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영혜가 만난 사람] 3. 정운찬 전 국무총리

정운찬 전 국무총리는 인생을 “목표점을 모르는 마라톤”으로 비유했다. 일찍 끝날지, 끝까지 완주할지 알 수 없는 길을 달리며 부침(浮沈)을 많이 겪는 게 마라톤과 닮았다는 의미다. “우리 삶이 언제 내리막길에서 오르막길로, 오르막길에서 내리막길로 변할지 아무도 모르기 때문에 어떤 상황이 닥치든 유연함을 유지하며 조화와 균형을 모색해야 한다”고 그는 강조했다. 하지만 우리네 인생은 가족부터 사회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관계를 맺고 살아간다는 점에서 혼자 뛰는 마라톤 게임과 다른 면도 있는 게 사실이다. 혼란했던 해방공간, 가난한 공주 양반 집안에서 막내로 태어난 어린이는 어떻게 동네 어른이 예언한 대로 ‘운이 가득 찬’ 삶을 살아올 수 있었을까.

 

       민영혜가 만난 사람      
3. 정운찬 전 국무총리

정운찬 전 총리가 스승 조순 선생에 대해 이야기하며 환히 웃고 있다.

서울대학교 근처 관악구 신림동에 있는 동반성장연구소에서 정 총리를 만났다. 1947년생으로 올해 77세인 그는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경제학자로 서울대 총장과 국무총리를 지냈고, 프로야구 KBO 총재를 역임하기도 했다. 이명박정부가 설립한 동반성장위원회 초대 위원장을 맡은 뒤 2012년 동반성장연구소를 설립, 동반성장 문화의 조성과 확산을 위해 지금까지 힘쓰고 있다. 그가 주창하는 동반성장이란 부자들의 것을 빼앗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는 것이 아니라 ‘더불어 같이 성장하기 위해 파이를 더 크게 하고 분배를 공정하게 함으로써 모두 함께 더 가질 수 있는’ 공존과 공생의 학문적, 제도적 기반이다.

"고비마다 손 내민 스승님 덕분에 인생 달라졌다"

부친 여의고 가난했던 유년시절
학비 마련해준 스코필드 박사 통해
정직·반부패 등 중요한 가르침 얻어
‘경제학 대부’ 조순 선생과 인연
美 유학생활·서울대총장까지 역임

인생 고비서 만난 두 명의 스승 덕에
다양한 계층 기회 주는 균형선발과
다함께 잘 사는 동반성장 가치 배워

 아, 그리고 나의 어머니 ...

총장 시절 ‘프레시맨 세미나’를 정리하여 책으로 펴낸 ‘가슴으로 생각하라’에서 정 총리는 어려운 환경 속에서 자신이 겪은 실수와 아픔을 고백하며 “나도 해냈으니 너희는 더 잘할 수 있다”는 희망의 메시지를 청년들에게 전하고 있다. 세계적인 경제공황을 극복하는 데 이론적 토대를 제공한 영국 경제학자 존 메이너드 케인즈는 “고루한 관습과 낡은 인식의 틀에 반대하면서 인간의 창조적 정신이 사회의 변혁을 이끌어낼 수 있다고 믿었다”고 한다. 학창 시절부터 케인즈에 심취해서 그런지 그의 삶의 궤적 곳곳에서 케인즈를 읽을 수 있다. ‘자유롭게, 자율적으로 삶을 영위하면서도 항상 정직하고 성실한 시민’을 목표로 삼아온 그는 자녀들도 ‘훌륭한 시민’으로 살기를 바란다.

정 총리는 대학교 4학년 때 운명 같은 사랑을 만나지만 유학을 가게 되면서 커다란 위기를 맞는다. 용기를 내어 여학생의 집에 인사 갔다가 보기 좋게 퇴짜를 맞아, 미국에서 공부하면서도 헤어질지 모른다는 불안감과 그리움을 감출 수 없었다. 청춘 남녀를 맺어준 것은 태평양을 오간 500여 통의 편지와 “조그만 대학의 교수 정도는 능히 할 학생”이라는 은사 조순 교수의 지원이었다. 조순 선생 이외에도 그에게는 세 분의 ‘아버지’가 더 있다. 삶의 고비마다 은혜와 사랑을 베풀어 준 은인들 덕분에 사랑하고 배려하는 법을 배웠다는 휴머니스트 정운찬 전 총리의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동반성장연구소에서 필자와 인터뷰 중인 정운찬 전 총리.
동반성장연구소에서 필자와 인터뷰 중인 정운찬 전 총리.

1. 아버지가 네 분이라고?

