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먼 옛날, 한 노파가 야산에서 나물을 캐고 있었는데 어디선가 아이 울음소리가 들렸다. 이 노파가 울음소리를 쫓아 가 보니 그곳에서 큰 바위가 솟아오르는 것이었다. 이 기이한 이야기는 왕에게 보고됐다. 신하들은 무슨 징조인지 토론을 하게 됐고 급기야 ‘이 바위로 석불을 조성하라’는 계시로 받아들였다. 왕은 곧바로 나라의 큰 스님에게 불상을 세우게 했다. 이 일은 500년 고려왕조의 기틀을 세운 광종(재위 949∼975년) 때의 일로 논산 관촉사 석조미륵보살입상(보물 제218호) 옆 관촉사사적비(조선 영조 17년(1743년))에
상대웅전(보물 제162호) 이맘때면 본능적으로 ‘정리를 해야겠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힌다. 그리고선 ‘새롭게 다시 시작하자’고 다짐한다. 그러나 좀 지나고 나면 머릿속에 남는 하나. ‘작심삼일(作心三日), 그리고 좌절.’ 수긍하는 사람이 많을 듯하다. 세상이 그대로인 걸 보면 말이다. 모든 게
물은 생명이고 문명의 모태다. 잔잔한 호수의 풍경 앞에 서면 자연스럽게 모든 것을 내려놓고 ‘쉼’을 느낄 수 있는 이유다. 금강의 끝자락, 그곳에 금강호가 있다. 긴 여정의 끝, 이곳에서 금강 물도 고향(서해)의 품에 안기기 전에 한숨 돌리며 쉼을 청한다. 평화롭다. 25년 전까지만 해도 이곳은 가장 역동적인 생태계의 보고(寶庫) 중
옛 한일은행 강경 지점 금강의 길이는 약 400㎞에 이른다. 전북 장수에서 시작해 대전·충남과 충북의 경계를 가른 뒤 대청댐에서 서쪽으로 방향을 틀어 충남 중·남부지역을 두루 적시고 서해에 도달한다. 굽이굽이 내달려 온 금강 물줄기는 그러나 곧바로 바다로 스며들지 못한다. 금강하굿둑에 막혀 한동안 갇힌 신세가 된다. 1990년 금강
측면에서 바라본 정림사지. 정림사지오층석탑은 슬프도록 아름답다. 백제의 미(美)를 대표하는 상징물. 그러나 그 아름다움의 속살 깊숙한 곳엔 망국의 한이 서려있다. 단단한 화강암 몸뚱이에 정복의 야욕이 한 글자, 한 글자 아로새겨질 때마다 이 석탑은 백제인과 함께 눈물을 흘렸으리라. 그래서 정림사지오층석탑은 찬란한 백제문화의 상징탑이자 백제멸망의 비석이다.#
1971년 7월 6일, 충남 공주 송산리고분군에선 배수로 공사가 한창이었다. 때는 장마철. 5호분과 6호분으로 물이 스며들지 않도록 하지 않기 위한 공사가 이어지고 있었다. 그런데 6호분 주변에서 배수로를 내던 한 인부의 삽 끝에서 둔탁한 소리가 들려왔다. 뭔가가 자꾸 삽질을 방해했다. 인부는 조심스럽게 흙을 퍼 올렸다. 그러자 삽 끝에 부딪치던 수상한 물
보령 오천면 상사봉 중턱에 마련된 도미 부부 합장묘 해안경관전망대에서 바라본 오천항 백제에 도미(都彌)라는 사내가 있었다. 가난한 평민이었지만 성품이 좋아 칭찬이 자자했다. 그에겐 아랑이라는 이름을 가진 아내가 있다. 방금 피어난 꽃처럼 예쁘고 사랑스러운 아내다.아랑은 도미에게 시집가기 전, 뭇 남성들의 시선을 독차지했던 처녀였다. 마을에서 신부감 1순위로
김정희 선생 고택 1786년 6월 3일 예산 신암 용궁리의 한 대갓집 뒤뜰. 말라버린 우물에서 갑자기 물이 샘솟았다. 한 아이의 울음소리와 함께 벌어진 일이다. 마을 뒷산인 오석산과 팔봉산의 시들었던 초목도 다시 생기를 되찾았다. 역사에 남을 천재 탄생의 서막이었다. 바로 명필의 대명사,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다. 추사 초상화 # 싹수부터 남다른 명필
예산 대흥향교 은행나무. 중국 산둥성 쥐센현 정림사란 절엔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은행나무가 산다. 기원전 715년 노나라와 거나라 양국의 제후들이 이 나무 아래서 회담을 했다고 한다. 그래서 이 은행나무는 은행나무의 비조(鼻祖)로 여겨진다. 그런 점에서 은행나무의 고향은 중국이라고 할 수 있다. 중국에서 일본으로 건너갔고 일본의 것이 유럽으로, 다시 미국으
