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족산과 대청호가 만나 만든 가을빛.

 

봄의 신록, 여름의 초록을 지나 산야는 이제 갈빛 가을 옷을 입는다. 언제 그랬냐는 듯 무더웠던 여름날의 기억이 희미해질 정도로 쌀쌀해졌다. 절로 옷깃을 여미게 한다. 이렇게 낮아진 기온은 식물의 단풍 메커니즘을 작동시킨다. 갈색과 노란색을 내는 색소들이 깨어나 나뭇잎을 물들인다.

이 가을빛 바이러스는 계절을 타고 퍼져 대청호도 물들이고 있다. 흐린 날도 좋고 맑은 날은 금상첨화다. 햇빛의 에너지를 마구 머금고 자연의 만물은 익어간다. 가을의 절정이 선사하는 이 완숙의 미(美)는 또 다른 힐링의 원천이 된다. 가을 산이 붐비는 이유다.

ㄴ 관련기사 : 4구간 호반낭만길 걷기, 가을
               4구간 호반낭만길의 봄

 

 

#. 극적인 반전의 파노라마

계족산은 대전의 동쪽 경계에 해당한다. 금강과 접하면서 비교적 높은 봉우리들이 줄을 잇는다. 이 계족산은 산 중턱을 한 바퀴 순환하는 황톳길이 깔리면서 유명해졌다. 맥키스컴퍼니가 등산로 14.5㎞ 구간에 황토를 깔아 맨발로 걷는 즐거움을 알게 해 주면서 전국적인 명소가 됐다.

양손에 신발 한 짝씩 들고 맨발로 숲길을 걸으면 땅의 기운을 고스란히 흡수하면서 자연과 하나가 된다. 숲속의 맑은 공기로 힐링 샤워를 하면서 유유자적 사색의 시간을 가질 수 있다. 이곳에서 해마다 꽃 피는 봄에 열리는 맨발축제는 외국인들도 소문을 듣고 찾는 지역 문화관광 콘텐츠의 핵심 아이콘으로 자리매김했다.

 

 

계족산은 그 자체로 아름답지만 특히 극적인 반전의 파노라마를 선사한다는 점에서 더욱 사랑을 받는다. 산 능선을 따라 걷다 보면 문명과 자연의 극단을 동시에 경험할 수 있다. 한쪽엔 150만 대전시민이 생활하는 회색 빌딩과 아파트가 드넓은 한밭벌에 빼곡히 들어차 있고 반대편엔 인위적인 손을 타지 않은 자연이 살아 숨 쉰다. 치열한 삶과 힐링의 경계에서 복잡 미묘한 인생의 의미를 되돌아보게 된다.

계족산은 대청호오백리길 공식 구간엔 포함되지 않지만 계족산에서 대청호반으로 이어지는 길이 인상적이다. 계족산 절고개에서 고봉산 임도로 빠져 추동으로 들어가는 구간이다. 산길을 걸으면 동쪽으로 펼쳐진 대청호의 모습에 잠시도 눈을 뗄 수 없다.

 

 

대청호 대전구간 최남단인 신상교부터 5구간 방축골까지 대전권 대청호의 모든 것을 볼 수 있다. 추동 억새습지와 방축골 '햄버거섬'도 한눈에 들어온다. 바쁘게 돌아가는 회색 빌딩숲과는 확연히 구분되는 대청호의 푸르름에서 잠시 힐링의 순간을 맞이한다.

계곡 물 흐르는 소리에 맞춰 경쾌하게 발길을 재촉해 절고개에 다다른 뒤 계족산성 오르는 길로 10여 분 등산하면 최근 새로 만들어진 데크 전망대를 만날 수 있는데 이곳이 조망 포인트다. 다시 절고개로 내려와 추동 가는 임도를 따라 걷다 보면 정자 하나를 만나게 되고 이곳에서 다시 한 번 대청호의 장관을 눈에 담을 수 있다. 살짝 젖은 땅과 나뭇잎은 가을 분위기를 고조시킨다.


 

#. 추동의 가을

대청호와 계족산의 품에 안긴 대전 동구 추동은 가을과 ‘깔맞춤’이다. 동네 이름 자체가 ‘가을’이다. 가을 추(秋)자를 쓴다. 그런데 이 추동 중심마을의 이름은 가래울이다. 예부터 호두나무와 사촌쯤 되는 가래나무가 많아서다. 가래나무의 열매는 추자다. 그래서 원래 가래나무 추(楸)자를 써야 하는데 한자를 잘 못 음차했다. 그러나 자리가 사람을 만들 듯 마을 이름이 이 마을의 특색도 바꿔놓았다. 가을에 어울리는 동네로 말이다.

