽 다리를 잡고 끙끙대고 있었다. 운전을 하던 유 기사는 운전대에 가슴을 박아 갈비뼈가 부러졌다. 새벽인지라 차량이 많진 않았지만 지나가던 누군가가 신고를 했는지 앰뷸런스와 경찰차가 금방 왔다. 이런 큰 사고 중에도 다치지 않고 차 밖에 나와 있던 직원들 중 리야드 지리를 아는 내가 나섰다. 경찰관과 이야기를 하는데 그의 얼굴이 어른거리며 명확하게 보이지 않았다. 그제야 나는 내 안경이 어디론가 날아가 버렸다는 것을 알았다. 나는 경찰관에게 당시 한국 간호사들이 나와 근무하고 있는 리야드 중앙병원(Central Hospital)으로 데려가 달라고 했다. 그 병원 간호사들은 한국 사람들이었기에 다친 우리 직원들이 증상을 쉽게 전달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사고 부상자들을 병원으로 옮겨 입원시키고 리야드 지사에 보고를 했다. 직원 7명과 운전기사 2명 등 9명이 출발했는데 온전한 사람이 이 기사와 김 대리, 그리고 나 세 명뿐이었다.

곽 대리는 허리 부상이 심각하고, 유 기사는 갈비뼈 3개가 부러져 임시조치 후 귀국 예정이었다. 권 기사, 정 대리, 이 대리와 예비 운전기사 원 기사는 당분간 입원해야 했다.

주변 사람들은 사망자가 없으니 그나마 천만다행이었다고들 말했다. 노련한 운전기사가 운전을 했기에 이 정도로 부상자만 나온 거라 했다. 속도를 줄이지 않은 상태에서 도로 각도대로 급하게 좌회전을 했다면 차가 전복해 충돌했을 것이라고 했다. 그랬다면 우린 다 죽었을 거란다. 9명이 출발했는데 3명만이 현장으로 귀임하게 됐었다. 리야드에서 하일로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우리 세 사람은 어깨가 축 처져 있었다. 현장 전체 직원이 전부 15명인데 일선 현장에서 뛰는 직원 4명과 장거리 자재와 식품을 실어 나르는 운전기사 2명을 다 병원에 두고 어떻게 얼굴을 들고 현장으로 들어갈지 참으로 막막했다. 그때 침묵을 깨고 현장 분위기 메이커 이 기사가 침울한 상황을 바꿔 보려고 말했다.

“어제 김밥 못 먹게 했을 때 안 먹었으면 프랑스 요리사 홍 주방장 김밥 맛도 못 봤을 뻔했잖아. 사우디에서는 내일은 없다니까. 그나마 두 상자라도 먹었기에 우리는 허리에 힘이 들어가 안 부러진 거야. 우리 못 먹게 하고 안 먹은 곽 대리, 정 대리 둘 다 허리 부러졌잖아.”

그 말에 침울해 있던 우리 두 사람은 쓴웃음을 지었다.

