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청호오백리길 대전구간을 걷다보면 유독 산성 유적이 눈에 띈다. 삼국시대, 금강 본류를 경계로 그만큼 군사적 긴장감이 고조됐던 시기가 있었고 고려시대 이후에도 교통의 측면에서 요충지였다는 방증이다. 전라도와 경상도에서 서울로 가는 길목이 바로 이곳 대전이다. 이 같은 지리적 장점은 지금의 대전이 있게 한 원동력이기도 하다. 전라도와 경상도로 갈라지는 고속도로와 기찻길 모두 대전에서 갈라진다.

[대청호오백리길] 원점회귀 코스 ⑤ 
노고산성 & 성치산성

노고산성에서 바라본 대청호. 이곳에 오면 누구나 카메라 혹은 휴대전화를 꺼내게 된다.
노고산성에서 바라본 대청호. 이곳에 오면 누구나 카메라 혹은 휴대전화를 꺼내게 된다.
[대청호의 재발견] 대청호오백리길 원점회귀 코스

① 물과 뭍의 경계, 우린 여기서 신선이 된다
대청댐→비밀의숲→지명산(지락정)→대청정→로하스캠핑장→로하스해피로드→대청댐
② 모래곶의 향연… 발길마다 포토존
명상정원 주차장→전망데크→홀로섬→추동습지 전망좋은곳→억새데크→명상정원 주차장

③ 전설과 추억을 품은 대청호 히든카드
내탑동 와정삼거리→배알봉→고해산정상→탑봉→옛 내탑수영장(왕복) : 5-1구간 

④ 대청호 벚꽃 로드, 벚꽃이 전부가 아니다
벚꽃한터(대전 동구 신상동)→흥진마을길→오동선벚꽃길→방축골→벚꽃한터

⑤ 깨어나는 백제 흥망의 역사
찬샘마을→노고산성→찬샘정→성치산성→찬샘마을

노고산성 가는 길에 만나는 할미바위.
노고산성 가는 길에 만나는 할미바위.

#. 할미바위의 전설
이번 대청호오백리길 원점회귀 여정은 ‘산성 투어’다. 대전 동구 직동 찬샘마을에서 출발해 노고산성과 성치산성을 차례로 둘러보는 시간을 갖는다. 원래 2구간은 성치산성에만 오르고 노고산성은 그냥 지나치는 코스로 돼 있는데 노고산성에서 바라보는 대청호의 풍경은 그냥 지나치기엔 너무 아까워 어지간하면 2곳을 한 번에 섭렵한다. 산성 오르는 길만 선택해 원점회귀 코스를 잡으면 약 8㎞로 그리 길진 않다. 다만 2개의 산을 올라야 하니 체력적으로 좀 고되긴 하다. 물론 정상에 오르면 그 수고로움에 대한 보상이 충분하고도 넘칠 정도로 준비돼 있다.

찬샘마을(윗피골) 노인정에서 이정표를 따라 노고산 등정을 시작한다. 마을 투박하지만 고풍스러운 돌담길이 정겹게 맞이한다. 완만한 등산로를 따라 천천히 발걸음을 옮긴다. 쉼 없이 오르막이 펼쳐지는데 반대쪽 등산로보단 긴 대신 완만하다. 얼마 걷지도 않았는데 땀이 송글송글 맺히는 걸 보니 계절은 벌써 여름을 향해 달려가는 것 같다. 신록(新綠)의 싱그러움을 제대로 느끼기도 전에 숲은 벌써 짙은 초록이 완연하다. 봄이 그만큼 짧아졌다는 의미일 거다.

출발지점에서 약 40분, 무너져내린 돌무더기가 이곳이 산성이었음을 말해준다. 백제의 한(恨)이 서려있는 노고산성(老姑山城)이다. 노고산성은 노고산(250m) 정상부에 있는 산성이다. 남북쪽으로 장축을 이룬 타원형의 테뫼식 산성이다. 성 둘레는 300m 정도였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성벽의 대부분이 허물어져 그 윤곽만 확인할 수 있다. 남쪽 성벽의 일부만 남아 있고 성벽 한 곳에서 폭 2.3m의 문터가 확인됐다. 노고산의 이름은 산 정상부에 위치한 ‘할미바위’에서 유래했다고 전해진다. 할미처럼 생겼다고 해서 ‘할미바위’라고 부르기도 하고 할머니가 명주치마에 돌을 담아 쌓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는 설도 있다. 아들을 병사로 보내고 매일 새벽 치성을 드리던 노모의 영혼이 깃들어 있다는 전설도 전해진다.