나를 낳아 주신 아버지는 내가 아홉 살 때 돌아가셔서 많은 기억이 남아 있지 않다. “운찬이는 저의 아들입니다.” 내가 어릴 때부터 작은아버지가 자주 하시던 말씀이다. 연달아 딸만 낳은 작은아버지는 나를 자신의 호적에 올리고 찾아뵐 때마다 푸짐한 음식을 차려 주셨지만 그분 역시 내가 고등학교 다닐 때 유명을 달리했다. 세 번째 아버지는 중학교에 진학할 발판을 마련해 주신 스코필드 박사, 네 번째 아버지는 조순 선생이다.

2. 영영 벗어나지 못할 것처럼 가난했던 어린 시절, 부모님으로부터 받은 영향은?

유학 시절 어머니가 강원도 영월 형님댁에서 돌아가셨는데 한참 뒤에야 알게 되었다. 어머니는 아들 공부에 지장이 된다며 나에게 알리지 말라는 말씀을 유언처럼 남기셨다. 초등학교 때부터 동네 아이들을 가르치며 용돈을 벌었기 때문에 부모님께 경제적으로 도움받은 것은 거의 없다. 그러나 정신적으로는 지대한 영향을 받았다. “밥상에서 손이 안 닿는 곳에 있는 음식은 먹지 말라”거나 “잔칫집이 있더라도 세 번 이상 부르지 않으면 가지 말라”는 말씀을 반복해 들려주셨다. 어머니는 자식들에게도 반말을 쓰지 않으셨는데, 두 분의 말씀대로 분수에 맞게 살고자 했고 조용히, 나대지 않으려 노력했다. 노태우, 김대중, 노무현 정부 등에서 다양한 제안을 받았지만, 세 번 이상 요청하지 않으면 가지 않았다.

3. 프랭크 윌리엄 스코필드 박사와의 인연은?

영국에서 태어나 캐나다에서 수의학 박사를 받은 스코필드 박사님은 내게 특별한 의미가 있는 분이다. 초등학교 6학년까지도 나는 중학교에 갈 형편이 안 됐다. 이병헌이라는 급우가 “어느 중학교 갈 거야?”라고 물었을 때 나는 안 갈지도 모른다고 솔직하게 대답했다. 그 친구 아버지가 “너, 공부 잘한다며? 경기중학교만 들어가라”며 격려하셨을 때도 쉽게 믿기지 않았다. 그 후 그분이 소개해 주신 스코필드 박사가 내 학비도 3년 동안 마련해 주었고, 인격형성에 도움을 주었다. 스코필드 박사는 직간접적으로 3·1운동에 관여하여 지금도 ‘34번째 민족 지도자’로 추앙을 받는 분이다. 어릴 때부터 다리에 마비증세가 있었지만 자전거를 타고 일본 경찰이 벌인 경기도 화성 제암리 참사를 해외에 알리기도 하셨다.

4. 스코필드 박사의 세 가지 가르침은?

첫째가 정직이다. 스코필드 박사는 “정직이 가장 경제적”이라고 했다. 거짓말을 하게 되면 그것을 합리화하기 위해 거짓말을 반복해야 하기 때문이다. 두 번째는 “선하고 어려운 사람에게는 비둘기의 자애로움으로, 정의롭지 못한 강자에게는 호랑이의 날카로움으로 대하라”는 것이다. 스코필드 박사는 일제에 추방당하다시피 출국한 뒤 토론토에서 의학자이자 명실상부한 세계적 수의학자로 활약하다가 1958년에 다시 우리나라에 오셔서 1970년 돌아가실 때까지 고아원과 보육원에 재정적 지원을 하고 빈손으로 운명하셨다. 한국이 잘 살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부정부패를 없애야 한다고 강조하신 게 세 번째 가르침이다. 신문 기고와 강연을 통해 반부패 캠페인을 벌이고, 경제가 발전해야 나라가 발전할 수 있다고 우리 국민을 깨우쳐 주신 것도 그분이다. 내가 경제학을 공부하고 오늘날까지 동반성장을 강조하는 데에도 그분의 영향이 컸다.

스코필드 동상을 보여주는 정운찬 전 총리. 스코필드 박사의 은혜를 아는 정 전 총리는 스코필드 기념사업회를 조직, 운영하며 스코필드 정신을 기리고 있다.
스코필드 동상을 보여주는 정운찬 전 총리. 스코필드 박사의 은혜를 아는 정 전 총리는 스코필드 기념사업회를 조직, 운영하며 스코필드 정신을 기리고 있다.

5. 홀몸으로 자녀들을 키운 어머니에 대해 조금 더 설명해 달라.