나는 리야드나 제다, 담맘으로 자재 구매차 또는 수입자재 통관 차 출장을 다닐 때 비행기를 탔다. 사우디 현지에서 구매하는 자재든지 수입, 통관한 자재든지 물량이 많아 트럭 두 대가 넘을 경우에는 운송회사를 수배해 하일 현장으로 보냈다. 물량이 많지 않은 경우에는 현장 차량을 리야드나 제다, 담맘 등 구매처나 통관 장소로 오라고 해 실어 보냈다. 내가 귀국 전 카고트럭 한 대분의 공사 마감자재를 담맘에서 구매하게 됐다. 나는 항공편으로 내려가고 현장에 있는 카고트럭을 구매처로 오라고 할 예정이었다. 그런데 카고트럭을 운전하는 이 기사가 귀국을 20여 일 앞두고 혼자 장거리 운행을 하려니 마음에 부담이 됐던지 나보고 비행기 타지 말고 트럭을 타고 함께 가자고 했다. 이 기사와 나는 사우디에 나올 때 김포공항에서 함께 비행기를 탔던 사우디 입국 비행기 동기였다. 또 귀국도 3주 후 같은 날 같은 비행기를 타기로 예정돼 있었다. 나도 귀국 전 하일~담맘 간 1250㎞의 장거리 차량 여행을 경험하고 싶었다. 지난해 추석 때 우리 젊은 직원들이 낚시 가려다 리야드에서 사고로 실패했던 코스다. 장거리 운행 시 통상 낮에는 너무 뜨거워 출발하지 않는다. 저녁을 먹고 사우디 사람들이 둘러쓰는 빨간색과 하얀색의 격자무늬 ‘슈마그’를 물에 적셔 머리와 얼굴에 둘러쓰고 출발했다. 그 당시 트럭에는 에어컨이 없다 보니 차 창문을 열고 달릴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물수건을 만들어 둘러써야 사막의 뜨거운 바람이 세차게 불어 들어와도 물수건을 거치면서 시원한 기운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었다. 시속 100㎞가 넘게 달려도 중간에 두세 번 쉬게 되면 14시간이 걸린다. 목적지인 담맘에는 아침에 더워지기 전에 도착해야 한다. 400㎞ 더 달려 리야드와 하일의 중간쯤 위치한 도시, 브라이다를 지나자 밤 12시가 지났다. 이 기사와 나는 주유소에서 주유를 하고 야참을 먹었다. 우리 한국 사람이 장거리 운행 시 먹는 식사는 보통 사우디의 얇고 넓적한 빵(걸레빵이라고 불렀음)에 치즈를 싸서 콜라와 함께 먹는 것이었다. 종종 닭고기를 곁들여 먹기도 했으나 수저가 안 나오고 손으로 먹어야 했기 때문에 잘 안 먹었다. 리야드를 지나 새벽 4시쯤 한 번 더 쉬고 담맘을 향해 달렸다. 어슴푸레 날이 밝아오고 담맘이 가까이 다가왔다. 이 기사는 달리면서 담맘 지도를 꺼내 나에게 줬다. 나는 한 번도 자동차로 담맘에 들어가 보지 않았었다. 내가 지도를 펼쳐 우리가 어디쯤 가고 있는지, 담맘의 어느 방향으로 들어가게 되는지를 찾고 있었다. 그때 이 기사가 “임 대리님은 담맘에 차 타고는 안 와 봤죠. 지도 이리 주세요. 제가 볼게요.” 하면서 지도를 가져갔다. 이 기사가 2차선으로 차를 운전하면서 지도를 보는데 내가 달리는 우리 차 바로 앞에 정차해 있는 트럭을 발견했다. “앗, 차!” 내가 소리를 지르자, 이 기사는 앞차와 충돌 직전에 급히 차를 운전대 쪽으로 틀었다. 긴 카고트럭이 휘청거리면서 흔들렸다. 이 기사는 백미러로 우리 트럭 뒷부분이 정차해 있던 차와 스치는 것을 봤고 나도 이 기사도 부딪히는 ‘찌지직’ 소리를 들었다. 하마터면 조수대에 탔던 나의 목숨이 끝나버리는 순간이 됐을 터였다. 이 기사는 정차해 있던 트럭과 접촉사고를 냈으니 도망가기 바빴다. 다음 주유소에서 기름을 넣고 주유소 뒤편 공터에 차를 주차했다. 이 기사는 밖으로 나와 땅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이 기사가 울렁거리는 가슴을 진정하고 다시 차에 오르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까딱했으면 옆 조수석에 타고 있던 나를 죽이는 엄청난 사고를 낼 뻔했으니. 정말이지 순간이었다. 우리가 추돌한 트럭은 담맘에 거의 다 오자 도로변에 세워놓고 휴식을 취하고 있었던 거였다. 화물차들은 대개 밤새 달려와 목적지 도시 30분~1시간 전의 위치에서 쉬었다가 화주와 약속시간에 맞춰 그 도시로 들어간다. 이 기사도 나도 정말 10년은 감수한 사건이었다. 담맘에 들어가서 식당에 들어갔지만 이 기사는 아침을 먹지 못했다. 나도 제대로 음식을 먹을 수가 없었다.

현장 근로자들이 아니라 직원들의 경우 사우디나 중동에선 공사 현장에서 일어나는 안전사고보다도 도로에서 일어나는 교통사고로 죽거나 불구가 되는 수가 더 많았다. 우리 현장에서도 건축 최 대리가 현장에서 그다지 멀리 떨어지지 않은 도로에서 원인이 밝혀지지 않은 차량 전복사고로 죽었다. 그는 이혼한 어머니가 브라질에 가서 살고 있어 휴가 때 만나러 간다고 현장에서 돈도 안 쓰고 여비를 모으며 1년을 고대하고 있었다. 토목 곽 대리는 허리가 부러졌으니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지…. 우리 현장에서 15명 중 2명이 죽거나 불구가 됐다. 나는 업무상 우리 현장에서 차를 가장 많이 타는 사람이었다. 교통사고 당할 위험 제1순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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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임석원은...

1956년 지리산 시골마을에서 태어났다. 대전고와 한남대를 졸업한 후 1980년 S그룹 S건설에 입사해 23년을 근무하면서 사우디·싱가포르·인도네시아 등 8년간 생활했다. 2003년 영국 유통회사 B&Q 구매이사, 2004년 경남 S건설 서울사무소장으로 일했다. 2009년 H그룹 H건설에 입사해 리비아에서 자재·장비 구매업무를, 2011년 E그룹 E건설에 입사해 중국과 동남아 대외구매를 담당했고, 2013년에는 전북 J건설 소속으로 사우디에서 근무했다. 지금은 34년 직장생활을 마감하고 미군부대에서 계약직으로 근무하면서 여러 분야의 책을 읽고 토론하는 분당 판교지역 독서모임에 참여하고 있다. 인생 후반기엔 ‘책 읽고 여행하고 글 쓰는 삶’을 계획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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