수령 500년 된 계룡 괴목정공원 느티나무 천연기념물 제545호 대전 괴곡동 느티나무. 대전 대사동 충남대병원 앞을 지나다 보면 아름드리 나무 아래 한 카페를 발견할 수 있다. 큰 나무 탓에 낮엔 카페가 잘 보이지 않고 밤이 돼서야 몇 개의 유리창에서 흘러나오는 전등빛을 통해 카페를 인식할 수 있게 된다. 멀찌감치서 바라보면 나무와 어우러진 모양새가 평온함
(왼쪽 상단 사진부터 시계방향으로)예산 대흥 임존성 성벽. 예당저수지. 임존성 우물터. 예산 충의사. 예산, 특히 대흥 슬로시티가 역사문화의 숨결을 이어가면서 지속가능한 미래를 꿈 꿀 수 있는 건 나름의 자부심이 있기 때문이다. 나라 잃은 슬픔을 뛰어넘는 구국충정의 마음이다. 700년 세월의 찬란한 백제문화가 나당연합군에게 유린됐을 때도 그랬고 대한제국이
느린 꼬부랑길 2코스 사색의 길 “옛날 한 마을에 우애 좋고 효심 가득한 형제가 살았다. 부모님이 모두 돌아가시고 따로 살고 있는 이 형제는 가을 어느 날 추수를 함께 했다. 내기를 하면서 말이다. 형과 아우가 각자 한 쪽 끝에서부터 시작해 벼를 누가 많이 베는지 시합을 한 거다. 그런데 다 하고보니 똑같이 반씩 추수를 했다.이 둘은 사이좋게 각
천장호 출렁다리 푸를 청(靑), 볕 양(陽). 충남 청양하면 가장 떠오르는 단어는 역시 고추다. ‘콩밭 매는 아낙네’를 떠올릴 수도 있겠지만 이건 한 때였다. 예나 지금이나 청양하면 고추다. 청양과 고추는 떼려야 뗄 수 없는 단짝친구다. 그럴만한 인과관계가 있어서다. 어쨌든 ‘청양=고추’라는 등식은 수많은 파생물을
두 개의 마을이 있다. 하나는 좀 오래된 거고 또 하나는 요즘 만들어진 이른바 ‘신상’이다. 그런데 두 마을엔 공통점이 있다. 마을 자체가 소위 잘 팔리는 문화관광 자원이라는 거다. 하나는 전통문화가 살아 숨 쉬는 곳이어서, 또 하나는 좀처럼 보기 힘든 이국적 풍경을 선사해서 사람들이 많이 찾는다. 그렇다고 용인에 있는 한국민속촌처럼
ㄴ개미의 삶 통해 '공존 ·공생'을 배우다 “자연에 대해 많이 알고 자연을 사랑하는 사람을 만드는 기적을 이루는 곳.” 최재천 원장은 국립생태원을 이렇게 정의한다. 잘 알지 못해 마구잡이로 자연을 파헤친 무지(無知)를 깨닫고 자연의 움직임, 생태(生態)에 한 발 다가서 그 체계를 이해할 수 있게 하는 출발점이 바로 국립
▲ 국립생태원에 마련된 개미과학기지로 떠나는 개미세계탐험전에 참가한 어린 과학자들이 먹이를 따라 이동하는 개미들을 관찰하고 있다. 국립생태원 제공 위장결혼을 통해 다른 종족에 침투한다. 어느 정도 그 종족의 일원으로 자리를 잡은 뒤 이 종족의 여왕이 사는 굴로 들어가 여왕을 죽이고 대신 여왕 행세를 하며 종족을 번식시킨다. 이렇게 기생에 성공하면 자신만의
기지시줄다리기는 농어업으로 삶을 영위하는 이곳 사람들의 생활에서 비롯된 산물이다. 풍년·풍어를 기원하는 토속신앙과 조선 유교문화, 민속놀이가 결합된 역사적 산물이다. 당주를 담가 당제(국수봉)와 용왕제(흥척동 대동샘), 시장기원제(기지시장)를 지내며 한 해 평안을 염원하고 줄다리기를 통해 마을사람들끼리 화합을 다진다.줄다리기를 위해선 우선 볏짚
기지시 줄다리기 장면 경상도에선 “댕긴다” 하고 충청도에선 “다린다” 한다. 새끼줄을 놓고 하는 말이다. 우리네 전통놀이엔 줄다리기라는 게 있다. 줄을 놓고 양쪽에서 서로 당겨 승부를 가리는 거다. 줄다리기는 주로 농사일이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전에 했다. ‘대동단결’, 소작농들이 협심하는 의미
명재고택 전경 기호유학의 중심지답게 논산엔 조선시대 유적이 많다. 조선중기, 권력의 핵심에 있던 유학자들이 ‘선비’의 덕목을 지키며 뜻을 세우고 또 후학을 양성한 곳이 바로 논산이다. 향교와 서원, 고택들을 둘러보는 것만으로도 당시 선비들이 꿈꾸었던 세상과 가치관, 그리고 심오한 고민들을 엿볼 수 있다. 물론 아는 만큼 보이고 보이는
돈암서원 전경 ‘노성 윤씨는 묘치레, 연산 김씨는 식도락, 회덕 송씨는 집치레’라는 말이 있다. 놀뫼의 땅 논산에서 들을 수 있는 말이다. 놀뫼는 ‘누런 산’을 의미한다. 곡식이 익어가는 드넓은 평야의 풍요로움이다. 논산평야가 유명하지 않은가. 그래서 황산이라 불리기도 했다. 백제의 아픔이 서려 있는 곳 또한 황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