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호 방조제 전경. 2012년 1월 시로 승격한 당진시는 우리 경제의 살아있는 산업 현장으로서 서해안고속도로 개통 이후 서해대교는 당진시의 랜드 마크가 되고 있다.서산시, 당진시 그리고 태안군 등 2시 1군이 있는 태안반도의 남쪽 바다가 농경지 확보를 위한 간척이었다면, 북쪽은 농경지 확보보다는 서산의 대산석유화학단지나 당진의 석문국가산업단지, 송악국가산업
촛대 바위. 당진시의 ‘당진 9경’중 하나인 석문면 교로리 왜목마을은 바다 위에 불끈 솟은 두 바위 사이에 앙증맞게 솟은 해돋이 사진 한 장으로 하루아침에 유명해진 곳이다. 왜목이란 마을이름은 지형이 왜가리 목처럼 바다로 가늘고 길게 뻗어나가서 붙여진 이름이라는 것이 거의 정설이지만, 어떤 이들은 누워있는(臥) 사람의 목(木)처럼 생긴
서해안시대를 맞아서 태안반도의 당진만 일대는 석문방조제, 대호방조제를 비롯해서 국가산업공단이 만들어져 옛 흔적을 찾기 어렵지만, 내륙 쪽에는 역사의 발자취가 많이 남아있다. 특히 조선 태종 13년(14013) 전국을 개편할 때까지 밀물 때면 바닷물이 내륙 깊숙이까지 밀려왔다가 썰물 때면 뭍으로 변하는 내포(內浦) 10고을 중 홍성 다음에 큰 면천에는 읍성이
서해안시대를 맞아 삽교방조제를 시작으로 석문방조제, 대호방조제 등 해안선을 매립하여 대규모 공장시설을 유치하여 하루가 다르게 변하던 당진군이 2012년 1월 시로 승격했는데, 새로이 조명을 받는 곳은 삼국시대 이래 태안반도의 가장 큰 고을이던 면천(沔川) 지역이다. 지금은 당진시의 작은 면에 불과한 면천은 백제시대에는 태안반도에서 가장 큰 고을인 혜군(
대전 중구 석교동은 부사동 사거리에서 금산 방면으로 뻗은 6차선대로인 17번 국도 좌우에 펼쳐지는 동네다. 석교·호동·옥계 등이 차례로 2.4㎞에 걸려 자리하고 있으며 이들 3개 법정동을 하나의 행정동으로 묶어 관할하고 있다.이들 지역은 본래 조선 시대 공주목 산내면에 속했는데, 1914년 석교동은 회덕군 산내면 세동과 석교리 일부
태안반도는 지리적으로 중국 대륙과 가까워서 삼국시대 백제, 통일신라를 비롯해서 많은 문물교류가 이루어진 교역로였기에 주민들은 일찍부터 이런 외래 문물이 오고가는 것을 직접 보고 겪을 수 있었다. 한말 청을 통하여 천주교가 국내에 가장 먼저 전파된 지역도 이곳이었다.초기에는 천주교를 종교가 아닌 외래학문으로 받아들여졌지만, 오랫동안 사농공상(士農工商)이라는
태안반도는 서해바다로 돌출된 지형과 복잡한 해안선 때문에 내륙과의 교통은 오랫동안 온양~신례원~합덕~당진~서산으로 우회하거나 배를 타고 인천으로 가는 것이 전부였으나, 1979년 10월 아산시 인주면 문방리와 당진시 신평면 운정리 사이의 바다를 막는 삽교방조제 준공으로 큰 변화를 맞았다.예산과 홍성 사이에서 바다로 흘러가는 범근천을 막은 3,360m의 삽교
대전 서구 관저동은 도심발전과정에서 중구에서 서구로, 가수원동에서 관저동으로 분동됐고 현재는 계백로를 중심으로 관저 1, 2동으로 나눠졌다.관저동은 본래 고려의 기성부, 조선 시대의 진잠현에 속했다. 관(館), 즉 객사의 아랫마을이라는 의미에서 관하촌 혹은 관저리라는 지명이 유래했다는 설이 있다.‘조선지지자료’에는 ‘가마울&
- 12세때 당으로 떠나 7년만에 외국인 최초로 빈공과 급제 토황소 격문 지어 문재 드러내- 귀국 후 문란한 국정에 한탄 벼슬 버리고 은거하다 생 마감서산 시내에서 국도 29호선을 따라 대산읍으로 가다가 지곡면에 이르면 오른편 길가에 부성사(富城祠) 입구를 알리는 안내판이 있다. 부성사는 통일신라시대 최고의 문장가 고운 최치원(崔致遠; 857~ ?)을 모신
대전 목동 전경. 대전 중구 목동은 북쪽으로 중촌동, 동쪽으로 선화동, 남쪽·서쪽으로 오류동·용두동, 서쪽에 유등천(버드내)이 흘러 서구와 자연 경계를 이루는 중구 서북부 지역이다. 약 7만㎡ 면적에 인구는 약 1만 6000명이 살고 있다.목동은 대전에서 유일하게 초등학교부터 대학교까지 모두 소재한 ‘배움의 터전&rsqu