노고산성 대청호 조망이 확 트인 자리에 달려있는 종. 이름 모를 어느 노모의 치성처럼 새해 첫 해돋이를 보며 종을 3번 치면 소원이 이뤄진다고 한다. 물론 믿거나 말거나다.
노고산성 대청호 조망이 확 트인 자리에 달려있는 종. 이름 모를 어느 노모의 치성처럼 새해 첫 해돋이를 보며 종을 3번 치면 소원이 이뤄진다고 한다. 물론 믿거나 말거나다.
노고산성에서 내려다 본 대청호. 카메라 줌렌즈로 당겨서 촬영했다. 계속된 가뭄으로 수위가 많이 낮아졌다.
노고산성에서 내려다 본 대청호. 카메라 줌렌즈로 당겨서 촬영했다. 계속된 가뭄으로 수위가 많이 낮아졌다.

오래 전부터 이곳은 새해 일출명소로도 이름이 나 있다. 대청호 조망이 확 트인 자리에 종 하나가 매달려 있는데 이름 모를 어느 노모의 치성처럼 새해 첫 해돋이를 보며 종을 3번 치면 소원이 이뤄진다고 한다. 믿거나 말거나다. 새해 첫 해돋이는 고사하고 이곳에서 맑은 하늘, 불덩이처럼 솟아오르는 해돋이의 환희를 느끼는 것 자체가 어려운 일이라 그만큼 발품을 팔아야 추억 돋는 사진 한 장 남길 수 있다. 물론 해돋이가 아니어도 노고산 정상에서 바라보는 대청호 풍경은 말 그대로 장관이다.

#. 백제의 恨, 수몰민의 애환
넓디넓은 대청호의 장쾌한 풍경을 뒤로 하고 다시 성치산성으로 향한다. 내리막이 무척 가파르다. 조심조심 내리막을 타면 금세 찬샘정에 도달한다. 찬샘정 한켠, 망향비가 눈에 띈다. ‘산 좋고 물도 좋은 내 고향 냉천땅에서…’로 시작하는 이 망향비엔 수몰민의 고향 사랑이 깊게 새겨져 있다. 찬샘정에서 바라보는 대청호는 한없이 평화롭지만 수몰민의 추억을 담고 있어 애잔하기만 하다.

노고산성에서 대청호 쪽으로 내려오면 만나는 찬샘정. ‘산 좋고 물도 좋은 내 고향 냉천땅에서…’로 시작하는 이 망향비엔 수몰민의 고향 사랑이 깊게 새겨져 있다.
노고산성에서 대청호 쪽으로 내려오면 만나는 찬샘정. ‘산 좋고 물도 좋은 내 고향 냉천땅에서…’로 시작하는 이 망향비엔 수몰민의 고향 사랑이 깊게 새겨져 있다.

동구 직동의 유래에 대해 이야기 하며 호반길을 걷는다. 직동(稷洞)은 ‘피골’이라는 마을지명에서 유래한다. 삼국시대, 백제와 신라가 이곳에서 치열하게 전투를 펼쳤는데 병사들의 시체가 산을 이뤄 이들의 피가 산골짜기에서 쉼 없이 흘러내렸다고 전해진다. 그런데 이 ‘피’을 음차하면서 기장(피) 직(稷)을 가져다 써서 한자 지명이 이렇다. 현재 남아 있는 피골은 최근 들어 ‘찬샘마을’로 더 잘 알려져 있다. 농촌체험마을로 이름을 날리면서다. 찬샘마을은 직동 ‘찬샘내기·냉천골’이란 지명에 유래한다. 냉천골은 아무리 가물어도 마르지 않고 얼음같이 찬샘이 있는 마을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 또 하나의 산성
도란도란 이야기 꽃을 피우다 보니 어느새 찬샘마을로 진입하는 서낭당고개다. 고갯길 한켠, 여느 마을과 다름없이 수백년 세월을 간직한 마을 보호수 한 그루가 널찍한 그늘을 선사한다. 보호수 바로 옆 성치산성을 가리키는 이정표가 나온다. 다시 고된 산행이다. 지그재그로 완만하게 길이 나 있지만 성치산성까진 1.6㎞. 짧지 않은 거리다. 성치산성이 자리한 곳보다 높은 봉우리 하나를 넘고 곧장 내리막을 탄 뒤 다시 봉우리 하나를 더 넘어야 성치산성에 도달한다. 호흡은 거칠어지고 두 다리 역시 천근만근이지만 산 정상에서만 느낄 수 있는 희열을 생각하며 다시 힘을 낸다.

