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청호오백리길 : 역사의 향기 품은 대청호ⓛ] 무너져내린 성벽, 역사의 순간들 들리는듯
  • 이기준 기자
  • 승인 2020.02.12 2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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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고산성에서 바라본 대청호 풍경. 

 

절기상 입춘(立春)을 지나면서 계절은 봄의 문턱을 넘어선다. 차갑지만 봄기운을 가득 머금은 바람과 제법 따스한 햇살에 목련 꽃망울이 돋아나고 이내 봄을 알릴 준비를 한다. 아직은 고독이 어울리는 계절이지만 대청호의 생태계는 이렇게 긴 겨울잠에서 깨어날 채비에 분주하다. 자연과 벗하는 길은 언제나 기대 이상의 선물을 선사한다. 마음의 휴식, 사색의 여유가 길 위에 펼쳐져 있다. 그 길엔 역사의 숨결도 살아 숨 쉰다. 길은 곧 인생·삶이고 그 자체로 역사이듯 대청호오백리길에도 옛 이야기들이 한가득 숨어 있다.

  대청호반길에서 만난 산성  

대전엔 유난히 산성(山城)이 많다. 대부분 삼국시대 백제에 의해 축조됐다. 주로 산 정상부에 테를 두르듯 둥글게 성을 축조한 테뫼식 산성이다. 대략 50여 개가 확인되는데 한 도시에 이렇게 많은 산성이 모여 있는 건 대전이 유일하다. 그래서 대전은 ‘산성의 도시’로 불린다. 산성이라는 테마만 놓고 유유자적 시간여행이 가능한 곳이 바로 대전이다. 대전의 산성 중 24개가 문화재(사적 또는 기념물)로 지정돼 있는데 이 중 15개(동구 11개, 대덕구 4개)가 대청호 주변에 포진해 있다. 백제와 신라가 치열하게 대립한 삼국시대, 이곳이 백제의 전략적 요충지였음을 여실히 보여준다.

노고산성의 일부. 무너진 성벽에서 역사의 흔적을 유추할 수 있다.
노고산성의 일부. 무너진 성벽에서 역사의 흔적을 유추할 수 있다.
노고산성 할미바위
노고산성 할미바위

#. 백제의 한(恨) 서린 노고산성

노고산성(老姑山城, 대전시기념물 제19호)은 대전시 동구 직동 뒷산인 노고산(250m) 정상부에 있는 산성이다. 남북쪽으로 장축을 이룬 타원형의 퇴뫼식 산성이다. 성 둘레는 300m 정도였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성벽의 대부분이 허물어져 그 윤곽만 확인할 수 있다. 남쪽 성벽의 일부만 남아 있고 성벽 한 곳에서 폭 2.3m의 문터가 확인됐다. 노고산의 이름은 산 정상부에 위치한 ‘할미바위’에서 유래했다고 전해진다. 대청호오백리길 2구간에 있는 찬샘정에서 20분 정도 산을 오르면 만날 수 있다. 찬샘정은 마을 수몰로 인한 실향민의 마음을 달래기 위해 1999년 동구가 조성한 정자다.

#. 유구한 세월의 흔적 성치산성

성치산성(城峙山城, 대전시기념물 제29호)은 대전시 동구 직동 성치산(210m) 정상부에 있는 산성으로 평면형태는 긴 타원형이다. 성벽의 둘레는 160m 정도이고 폭은 4.3m인데 거의 허물어져 원래의 모습을 파악하긴 어렵다. 동북쪽 성벽에서 남쪽 성벽에 이르는 부분에만 일부 그 형태를 유지하고 있다. 남문터가 남아 있는데 폭은 3m 정도다. 성 안 중심부엔 한 단 정도 높은 지형이 있는데 장수가 높은 곳에서 지휘하던 장대터로 추정된다. 봉수대 또는 저장시설의 흔적도 확인됐다. 대청호오백리길 2구간이 이곳 성치산성을 거친다. 노고산성과 성치산성 외에도 대청호오백리길 주변에선 마산동산성(馬山洞山城, 대전시기념물 제30호)과 견두산성(犬頭山城, 대전시기념물 제20호, 효평동) 등 다수의 산성이 그 흔적을 남기고 있다.