나중에 병헌 군의 어머니를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만나 식사를 대접했다. 아버님 이영소 교수님은 별세하신 이후였다. 뒤늦게 감사의 마음을 전하자 내 어머니 칭찬을 많이 하셨다. 서울로 이사한 뒤 한 가족이 달동네 단칸방에서 살았지만 어머니가 충청도 양반댁 맏며느리라 이웃에 관혼상제가 있을 때면 어머니는 어른 노릇을 하며 옷도 만들어줬던 것 같다. 빈한한 살림살이에 어머니는 한겨울에도 맨손으로 병원에서 나오는 침대보나 빨랫감을 대신 빨아주며 우리를 먹여 살리셨다.

6. 조순 선생이 정운찬의 인생을 만들어줬다고.

조순 선생이 유학 마치고 돌아오시기 전까지 서울대 입학 후 1년 반을 너무 재미없게 보냈다. 그분은 단박에 우리를 매료시켜 그때 비로소 경제학의 매력을 알게 되었다. 다른 교수님들이 반말을 쓸 때 조순 선생은 함부로 하대를 하지 않으셨다. 대학 3학년 때 그분이 나를 부르더니 미국 유학을 권유했다. 고학생에게는 꿈같은 얘기였다. 대학을 졸업하고 한국은행에서 1년쯤 지난 어느 날, 조순 선생이 찾아오셔서 “지금까지의 학부 공부는 한국은행 다니기에도 모자라니 유학을 준비하라”고 분부하셨다. 너무도 뜻밖이라 처음에는 유학시험에도 떨어졌다가 2개월 뒤 다시 붙었다.

7. 미국에서도 지도교수 도움을 받은 ‘운이 가득 찬’ 학생이었다고.

박사학위를 받기도 전에 직장을 구하려고 네 군데에 지원을 했다. 뉴욕 연방준비은행과 보든칼리지에서는 잡 오퍼(job offer)가 왔는데, 국제통화기금(IMF)과 컬럼비아대에서는 아직 연락이 없었다. 그때 마침 지도교수인 엘런 블라인더 박사를 만나 그 얘기를 했더니 그분이 대뜸 컬럼비아대에 전화를 해 “내일까지 연락이 없으면 한국에서 온 놀라운(terrific) 인재가 IMF로 갈 것”이라고 하더니 IMF에도 전화해 “컬럼비아로 갈 것”이라고 말해 놀라웠다. 그런데 다음 날 10시 정각, 두 군데에서 동시에 전화가 와 자기네가 영입하겠다고 말해 더 놀라웠다. 사람은 정직해야 하지만, 남을 위해서는 선의의 거짓말을 할 수도 있다는 뜻인 것 같아서. 아무튼 나는 지도교수님 덕분에 컬럼비아로 가서 경제학을 가르칠 수 있었다.

8. 컬럼비아 교수 생활은 오래가지 않았는데.

1976년 조순 선생이 서울대에서 처음으로 교수를 공개 채용하니 지망하라는 연락을 주셨다. 콜럼비아에서 저명한 학자들과 공동연구를 추진하며 한참 가르치는 일에 재미를 붙이고 있어 주저하다가 은사님 말씀을 거역할 수 없어서 지원했다. 장모님은 “북한이 코앞에 있어 위험하니 서울에 오지 말라”며 은근히 미국에 남기를 바라셨다. “미국은 소련이 있어 더 위험하다”며 귀국을 감행하여 1978년 가을부터 서울대에서 일을 시작했다. 컬럼비아대 연봉은 2만 5000달러였고 보든칼리지는 1만 5000달러였는데, 서울대학교에서는 한 달에 50만 원 정도를 받았다.

9. 조순 선생에게 배운 지역 균형 선발제.

미국에서 유학할 때 보니 그곳에서는 계층 균형, 지역 균형 등을 선발 기준으로 삼고 있었다. 서울대 총장이 되고 재학생을 조사한 결과, 100명 중 42명이 서울, 그리고 26명이 강남 출신이었다. 오래 생각할 것도 없이 3분의 1은 지역 할당제로 뽑겠다고 밝혔다. 각계각층에서 반대가 엄청났다. 나는 학장들에게 “다양한 학생들이 서로를 배우면 교육적으로도 좋다”는 말로 설득했다. 지역 균형을 지향하면서 대학 교육은 더욱 풍요로워질 수 있었다. IMF 위기 이후 대우는 망한 반면 삼성이 여전히 잘 되는 이유도 바로 구성원의 다양성 문제라고 생각한다.

