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선택 전 대전시장의 급작스러운 이임식이 열린 지난 15일. 그의 전임자로 현실정치와 거리를 둬왔던 염홍철 전 시장은 자신의 페이스북에 “일상 속에서 길을 따라 걷는 것은 ‘행복한 겸손’이다. 그래서 걷기를 통해 ‘느림과 비움과 침묵’의 철학을 배운다”라는 글을 올렸다.

권 전 시장이 임기를 7개월 앞두고 대법원 선고로 하루아침에 직위를 상실하자마자 차기 시장 후보로 호사가들의 입에 오른 염 전 시장은 ‘나는 걷는다’라는 글을 통해 “세상에 걸으면서 쫓아버릴 수 없을 만큼 무거운 생각은 없는 것 같다. 날마다 땅바닥에 이야기를 새기고 또 언젠가는 새겨졌던 기억들을 도로 찾아낼 수도 있기 때문에 걷기는 삶의 기록”이란 의미심장한 멘트를 남겼다. 평이한 일상에서의 소회를 적은 것으로도 볼 수 있지만 상황이 상황인 만큼 그의 복잡한 속내를 드러내는 듯한 넋두리(?)가 예사롭지 않아보였다.

민선 7기 지방선거가 200여 일 앞으로 다가온 가운데 무주공산이 된 시장직을 놓고 어떤 인물이 첫 신호탄(공식 출마 선언)을 쏘아올릴지 주목되는 와중에 더불어민주당 충청권 최다선인 5선의 박병석 의원(대전 서구갑)은 ‘불출마’ 입장을 재차 강조하고 나섰다. <본보 11월 21일자 4면 보도>

권 전 시장 낙마 후 자당 소속 시·구의원을 비롯해 대전지역 각계각층 인사들과 회동한 것을 두고 다양한 해석이 제기되자 해명에 나선 그는 ‘시장 출마를 위한 정지(整地) 작업이 아니냐’라는 당 안팎의 삐딱한 시선을 의식한 듯 “저는 지역 발전을 위해 중앙정치권에서의 역할에 충실하겠다”라고 선을 그었다.

재선 의원 시절부터 주변으로부터 대전시장 선거에 나서라는 권유를 많이 받았다는 박 의원은 “의회주의자로 남고 싶다”라는 소신도 피력, 광역단체장직보다는 국회의장직에 뜻이 있음을 다시 한 번 드러냈다.

이처럼 그는 시장직 도전 가능성에 손사래를 치며 ‘한눈을 팔지 않을 것’임을 역설, 염 전 시장과 마찬가지로 비움의 철학을 노정(露呈)했지만, 지역정가에선 박 의원의 최근 언행에 대해, 여야를 막론하고 위기 국면을 수습하는 지역 ‘좌장’으로서의 위상을 굳건히 해 정치적 영향력을 배가시키려는 의도가 배어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권 전 시장과 월평공원 민간특례사업 등 현안을 놓고 각을 세워온 박범계 시당 위원장(서구을)이 시장 공백 사태를 맞아 위축돼 있는 분위기 속에 박 의원이 그 틈새를 파고들어 당 적폐청산위원장이자 최고위원인 박 위원장의 기를 꺾고 당내 권력 장악에 나선 것이란 해석도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실제 대전시의회와 서구의회에선 민주당 의원들끼리도 서구갑·을로 진영을 나눠 이들의 대리전 양상을 띠며, 내년도 시·구 예산안 심사를 하는 중차대한 시점에 ‘한 지붕 두 가족’이 신경전을 벌이고 있다.

박 위원장과 이상민 의원, 허태정 유성구청장 등이 당내 시장 후보군으로 언급되는 가운데 박 의원은 시장 선거와는 무관하게 공정한 ‘중재자’, ‘조정자’로서의 이미지를 부각시켜 지방선거 공천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시장 선거에 있어서도 ‘캐스팅보터’로서 자리매김할 수 있다. 정치가 ‘살아있는 생물’이란 말이 있듯 어떻게 상황이 급변할지 모르는 만큼 ‘잿밥에 눈이 먼 정치꾼들의 이전투구’ 속에서 그가 자신의 몸값을 높이고, 막판 극적으로 후보로 ‘옹립’돼 시장 선거에 출격하는 시나리오도 전혀 배제할 순 없다.

비움의 철학과 관련해 주목받는 인물로는 현재 무소속 신분인 김경훈 대전시의회 의장도 있다. 지난해 7대 시의회 후반기 원구성 과정에서 당론을 위배해 민주당으로부터 제명당한 김 의장은 그간 “마음을 비웠다. 묵묵히 의장으로서의 역할에 충실할 뿐”이라며 민주당 복당이 이뤄지지 않는 데 대해 담담한 심경을 표출해 왔지만, 자신의 정치적 멘토와도 같은 권 전 시장의 충격적인 낙마 사태까지 겹치며 이래저래 향후 거취를 놓고 고민에 빠졌다.

최근엔 김 의장을 둘러싸고 ‘자유한국당 입당설’에 ‘동구청장 출마설’까지 불거지며, 지역 정가에선 차기 중구청장 후보로 거론돼 온 김 의장이 과연 타 정당에 새 둥지를 틀 것인가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최 일 기자 choil@gg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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