※ 직동(稷洞)의 지명 유래

노고산성이 있는 대전 동구 직동의 지명은 ‘피골’이라는 마을이름에서 비롯됐다. 피골은 노고산성에서 흘러내린 백제군과 신라군의 피가 내를 이뤘다 해서 이름 지어졌다. 훗날 동(洞) 단위로 행정구역을 개편하면서 한자로 표기할 때 기장 직(稷) 자를 음차해 직동(稷洞)이 됐다. 그런데 왜 피골을 한자로 표기할 때 기장 직(稷) 자를 음차 했을까? 우선 사람의 피를 의미하는 단어가 풍기는 이미지가 좋지 않다. 그래서 사람의 피 대신 잘 알려진 벼과에 속하는 일년생 초본식물인 피를 떠올렸다. 그런데 이 피를 의미하는 한자가 없다. 그래서 피와 비슷하게 생긴 기장을 생각했고 기장을 뜻하는 ‘직(稷)’ 자를 따 왔다. 현재는 ‘찬샘마을’이란 지명이 더 유명하다. 피골 근처에 아무리 가물어도 마르지 않고 얼음같이 찬 샘이 있는 ‘찬샘내기마을’(냉천골)이 있었는데 이 마을이름을 가져온 거다. 찬샘내기마을은 대청호가 조성되면서 물에 잠겼다.

  명가의 품격  

대청호오백리길 3구간에선 명문가의 품격을 느낄 수 있는 문화유산을 만날 수 있다. 관동묘려와 미륵원이 대표적이다. 동춘당(同春堂) 송준길(宋浚吉, 1606∼1672년)과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 1607∼1689)로 대표되는 은진송씨 가문과 회덕황씨 가문의 이야기가 솔깃하다.

관동묘려
절개 지킨 고흥류씨 부인 추모하는 재실인 관동묘려

#. 절개 상징 고흥류씨 부인과 관동묘려

관동묘려(寬洞墓廬, 대전시문화재자료 제37호)는 열녀문을 하사받은 쌍청당(雙淸堂) 송유(1389~1446)의 어머니 고흥류씨(柳氏, 1371∼1452) 부인을 추모하는 재실이다. 재실 중앙엔 큰 마루를 중심으로 좌우에 안방과 건넌방을 뒀고 안방 옆으론 2칸 크기의 부엌이 있다. 관동묘려는 은진송씨 대종회 사당인 추원사(追遠祠)와 연결돼 있다. 관동묘려 뒤편 추원사와 송명의선생 유허비는 성행교(省行僑)로 이어지는데 제법 운치가 있다.

고흥류씨의 남편은 포은 정몽주, 목은 이색 등과 함께 명망가로 평가 받았던 송명의(宋明誼)의 아들 송극기(宋克己)다. 송극기는 젊은 나이에 성균관 진사로 선발돼 개성에 살았는데 단명하고 만다. 당시 외아들이 있었는데 그의 나이 4살 때였다. 류씨의 시부모는 관례에 따라 스물 둘의 나이에 청상과부가 된 류씨를 개가시키려고 했는데 이 소식을 접한 류씨는 아들을 업고 시부모가 있는 회덕으로 달려왔다.

시부모는 그러나 삼종의 도(三從之道, 여자가 어려선 아버지를 따르고 혼인하면 남편을 따르고 남편이 죽으면 아들을 따르라)에 어긋난다며 류씨를 나무랐다. 류씨는 울며 말했다. “지금 저의 삼종지도는 이 아이에게 있지 않습니까.” 그러면서 류씨는 3일을 떠나지 않고 자리를 지켰다. 시부모는 감명을 받았고 류씨를 받아들였다. 이후 류씨는 시부모를 극진히 모시고 아들을 훌륭히 키웠다. 그 아들이 바로 쌍청당 송유다.

