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일보는 베이비부머 세대의 효와 사랑 이야기를 담은 임석원의 자전적 에세이 나는 내 아내가 너무 좋다를 인터넷판을 통해 연재합니다. 본보 201789일자 10면 보도

1955년부터 1963년 사이에 출생한 우리나라 베이비붐 세대는 한국전쟁 이후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격변의 시대를 관통하며 살아온 세대로, 임석원의 에세이는 그 시대에 태어나 하고 싶은 것, 되고 싶은 것도 많았겠지만 자신을 위해서는 한 가지도 해 보지 못한 채 오직 가족만을 위해 굳세게 살아온 한 남자의 자전적 이야기이자, 곁에서 묵묵히 좋은 동반자가 되어 준 아내에 대한 절절한 고마움을 전하는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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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와 나의 반() 은퇴 일자리

2001년 내가 한창 잘 나가던 대기업 부장 시절에 아내와 나는 우리의 앞날에 대해 얘기했다.

내가 임원이 되면 좋겠지만 안 되면 1~2년 후 퇴직할 수밖에 없게 돼. 그러니 준비를 해야 하는데 당신이 부동산중개사시험 공부를 하면 어때? 당신이 자격증을 따놓으면 내가 퇴직하게 될 경우 긴 공백 없이 그 자격증 걸고 바로 부동산 중개 일을 하면 되잖아.”

아내는 내 생각대로 학원을 알아보고 우리 집에서 가까운 서현동 부동산중개사 학원에 등록을 하였다. 학원 규정에 따라 6개월 등록금을 다 내고 교재 8권을 샀다. 2주 정도 학원에 다니던 아내가 어느 날 저녁 이렇게 말했다.

여보, 나 학원에서 강의하는 말 도대체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듣겠어. 나 차라리 보육교사 자격증을 따서 어린이 집을 하는 게 좋겠어.”

아니, 그러면 당신이 일을 해야 되잖아? 일은 내가 해야지. 그리고 아이들 돌보는 게 보통 일이 아니잖아. 부동산 중개하는 일이 쉽지.”

아니야. 나는 그게 훨씬 낫겠어. 부동산 관련 일은 도저히 안 되겠어.”

도저히 못하겠다는 공부를 어떻게 계속하라고 할 수 있겠는가? 부동산중개사 학원비와 책값만 날리고 2주 만에 아내는 그만두고 말았다. 그 다음 해 아내는 새마을연수원 보육교사 교육과정 1년 코스에 비싼(?) 학비를 내고 등록했다. 등하교는 새마을연수원 버스를 이용했기에 아주 편리했다. 간혹 버스를 놓치는 경우가 발생해도 우리 집에서 가까운 거리였기 때문에 수업 시간 전에 우리 차를 타고 갈 수 있었다. 학생들 나이가 20대부터 40대까지 나이 폭이 컸기 때문에 젊은 사람과 나이 든 사람을 골고루 섞어 7~8명을 한 그룹으로 조를 만들어 조원들끼리 서로 도우며 공부를 하게 했다. 방학도 없이 꼬박 1년을 공부하는 과정이었다. 아내는 뭐든지 결정해 시작하기만 하면 열심히 했고 잘 했다. 졸업식 때 경기도교육감상을 받았다. 나는 졸업식장에 가서 아내가 상 받는 장면을 사진 찍고 축하해줬다. 졸업식이 끝나고 아내와 함께 공부한 조원들을 모두 모시고 나가 기분 좋게 점심을 샀다. 졸업 후 아내와 함께 공부한 조원들 중 한 사람은 분당에서 놀이방을 또 다른 한 사람은 용인에서 어린이집을 개원했다. 함께 공부한 사람들이 일을 시작하자 아내도 이왕 1년 동안 공부해 자격증을 취득했으니 아파트 1층을 전세로 얻어 놀이방을 할까?”하고 내게 물었다. 나는 뭐 힘들게 일을 하려고 그래? 그 자격증은 내가 실직했을 때 대비해 따놓은 거잖아. 내가 지금 회사 잘 다니고 있는데 당신이 뭐 하러 일을 해? 내가 지금 다니고 있는 회사를 그만두고 다른 일자리를 못 잡으면 하든지라며 반대했다. 나의 부정적인 반응에 아내는 1년 동안 열심히 공부해 취득한 자격증을 썩히기 아까웠든지 친정어머니와 상의를 했나 보다. 장모님도 임 서방이 대기업 부장으로 잘 나가고 있는데 무슨 고생을 사서 하려고 그래?”라고 말씀하시면서 하지 말라고 하셨다고 한다. 아내가 직접 집을 얻어 놀이방이든지 어린이집을 개원하는 일이야 단념했지만 전혀 자격증을 안 써먹은 것은 아니었다. 같은 해 120여 명 졸업생들 중 최고 성적을 받아 교육감상을 수상, 실력을 인정받았기에 놀이방이나 어린이집을 개원한 사람들이 종종 불러줬다. 선생님들이 휴가든 병가로 빠질 때 아내를 불러주었기에 몇 주씩 또는 몇 달씩 일을 해 용돈벌이를 했다.