 

추동은 대청호오백리길 대전지역 구간의 거점이라고 할 수 있다. 사람의 발걸음을 이끌어낼 관광자원들이 밀집해 있다. 관광자원에 대한 투자도 가장 많이 된 곳이기도 하다. 대청호 자연생태관과 습지공원, 억새밭 데크길, 드라마 '슬픈연가' 촬영지 등은 가을에 최적화된 관광 인프라로서의 매력을 갖고 있다.

대청호 자연생태관에선 해마다 가을이면 국화축제가 열린다. ‘꽃’ 하면 ‘봄’이지만 국화의 매력은 가을에 발산한다. 요즘 이곳에 가면 대형 조형물과 각종 분재에 담긴 각양각색, 수만 본의 국화를 볼 수 있다. 산에서 내려와 대청호 자연생태관에 들어서자마자 진한 국화향이 진동한다. 참새가 방앗간을 그냥 지나칠까. 국화꽃이 만발하니 벌들도 바쁘다. 국화는 종자 번식을 위해 자신의 몸을 고스란히 벌에게 내주고 벌은 대신 이 꽃에서 꿀을 얻는다.

 

 

생태관 바로 앞 습지공원에도 사람들이 붐빈다. 풍차가 연출하는 이국적인 분위기와 잘 다듬어진 산책로가 쉼을 선사한다. 습지공원은 단순히 휴식처 역할만 하는 게 아니다. 습지공원의 수생식물들은 모두 대청호로 흘러드는 물을 자연 정화하는 역할을 한다. 소소해 보이지만 중요하지 않은 게 없다. 단지 인식조차 못 하거나 관심이 없을 뿐이다. 그래서 천천히 걸으며 자연과 교감하는 일이 소중할지도 모른다. 잘 익어가는 계절을 만끽하면서 말이다.

#. 가을에 흰 눈이 내렸네

자연생태관과 습지공원을 거쳐 대청호에 한 발 더 다가서면 이번엔 억새밭이 기다린다. 이 억새밭 역시 그저 볼거리로 있는 게 아니다. 자연적인 수질정화를 위해 꼭 필요한데 미(美)적 요소까지 갖추고 있으니 그야말로 일석이조다.

가을이 오면서 억새의 뽀얀 솜털도 다 자라 파란 대청호와 어우러진다. 마치 눈이 내린 듯 새하얀 억새가 쫙 펼쳐져 환상적인 장면을 연출한다. 이 억새밭 위로 데크길이 열려 있다. 이 길을 따라 대청호에 더 가까이 다가설 수 있다.

 

 

‘억새꽃 다발은 사랑하는 이에게는 보내지 마셔요 / 다만 그대를 가을 들녘에 두고 떠난 이의 뒷모습에 보내셔요 / 마디마디 피가 맺힌 하얀 억새꽃 / 불같은 미움도 삭혔습니다 / 잠 못 드는 그리움도 삭혔습니다 / 솟구치는 눈물도 삭혔습니다 / 삭히고 삭혀서 하얗게 바래어 피었습니다/ 떠난 이의 그 호젓한 뒷모습에 아직도 가을이 남아 있거든 억새꽃 다발을 보내셔요 / 한아름 가득 보내셔요’
 

데크길을 걷다 보면 억새를 소재로 한 김순이 시인의 연작시 ‘억새의 노래’ 중 ‘억새꽃 다발은’이란 시 한 수가 눈에 들어온다. 환희를 선사하던 억새밭이 금세 애처로워진다.

그래도 가을바람에 살랑살랑 춤을 추는 억새는 신비롭기까지 하다. 가을철, 자칫 황량해 보일 수 있는 호반의 풍경은 억새들의 향연으로 말미암아 새 생명을 얻게 된다. 가을이 오면 사진작가들이 대청호에서 이곳을 가장 먼저 찾는 이유가 다 있다. 동틀 무렵 호수 위로 물안개가 피어오르는 몽환적인 분위기도 가을이 가장 인상적이다.

지난해 최악의 가뭄 때와 달리 올해는 대청호 수위가 조금 높아지면서 대청호반의 지형에도 변화가 생겼다. 일부는 육지와 떨어져 섬이 되기도 하고 가뭄 때도 섬이었던 곳은 육지와 더 멀어졌다. 기후변화에 따라 모습을 달리하는 것 역시 대청호의 매력 중 하나다.

글·사진·영상=이기준 기자 lkj@ggilbo.com

 

저작권자 © 금강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