정운찬 전 총리가 지난해 9월 7일 제100회 동반성장포럼에서 '동반성장을 다시 생각하다'는 주제로 발표하고 있다.
정운찬 전 총리가 지난해 9월 7일 제100회 동반성장포럼에서 '동반성장을 다시 생각하다'는 주제로 발표하고 있다.

10. 행정수도 이전에 대한 생각은.

전 세계에 행정 입법 사법이 분리된 곳은 남아메리카 대륙에 하나뿐이고, 수도를 옮긴 예도 브라질과 호주뿐이다. 수도를 세종시로 옮길 수는 있으나 행정수도가 둘로 나누어진 나라는 한국이 유일하다. ‘길 국장’, ‘길 과장’이라는 말을 들어봤는가. 국장과 과장이 서울과 세종을 오가다 보니 길에서 시간을 다 보내게 된다는 뜻이다. 어느 정부든 성공하기 위해서는 공무원들의 역할이 크다. 그런데 지금 우리나라 행정은 우려스러울 정도다. 세종시에 정부 부처 대신에 과학기술벨트를 만들어 거대한 연구시설들을 건설하고 유수의 대기업들(삼성, 롯데, 한화)을 유치했다면 세종시가 충청권을 넘어 대한민국의 미래를 책임지는 최첨단 도시로 우뚝 섰을 것이다. 우리는 역사를 기억해야 한다. 조선의 정도전도 금강의 수량이 적어서 결국 한강을 선택하지 않았나.

11. 우리 사회에서 학교와 학문이란?

근대화 시대까지는 모방적 인적자원도 필요했지만 현대는 창조적 인적자원이 필수적이다. 지덕체가 아니라 ‘체덕지’로 바꿔 건강한 신체에서 창의적인 아이디어가 샘솟게 해야 한다. 창의성 기르는 학교 교육이 필요하다. 다양할수록 창의적일 가능성이 높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지역·계층·인종 등 학교 구성원들을 다양화해야 하며 글로벌 마인드를 가진 교수 또한 필요하다. 모든 상상력을 동원하여 창의적이고 독창적인 문화를 만들면 좋겠다. 우리는 모르는 것을 책 속에서 배워야 한다. 틈나는 대로 책을 읽어야 한다. 우리 사고의 도구이자 소통의 도구인 언어가 추론의 기초가 되고 추론이 사상이 되고, 사상이 모여 문화가 된다. 문화 일류국이 되려면 언어교육이 중요하고 독서가 중요하다. 지금은 평생교육 시대다. 학교를 졸업한 후에도 계속 배워야 한다. 열심히 읽고 열심히 써야 한다.

12. 인생을 새롭게 시작하려는 사람들에게.

유학 시절, 신문 기사에서 중진 변호사가 로스쿨에 다니는 아들에게 쓴 편지를 읽었다. 그 편지 내용에 따르면 세상 사람들은 좋은 사람, 나쁜 사람, 이상한 사람, 모르는(unknown) 사람 이렇게 네 가지 타입으로 나누어진다. 중요한 점은, 모르는 사람을 대할 때 좋은 사람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일단 좋은 사람으로 대하면 상대방도 좋은 반응을 보이는 게 인지상정이다. 안타깝게도 요즘 사람들은 모르는 사람 대부분을 나쁜 사람으로 생각하는 것 같다. 모르는 사람을 좋은 사람으로 대할 때 우리 인생, 우리 사회가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갈 것이라는 게 내 생각이다.

13. 후회되는 일은.

지역 균형 선발제를 추진할 당시에 계층 균형 선발을 강하게 하지 못한 것이 지금도 큰 후회로 남아 있다. 계층 균형 선발을 도입해야 우리 사회 고질병인 계층 간 갈등을 해소하고 교육을 통한 계층 간 자유로운 이동이 가능해질 것이다. 2010년 6월 29일 정부가 내놓은 세종시 수정안을 국회가 부결시켰는데, 이것도 정말 큰 실책이었다. 그 당시 대통령에게 수정안을 국민투표에 부치라고 더 강력하게 주장했더라면 결과가 바뀌지 않았을까? 살면서 때로는 강한 드라이브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결과가 바뀌었더라면 경제적으로도 충청권의 성장과 대한민국의 발전에 더 큰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글쓴이 민영혜 씨는 책 속에 길이 있다는 믿음으로 청소년 독서 교육과 진로 코칭, 성인들을 위한 인문 독서 모임을 이끄는 북 큐레이터이자 민주시민의 덕성을 함양하는 문화운동가다. 인문 독서 교육 ‘문학과 서평’ 대표와 ㈔한국청소년체험세상 이사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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