20112월 성남 수정구에 있는 한 초등학교에서 부모가 다 직장에 다니는 아이들을 학교 수업이 끝나고 돌보는 어린이 돌봄교실을 운영하기로 했다. 그런데 채용 공고를 내도 지원자가 없었다. 이 학교가 외따로 떨어져 있어 대중교통이 불편해 출퇴근하는데 시간이 많이 소요되는 데다 근무시간이 짧아 급여가 적기 때문이었다. 또 이 동네가 곧 재개발돼 학교도 곧 문을 닫을 것이란 소문이 있어 채용돼도 몇 년 근무하지 못할 것이라고 예상했기 때문에 지원자가 없었다. 그 당시 나는 리비아에 나가 있었다. 우리 집 차를 아내가 쓰고 있었기에 아내는 출퇴근하는데 전혀 문제가 없었다. 딸은 직장 다니고 아들도 대학에 들어갔으니 자식들 돌볼 일도 없어졌다. 아내는 이 학교에 보육교사 자격증과 교육감 상장을 제출하면서 지원했다. 다른 지원자가 없었기에 3월부터 아내는 초등학교 방과 후 돌봄교사가 됐다. 결혼과 함께 다니던 공기업을 퇴직하고 결혼 후 27년 이상 현모양처로만 살아온 아내가 오십 중반 가까이 돼 일자리를 잡은 것이다. 내가 뜻하지 않게 리비아 내전으로 귀국, 퇴직을 해 우리 집 가계 수입이 제로가 될 뻔했는데 아내가 취직을 해 얼마나 다행인지! 10년 전 내가 퇴직할 것에 대비해 준비한 아내의 자격증이 그대로 적중한 것이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얼마나 감사한지! 오후 다섯 시간 정도 근무하는 직장, 오전엔 집안일하고 다른 볼 일 있으면 일도 보고 오후에 출근하는 아주 좋은 직장이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아내는 6년 넘게 잘 다니고 있다. 20187월 퇴직 예정이다.

20136월 사우디에서 귀국하고 8월 퇴사 후 더 이상 일자리를 구하지 못하니 어쩔 수 없이 나는 은퇴한 것이 돼버렸다. 9월 성남 분당에 있는 두세 곳의 도서관에서 개설한 여러 강좌에 등록하고 은퇴생활로 접어들었다.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빡빡하게 독서모임, 명화 감상, 컴퓨터, 중국어, 원어민 고급 영어 등의 여러 강좌를 쫓아다녔다. 점심은 도서관 식당에서 먹었다. 도서관에 매일 출근하니 먼저 퇴직하고 같은 강좌에 나오는 나보다 나이 많은 선배 어른들과 자연스럽게 인사를 나누게 되고 얘기를 하게 됐었다. 선배 어른들이 한결같이 나를 보고 이런 말들을 했다.

아직 한창 젊어 보이는데 어떻게 해? 아직 일을 해야 하는 나이인데. 벌써 이런 데 나오면 안 되지.”

어르신 보시기에는 제가 젊어 보여도 저도 60이 다 돼 갑니다라고 대답했더니, “어허! 이 사람아, 60이 뭐야, 요즘은 60이 아니고 최소한 65살까지는 일을 해야 되네. 나는 내일모레 70인데 일자리만 주어진다면 더 일하고 싶어.”

과거 잘 나가던 때는 완전히 잊어버리고 웬만한 경력은 이제 이력서에 쓰지 말고 일자리를 찾아보게. 그저 건강을 위해 정기적으로 출근하는 자리만 있으면 나가야 돼! 급여가 문제가 아냐! 내가 왜 이 강좌에 나오는데? 배우러 오는 게 목적이 아냐. 건강 유지하기 위해 규칙적으로 움직이고 활동하려고 오는 거야!”

이런 말씀들을 하셨다. 그분들이 자신들의 경력을 얘기하지는 않았지만 도서관에 나와 책 읽고 강좌 듣고 공부하는 모습으로 봐선 화이트칼라의 일자리, 대기업이나 공기업 임원 정도의 직책에서 일했을 것으로 추측됐다. 그 선배 어른들의 말이 일리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 한 번은 도서관 가는 길에 같은 강좌를 듣는 여자 분을 만나 함께 가면서 얘기를 나눈 적이 있었다. 그 여자 분도 내가 너무 일찍 퇴직했다고 느꼈는지 퇴직 전에 어디 다녔냐고 물어왔다. 내가 대기업 다니다 은퇴했다고 하자, 이렇게 말했다.

