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제구, 김용재, 조남호 인터뷰
3·8민주의거 기억을 기록하다

 
 
1960년 3월 8일 대전고 학생들이 상공장려관(대전 중앙네거리) 앞길에서 경찰에 의해 집단 연행돼가면서 "학원에 자유를 달라"며 구호를 외치고 있다. 3.8민주의거기념사업회 제공

 

1960년 3월 8일 대전고 학생들이 대흥동과 문창동 일대의 주택가 골목에서 경찰에 쫓기고 있다. 앞에는 곤봉을 휘두르는 경찰이 있고 멀리 반대편에도 진압경찰이 있어 갇혀있다. 3.8민주의거기념사업회, 홍영유 씨 제공

 

그날의 주역 박제구, 김용재, 조남호 씨의 증언을 바탕으로 3·8의 기억을 역사로 기록한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3·8 민주의거를 다시 쓴다.

#. 3월 7일

대구에서 민주당 유세가 있던 2·28 후, 박제구 대전고 학도호국단 대대장에게 친구들이 와서 귀띔했다.
“야 제구야 너 대구 들었지? 우리도 움직여야 되지 않니?”
그날 저녁 보문고에 다니던 강무송 네 집 신동극장 옆 식당에서 10여 명이 모여 대전시내 고교 합동으로 시위를 하기로 했다. 대전상고, 대전사범, 대전여고 등의 대표에게 연락을 했고 이튿날 낮 12시까지 YMCA에서 회동하기로 했다.

#. 3월 8일 오전
결의하기로 한 날 학교에 갔더니 이미 학교는 발칵 뒤집어져 있었다.
“데모하려고 계획했다며, 쓸데없는 짓 하지마라.”
그러고는 교장실로 갔다. 교장선생님은 학생과장을 통해 학생간부들을 전부 교장실로 불렀다. 각 고교가 연합 하려던 게 들통난거다. 간부들은 사실상 구금됐다.

#. 3월 8일 오후
점심을 먹고 계속 감금상태에 있었다. 그날 공설운동장에서 열리는 민주당 강연이 끝날 때까지 잡아놓으려는 계산이었다. 그때 담을 뛰어넘으며 규율부장 최정일이 “나가자”고 소리쳤다. 규율부장의 외침에 각 반 대표들도 나가자고 소리쳤고 갇혀있던 간부들도 앞다퉈 선봉장으로 나갔다. 학교에서 나와 학생들은 대흥동사거리로 해서 공설운동장, 인동시장으로, 대전역으로, 도청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학생을 정치도구화 하지 말라”, “서울신문 강제구독 사절” 등을 목청껏 외쳤다.
그러다 공설운동장 가기 전 진압이 시작됐다.

#. 늦은 오후 시위 절정
행진대열 선두는 무장경찰과 경찰백차의 제지를 받고 몇 개 집단으로 갈라지고 끊어졌다. 시위대열 학생들은 사정없이 후려치는 무장경찰에 교복은 찢어지고 손과 발은 피로 얼룩졌다. 목덜미를 끌려 연행되기도 하고, 논바닥에 밀려 반 흙투성이가 되고 근처 똥통에 빠지기도 했다. 무장경찰의 집중저지에 맞서기 위해 돌을 주워 던지며 일부는 신도극장 쪽으로 보문고, 목척시장을 거쳐 도청으로 일부는 대흥동 시외버스터미널(현 대림빌딩)로 온 시내가 출렁였다.

#. 3월 9일
70여 명이 경찰서로 연행됐다. 박제구, 박선영이 주동자로 지목돼 둘만 남기고 모두 귀가조치 됐다.
“신나게 두들겨 맞았다.”

시간이 언제인지도 모를 지하실로 끌려가 상처도 안 나게 기술적으로 맞았다. 귀가한 후로도 이들은 수시로 경찰서, 충남도경에 끌려갔다. 학생들을 보호하기 위해 인동까지 동행한 조남호 선생도 선동자로 끌려갔다. 그렇게 독재정권을 지나 이 나라에 민주화가 올 때까지 그들은 감시와 협박 속에 살았다.

“어른들이 할 일을 그때 우리들이 한 거야. 그리고는 공부고 뭐고 살기만 하면 됐어. 호시탐탐 경찰조직이 관찰을 해서 움직일 수도 없었어. 그렇게 살다보니 세월이 약이 되는 날이 왔네.”
민주화운동의 도화선을 이끌었던 박제구(80) 씨는 4·19혁명 공로자다.

강선영 기자 kkang@gg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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