돌덩어리들이 나뒹구는 것을 보니 산성에 도달한 모양이다. 마지막 힘을 짜내 몇 걸음 더 발길을 내디디니 파란 하늘이 시원하게 펼쳐지고 숲에 가려져 있던 대청호도 선명하게 모습을 드러낸다. “하∼.” 이 외마디 탄성에 육체적 고단함은 한순간에 날아가고 이내 성취감으로 채워진다. 힘들어도 산에 오르는 이유, 십중팔구 ‘새로운 시선의 발견에서 느끼는 희열’, 바로 이거 하나다.

성치산성 조망터에서 대청댐 보조여수로를 멀리서 만난다.
성치산성 조망터에서 대청댐 보조여수로를 멀리서 만난다.
대청호오백리길 1구간 대청댐 보조여수로.
대청호오백리길 1구간 대청댐 보조여수로.

대전 대덕구 부수동 성치산(219m) 정상부에 위치한 성치산성(城峙山城) 역시 띠를 두르듯 산 정상부를 빙 둘러가며 쌓아올린 테뫼식 산성이다. 성벽의 둘레는 약 200m이고 폭은 4.3m인데 거의 다 허물어져 원래의 모습을 가늠하긴 어렵다. 현재 동북쪽 성벽에서 남쪽 성벽에 이르는 부분에서만 일부 그 형태가 남아 있다. 성치산은 대청호가 조성되기 전 신탄진에서 충북 보은·옥천 방면으로 향하는 길목이었다. 또 옥천으로 향하는 고갯마루가 잘 보여 성치산성은 고갯길과 금강 수로를 살피기 위해 조성됐을 것으로 추정된다.
글=이기준 기자 lkj@ggilbo.com
사진=차철호·김동직 기자
 

   또 하나의 대전 수식어 ‘산성의 도시’   
확인된 것만 50곳 달해 단일도시 최대
절반 이상이 대청호 등 동부지역 집중

대전 동구 직동 ‘피골’이라는 지명은 섬뜩하게 다가온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희생됐으면 그 피가 강물처럼 흘렀다는 이야기가 전해졌을지 생각해보면 말이다.

그런데 대전 동부지역에 촘촘하게 구축된 옛 산성의 흔적을 유심히 보면 산성들이 축조됐을 당시 얼마나 치열한 전투가 펼쳐졌을지 미뤄 짐작할 순 있다. 대전지역에서 발견된 산성은 약 50곳에 이르는데 이는 단일도시로는 가장 많은 수준이다. 특히 대전의 산성 중 절반 이상이 식장산·계족산 줄기와 대청호 주변에 몰려 있다. 이 산성들은 대부분 삼국시대, 백제에 의해 축조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특히 백제와 신라가 치열하게 대립한 6세기 후반부에 조성됐을 것으로 분석된다. 식장산·계족산 줄기와 금강(대청호)을 경계로 백제와 신라가 첨예하게 맞섰던 상황을 고스란히 엿볼 수 있다는 거다.

질현성에서 내려다 본 대청호.
질현성에서 내려다 본 대청호.

이 시기는 근초고왕 이후 가장 강력한 백제의 군주로 꼽히는 성왕 때인데 성왕은 사비(충남 부여) 천도를 통해 전열을 정비하고 신라와 연합(나제동맹)해 551년 백제의 뿌리였던 한강유역을 되찾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곧바로 신라는 나제동맹을 깨고 한강유역을 접수한 뒤 서해를 통해 당나라와 직접 교류할 수 있는 디딤돌을 마련했다. 이후 백제와 신라는 일진일퇴의 공방을 거듭했고 결국 신라는 당과의 연합을 통해 백제를 무너뜨리고 삼국통일의 발판을 마련했다. 이 치열했던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는 곳이 바로 이곳 대청호다.

식장산·계족산 능선을 타고 남쪽부터 마달산성, 계현산성, 갈현성, 능성, 질현성, 견두산성, 계족산성 등이 발견되고 이어 금강을 경계로는 백골산성, 마산동산성, 노고산성, 성치산성 등이 유기적으로 나름의 군사적 역할을 수행했다. 이 중 계족산성은 대전지역 산성 중 유일하게 국가사적(제355호)으로 지정돼 관리되고 있다. 성 둘레는 약 1㎞로 대전 소재 산성 중 가장 규모가 크다. 백골산성의 경우 유일하게 1차 방어선에 구축된 산성으로 금강(대청호) 너머에 위치해 있다. 백골산이라는 명칭에서도 시사하듯 이 산성을 사이에 두고 삼국시대에 백제군과 신라군 간 치열한 공방전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기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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