1592년 4월에 발발한 임진왜란과 정유재란까지의 전후 7년 전쟁과 선조의 뒤를 이어 즉위한 광해군에 반발한 인조반정(仁祖反正), 그리고 다시 그 인조에 대한 이괄(李适)의 반란으로 얼룩진 조선중기에 역사의 중심에 섰던 충무공 정충신(鄭忠信; 1576~1636) 장군에 대해서는 그다지 많이 알려지지 않고 있다.서산 시내에서 당진시 석문면과 태안반도의 북쪽
우리 역사에서 재능 있는 수많은 인물이 있었지만, 특히 회화분야에서 통일신라시대의 솔거(率去), 고려시대의 이녕(李寧), 그리고 조선시대의 안견(安堅)을 ‘3대 산수화가’라고 한다. 그렇지만, 사실 화가들은 조선후기에 이르러 강세황, 정선, 김정희 등에 이르는 이른바 고관이나 양반출신 문인화가들이 나타나기도 했지만, 대체로 도화원(圖畵
내동 전경. 동서로 확장과 서부순환도로 개통으로 서구의 관문이자 중심지로 자리 잡은 내동.현재 내동에는 유동인구보다는 직장에 다니는 주민이 많아 전형적인 주거지역으로 자리매김했다.지형은 도솔산을 병풍삼아 유등천을 바라보는 배산임수형이다.도솔산 중턱에는 대전외국어고와 대전교통방송국, 도솔산 내 월평공원엔 싸이클경기장, 궁도장, 양궁장이 있다.싸이클장은 지난
조선중기 실학자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태안반도는 산도 아니고 들도 아닌(非山非野) 비옥한 땅에서 생산되는 물산이 풍부’하다고 했지만, 지리적으로도 중국대륙과 가까워서 오랫동안 수많은 문물을 교류한 흔적이 질펀하다.삼국시대 백제는 이곳에 전국 5방 중 서방(西方)인 도선성에 속하는 기군(基郡)을 설치했는데, 삼국통일 후 신라 경덕왕 16
캠퍼스타운과 우송예술회관 등이 있어 대전 원도심에서 보기 드물게 청소년문화 중심의 시가지를 형성하고 있는 자양동.자양동에는 현재 우송대와 우송정보대, 동아마이스터고, 우송고, 우송중, 자양초, 동광초 등 7개 교육기관이 있다. 특히 동구 유일의 공연장인 우송예술회관이 있어 자양동 주민은 물론 대다수 시민들이 수준 높은 공연 및 전시 등을 감상할 수 있다.이
밑반찬 지원 활동. 대전 중구 유천동은 보문산을 배경으로 유등천에 임해 500여 년 전 마을이 형성되고 버드나무가 수려한 절경을 이뤄 동네 이름이 버드내 즉 ‘유천’(柳川)으로 불리게 됐다. 지난 1940년 대전부의 구역확정으로 유천정(柳川町)이라고 하다가 1946년 동명 개정에 의해 유천동이라고 정해져 지금에 이르고 있다. 맑은 물과
태안반도 남쪽 홍성군 서부면과 태안군 남면 사이의 해역을 천수만(淺水灣)이라고 하는데, 이곳은 수심이 얕다고 해서 붙여진 지명이다. 10m 미만의 수심 때문에 큰 배의 출입이 불가능하지만, 물고기들이 낮은 수심을 찾아 산란장소로 이용해서 평소 어족이 풍부하고, 또 간만의 차이를 이용한 연안어업과 수산 양식장의 적지로 알려진 천수만의 특징을 이용해서 국내 굴
대전 중구 용두동(龍頭洞)은 주택재개발과정에서 주민들과 지금의 한국토지주택공사 간 보상문제로 2년여 동안 팽팽하게 대립한 적이 있었다.우여곡절 끝에 미르마을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 이 아파트엔 현재 용두동 4700여 세대 1만 1000명 중 30%인 1100세대 3500명이 살고 있다.용두동은 지난 2000년 이전까지 대단지의 아파트가 없는, 소규모 다세대주
서해안고속도로 해미 나들목을 빠져나온 뒤 해미읍성을 끼고 커브 길을 가다가 고창동 마을에서 서해안고속도로 교각을 안고 신창저수지를 지나 약3km쯤 들어가면, 깊은 산속에 천년고찰 개심사(開心寺)가 고즈넉이 자리 잡고 있다. 서해안고속도로 서산 나들목을 이용하거나 당진~서산간 국도 32호선 중 당진과 서산시 경계인 역천을 지나 서산시 운산면소재지에서 좌회전하
칼국수 한 그릇이 누군가의 인생을 바꿨다고 하면 과장이겠지만 그 누군가의 대학은 바꾸기도 했다. 1980년 대 형제 많은 집의 셋째였던 한 남자는 대학 원서 접수 마지막 날 가고자 했던 수도권 사립대를 뒤로 하고 지방 국립대로 발길을 돌려야했다.이미 형들이 대학생이었고 아래로는 그 보다 좀 더 공부가 나았던 동생 때문에 부모는 그가 눈치껏 지방 국립대에 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