송명의 선생 유허비
송명의 선생 유허비

#. '회덕송씨의 시조' 송명의 선생 유허비

관동묘려 옆엔 송명의 선생 유허비가 있다. 송명의는 회덕에 살기 시작한 은진송씨 최초의 인물이다. 정몽주, 이색 등과 국사·학문으로 교류가 깊었던 문인으로 고려 공민왕 11년(1362) 과거 급제해 사헌부 집단에 이르렀지만 고려가 망하자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충절을 지켜 처가인 회덕황씨 향리로 내려와 은거했다. 이 비는 동구 신촌동에 있었지만 대청댐 조성으로 인한 수몰을 피해 1978년 이곳으로 옮겨왔다.

미륵원 남루
미륵원 남루

#. 회덕황씨 일가에서 운영하던 사설여관, 미륵원

미륵원(彌勒院, 대전시기념물 제41호)은 대전지역 최초, 어쩌면 우리나라 최초의 여관이라는 타이틀이 붙을 수도 있는 고려·조선초기의 원(院, 역(驛)과 역 사이에 설치한 일종의 여관)이다. 미륵원은 최소 3채 이상의 큰 건물이 모여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대청댐 완공으로 물이 차오르자 후손들이 남아 있던 남루(南樓)의 일부 자재만 갖고 현재의 위치로 이축했다. 현재는 단층 건물인데 단층을 정(亭)이라 하고 2층 이상은 루(樓)라고 했으니 아마도 원래 남루는 2층 건물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미륵원은 고려 말 공민왕 때 황윤보가 벼슬을 그만 두고 낙향해 건립한 일종의 여관이다. 나그네가 비바람을 피하게 하고 먹을 것을 베풀 뿐만 아니라 아픈 이는 치료도 해주는 의료·복지기관의 역할까지 했다고 한다. 미륵원엔 회덕황씨의 시조인 황윤보와 황연기, 황수에 이르기까지 3대에 걸쳐 봉사한 기록이 여말삼은(麗末三隱)의 한 명인 목은 이색의 회덕현 미륵원남루기(彌勒院南樓記)에 전한다. 황수는 남매를 뒀는데 그 사위가 은진송씨 회덕 입향조인 송명의다.

여기가 바로 당대 최고의 가문이었던 은진송씨와 회덕황씨의 교차점이다. 이색은 미륵원남루기에 이렇게 썼다. ‘미륵원을 세워 바람과 비를 막게 하고 누각을 세워서 화염과 같은 열기를 피하게 하며 탕을 주어서 얼어붙은 배를 따뜻하게 해주고 채소로 구미를 돋워 주니 행려자가 황씨의 혜택을 받음이 많다. 황씨 부자가 사랑하고 효도하고 우애하고 공경해 남에게 널리 베푸는 것이 이와 같으니 이는 사관(史官)이 마땅히 기록할 바다. 영사사(領史事)인 내가 서둘러서 이를 기록한다.’ 그러면서 이색은 ‘好施者 仁人長者之事也(호시자 인인장자지사야)’라고 하며 황씨의 선행을 칭송했다. ‘베풀기를 좋아하는 것은 어진 사람, 큰 덕이 있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라는 의미다.

하륜, 변계량, 정인지, 송시열 등 당대 내로라는 인물들이 남긴 제영기(題詠記)들은 미륵원의 위상을 짐작게 한다. 미륵원 남루 한켠엔 미륵원남루기를 비롯한 다양한 제영기가 목판에 새겨져 있다. 얼마 전까지 미륵원을 세운 황윤보의 13대손 황경식 씨와 육애숙 종부가 남루를 지키며 살았지만 지금은 인적이 끊겼다.

글·사진=이기준 기자 lkj@gg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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