저의 남편은 내로라하는 대기업은 아니지만 그래도 65살이 넘은 나이에 아직도 일을 하고 있어 다행입니다. 남편 친구들은 젊어서는 대기업 임원을 하고 잘 나갔었지만 지금은 다 은퇴하고 놀고 있죠. 그런데 그렇게 잘 나가던 친구 분들 모두가 65세가 넘었는데도 일할 데 없냐고 그렇게들 일자리를 찾더라고요. 아직 젊으신데 중소기업에 적당한 자리 찾아보세요.”

광교 우리 아파트 건너편에 경기도 중소기업지원센터가 있다. 나는 거기 전화를 하고 내 이력서를 메일로 보내고 상담을 신청, 방문했다. 해외 실무경력이 10년쯤 되고 다른 여러 나라에도 출장 다니며 일했던 만큼 해외에 진출하고자 하는 중소기업에서 나 같은 사람이 필요하지 않을까 해서였다. 내 경력을 미리 본 상담자에게 어떤 일자리가 있겠는지 물어봤다. 담당자는 글쎄요. 선생님 같은 분들이 재취업하기는 참 어려워요. 그래도 대기업의 부장, 지사장, 중견그룹의 임원까지 지내신 분을 중소기업 사장님들이 어떻게 부리겠어요?”라고 했다. 그래도 나 같은 사람이 일할 데가 도저히 없는지 재차 물었다. 상담자는 화이트칼라 직업군에서 임원까지 근무하던 내 나이 또래의 사람들의 일자리를 새로 찾기는 한마디로 불가능하다는 것이었다. 50 중반을 넘어 60이 다 돼가는 사람을 누가 쓰겠느냐는 것이다. 누군가 소개해 그 회사에서 모셔가지 않는 한 나 같은 경력자의 일자리는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면 어떻게 하느냐고 떼를 쓰듯 물었다. 어떤 자리를 말씀하셔도 좋으니 말씀 좀 해보라고 했다. 상담자는 말하기 송구스럽지만 이제는 경비나 택배 배달 같은 단순노동 일자리밖에 없는데 그런 자리에 가서 일할 수 있겠는지 되물었다. 그러면서 그래도 나는 영어를 하니 미군부대에 혹 적당한 일자리가 있는지 알아보라는 것이었다. 마침 미군부대가 용산에서 평택으로 이전하게 되니 서울에서 근무하던 사람들 중 혹시라도 평택으로 따라가지 않는 사람이 있으면 빈자리가 나올 테고, 또 새로운 일자리도 생기지 않겠느냐면서 그쪽에 찾아보라는 것이었다. 상담 후 나는 집으로 돌아와서 미군부대 일자리를 집중 검색했다. 새롭게 나오는 미군부대 일자리는 대부분 허드렛일이었고, 나이도 30대 이하 젊은 층이 취업하는 자리였다. 젊은 사람들은 일단 어떤 궂은일을 하는 자리라도 미군부대 일자리를 잡아 들어간다. 그리고 부대 내에서 각자 보다 좋은 일자리를 찾아 이동하고 최종 정규직으로 완전히 자리를 잡는다. (통상 세 번 이상 자리를 이동하는 듯했다.) 나이 든 내가 갈 곳은 영어 구사능력을 조건으로 뽑는 계약직 일자리밖에 없었다. 20144월 나는 토익 4가지 시험(읽기, 듣기와 말하기, 쓰기)을 통과한 후 일단 평택 미군부대로 들어갔다. 그리고 3개월 후 7월 성남 미군부대로 이동해 현재까지 일을 하고 있다. 일주일에 3일 정도 근무하니 반() 은퇴 직장인 셈이다. 이 부대가 평택으로 이사를 가게 되면 나의 일자리는 없어지며, 나는 2018년 말 퇴직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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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임석원은...

1956년 지리산 시골마을에서 태어났다. 대전고와 한남대를 졸업한 후 1980S그룹 S건설에 입사해 23년을 근무하면서 사우디·싱가포르·인도네시아 등 8년간 생활했다. 2003년 영국 유통회사 B&Q 구매이사, 2004년 경남 S건설 서울사무소장으로 일했다. 2009H그룹 H건설에 입사해 리비아에서 자재·장비 구매업무를, 2011E그룹 E건설에 입사해 중국과 동남아 대외구매를 담당했고, 2013년에는 전북 J건설 소속으로 사우디에서 근무했다. 지금은 34년 직장생활을 마감하고 미군부대에서 계약직으로 근무하면서 여러 분야의 책을 읽고 토론하는 분당 판교지역 독서모임에 참여하고 있다. 인생 후반기엔 책 읽고 여행하고 글 쓰는 삶을 계획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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